[인문사회]‘자유와 인권의 최후 보루’ 미국 연방법원, 한 죄수에게 두 차례나 사형을 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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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9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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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발칵 뒤집은 판결 31/레너드 케스터·사이먼 정 지음/440쪽·1만8000원·현암사

화가 에마누엘 로이체가 그린 유화 ‘델라웨어 강을 건너는 조지 워싱턴’.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정한 새 국가의 비전 ‘연방주의’와 ‘삼권분립’은 미합중국 헌법 전편을 관통하고 있으며 사법부 최고기관으로서 연방대법원은 정의를 수호하는 최후의 보루로 여겨져 왔다. 현암사 제공
화가 에마누엘 로이체가 그린 유화 ‘델라웨어 강을 건너는 조지 워싱턴’.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정한 새 국가의 비전 ‘연방주의’와 ‘삼권분립’은 미합중국 헌법 전편을 관통하고 있으며 사법부 최고기관으로서 연방대법원은 정의를 수호하는 최후의 보루로 여겨져 왔다. 현암사 제공
윌리 프란시스는 몹시도 운이 없는 사형수였다. 동네 약국 주인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돼 사형 선고를 받은 그는 1946년 5월 미국 루이지애나 주에서 전기의자형에 처해졌지만 수차례 고압 전류가 흘렀음에도 끝내 죽지 않았다. 급기야 전류가 흐르도록 머리에 덮은 띠와 덮개가 답답하다며 풀어 달라고 요청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장비 고장으로 전류가 사형수에게 전달되지 않은 때문이었다.

교도소 측이 다시 장비를 설치하는 동안 젊은 변호사가 일사부재리 원칙을 들어 “사형수에게 두 번 사형집행을 하는 것은 헌법이 규정한 적법 절차의 원칙을 위반한 것”이라며 연방대법원에 심의를 요청했다. 대법관 9명이 내린 결과는 5 대 4, ‘죄수의 불운까지 헌법이 책임질 순 없다’는 판결이었다. 프란시스는 결국 판결이 나온 지 5개월 만에 다시 의자에 앉았고 ‘실수 없이’ 몸으로 흐른 2500V의 전류에 숨을 거뒀다.

저자는 프란시스를 여러모로 ‘두 번 죽인’ 사례 외에도 미국의 연방대법원이 내린 역사적인 31가지 판결을 소개한다. 연방대법원에 올라오는 청원은 연간 1만 건이지만 이 중 심의를 위해 선택되는 사건은 100건도 채 되지 않는다. 추리고 추린 31가지의 목차만 훑어봐도 미국의 과거와 현재를 이해하는 열쇠를 쥔 느낌이다.

1890년 처음 집행된 전기의자형은 교수형이나 총살형에 비해 비교적 ‘인도적인’ 사형 방법으로 인식되면서 20세기 중반까지 연방 20여 개 주에서 시행됐다. 1980년 독극물 주사에 의한 처형 방식이 도입된 뒤엔 쇠퇴해 현재 앨라배마와 플로리다를 비롯한 일부 주에서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현암사 제공
1890년 처음 집행된 전기의자형은 교수형이나 총살형에 비해 비교적 ‘인도적인’ 사형 방법으로 인식되면서 20세기 중반까지 연방 20여 개 주에서 시행됐다. 1980년 독극물 주사에 의한 처형 방식이 도입된 뒤엔 쇠퇴해 현재 앨라배마와 플로리다를 비롯한 일부 주에서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현암사 제공
미국 사법부 최고 기관인 연방대법원의 대법관은 한번 임명되면 스스로 퇴임하거나 의회의 탄핵을 받지 않는 이상 해임되지 않는 종신직이다. 지성, 법률적 성취, 평판 등 여러 면에서 당대 최고의 법관들이 벌이는 치열한 논리전쟁이 볼만하다. “흑인은 인류 질서상 열등한 족속으로 독립선언서에 나타난 권리와 특전을 부여할 수 없다”며 남북전쟁의 씨앗을 탄생시킨 일도 있었지만 공룡 기업 스탠더드 오일을 전격 해체해 자본주의의 독과점을 경고하는 명판결을 이뤄내기도 했다. 미국 27대 대통령이자 10대 연방대법원장을 지낸 윌리엄 태프트는 미국 사회에서 연방대법원의 막강한 영향력을 한마디로 정리했다. “대통령은 왔다가 가지만 연방대법원은 언제까지고 이어진다.”

다른 법률 관련 교양 입문서들이 판례를 소개하는 데 급급했다면 이 책은 판결과 비하인드 스토리를 잘 버무린 독특한 구성이 돋보인다. 사건의 역사적 배경과 소송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는 프롤로그, 판결문과 반대 의견, 판결 이후 사회에 끼친 영향을 서술한 에필로그가 미국 사회나 법을 잘 모르는 일반인들의 이해를 돕는다.

책의 백미는 정갈한 판결문만큼 논리 정연한 일부 대법관의 반대 의견 글이다. 문장력과 유머, 날카로운 비판력 등 어느 면에서도 판결문에 뒤지지 않는다. 2000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조지 부시와 민주당 부통령 앨 고어가 맞붙은 대통령 선거 재검표 결과에 대한 판결이 대표적이다. 양측의 구두 변론을 들은 지 16시간 만에 연방대법원이 부시의 손을 들어주는 것으로 끝나자 반대 의견을 제시한 존 폴 스티븐스 대법관은 “상황을 신속히 종료하겠다는 구실로 헌법이 보장한 동등한 보호의 원칙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대선의 진정한 승자가 누구인지 확실히 알 수 있는 방도는 없어졌지만 패자가 누구인지 분명해졌다. 패자는 재판관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잃도록 만든 모든 관계자”라고 일갈했다.

미국을 발칵 뒤집은 판결들이지만 한국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표현의 자유, 낙태, 예술과 외설의 기준, 안락사에 대한 판결이 비교적 보편적이고 고전적인 편이라면 ‘무기를 드는 것만이 국방의 의무를 이행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라는 판결은 특정 종교의 병역 거부 논란을, 초과근무·최저임금제·저작권보호·주식부당거래 등에 대한 판결은 ‘경제민주화’를 떠올리게 한다. ‘오바마케어’로 불리는 의료보험개혁법에 대한 판결도 우리 사회에서 한때 이슈가 됐던 의료 민영화와 선거철 단골 소재인 복지에 대해 돌이켜 보게 한다.

판결의 시비를 따져 보는 것보다 연방대법원이 어떤 과정을 통해 결론을 도출해 냈는지에 더 주목하는 것이 유익할 듯싶다. 추천사에 실린 글처럼 책 속 판결들이 “권위와 관행이 아닌 토론과 논증에서 나온 결과”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신나리 기자 journari@donga.com
#책의 향기#미국#연방대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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