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내 인생을 바꾼 순간]예술을 위한 예술이 무너진 자리에 사람과 역사가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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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4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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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박재동 화백의 예술관이 깨지던 그날

“영화에 나오려면 카메라 든 사람의 말을 잘 들어야지.” 배우를 꿈꾸는 박재동 화백은 사진기자의 여러가지 요구를 흔쾌히 따랐다. 그림쟁이로 산 지 50여 년, 결국 예술은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란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영화에 나오려면 카메라 든 사람의 말을 잘 들어야지.” 배우를 꿈꾸는 박재동 화백은 사진기자의 여러가지 요구를 흔쾌히 따랐다. 그림쟁이로 산 지 50여 년, 결국 예술은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란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 1979년 서울 강남구 삼성동(현 대치동) 휘문고 주변의 황량한 산동네 골짜기에는 무허가 판잣집이 다섯 채 있었다. 휘문고 미술교사 박재동(60·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애니메이션과 교수)은 주민들의 허락을 받아 그곳에 오막살이를 짓고 살았다. 학교에서도, 수채화를 가르쳤던 종로의 향린미술학원에서도 그의 거처를 알지 못했다. 어느 날 저녁, 학원에서 꽤 친했던 고3 남학생이 그의 뒤를 몰래 따라왔다. 고등학생이면서도 책을 많이 읽어 영특했던 제자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벽에 붙여 놓은 작품들을 보곤 그 학생이 말했다. “저는 선생님 같은 그림은 그리지 않을래요.” 으응? “선생님의 그림에는 사람의 삶도, 역사도 없어요.” 호오, 그래? 내색하지 않았지만 박재동의 마음에 묘한 파문이 일었다. 》
○ 외로운 철옹성에 금이 가다

할아버지는 짚신을 삼고 할머니는 물레로 실을 잣던 시대, 뒷산에서 소를 먹이고 머리 땋은 처녀가 물동이를 이고 가던 동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박재동이 서울대 회화과에 들어와 처음 그린 그림의 제목은 ‘흙의 춤’이었다. 옥수수밭에서 한 남성이 벌거벗고 역동적으로 춤을 추는, 향토적인 작품이었다. “옥수수를 보니까 흙이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아서….”

1970년대 당시 한국 미술계는 서구 모더니즘의 자장(磁場) 아래 있었다. 형식적 순수성에 집착하고 형식을 집요하게 탐구하는 작품들이 대세로 자리를 잡아 나갔다. 주위를 둘러보니 학교 친구들도 아주 실험적인 작품들을 하고 있었다. 왠지 자신의 작품이 촌스럽다고 느껴졌다. 그도 서서히 동료들과 같은 대열에 들어섰다. 작품이라며 캔버스를 태우기도 했다. 세숫대야에 흙을 담아서 콩을 심었다. 쌀을 씻는 양은그릇 바닥에 구멍을 뽕뽕 뚫고는 뒤집어서 그 위에 덮었다. 그러고는 콩이 싹을 틔워 자라도록 했다. “지금 말하면 바이오작품이지. 내 생각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앞선 작품이야. 사진을 찍어놨어야 하는데….”

졸업을 하고 부산에 잠시 있다가 다시 서울에 올라와 휘문고에 재직했다. 그때는 목성의 소행성 풍경화를 그렸다. 이 세상 풍경화는 다 그려봤기 때문에 흥미가 없어졌다는 이유에서였다. 전 우주를 느낀다면서 종이에 커다란 동그라미 하나만 그려놓기도 했다. “내가 그리는 작품은 일반 사람하고는 소통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어차피 사람들은 모른다. 알아주는 사람이 소수 있을 거라는 자부심과 오만함도 있었고.” 말하자면 예술을 위한 예술이었다. 역사와는 무관하게 예술만의 길이 있다고 생각한 거였다. 그런데 삶도 역사도 없는 그림이라니.

그는 제자의 말을 부정하려고 했다. 자꾸 부정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그의 예술지상주의적 예술관에는 실금이 가기 시작했다. ‘허, 그 말이 맞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뭐 하고 있지?’ 그런 생각이 점점 들었다. 이 땅의 아들이면서 이 땅의 사람들을 이렇게 깔봐도, 존중하지 않아도 되는 건가. 비록 서구의 사조(思潮)에 공모하는 게 나쁜 건 아니지만 당시의 엄혹한 삶을 무시해도 되는 걸까. 시간이 갈수록 제자의 말이 맞았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철옹성 같던 그의 예술세계에 금이 좍좍 나더니 한순간 폭삭 무너져 내렸다. ‘예술은 사람과 관계없이 발전할 수 있다는 가정’은 산산조각 났다.

“무너지니까 새로운 빛이 들어와요. 내 주위 사람들이 다시 보이는 거예요. 나를 키워온 이 땅의 역사가 다시 눈에 들어와요.” 달리 표현하면 그의 예술관은 목성까지 갔다가 다시 지상으로 내려온 것이다. 새 세계가 열린 뒤 그의 첫 작품은 ‘할배요 할매요 정신 나간 자손, 손 좀 잡아주소’였다.

○ 역사라는 태풍의 눈 속으로

그의 미술 수업은 특이했다. 학생들에게 영화 속 터미네이터의 얼굴을 그대로 그려보라고 하는가 하면, 교실 창문을 열고 종이비행기를 접어 운동장으로 날려 보내라고 하기도 했다. 그러다 휘문고에서 쫓겨나 용산에 있는 중경고에서 다시 자리를 잡고 있던 1980년대 중반 어느 날이었다. 그날따라 너무나도 흡족하게 수업을 마치고 교단에서 내려오는데 왠지 모르게 뿌듯했다. 교무실에 돌아와 담배를 한 대 피우며 창 너머 붉게 번지는 노을을 보고 있자니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했다. 아이들한테 준 가르침이 100배는 넘게 메아리쳐서 자신의 가슴에 되돌아오는 포만감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사람을 기르는 일보다 더 훌륭한 일은 없겠구나.’

한편으로는 불안해졌다. 그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뭐에 씐 것처럼 ‘나는 그림 그리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가졌다. 커서 뭐가 되고 싶으냐는 어른들의 물음에 동네 친구들이 당연한 듯 “대통령요” “장군요”라고 목청을 높이면, ‘화가가 최고인데 왜 저런 걸 하고 싶을까’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른 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림을 안 그려도 행복한 상태에 이른 것이다.

“그림을 안 그리면 부끄럽고 불안해야 하는데 오히려 반대가 됐으니 내가 불안해진 거예요. 그림으로 인생의 승부를 보려고 했는데 안 그려도 이렇게 좋으니까 ‘큰일 났다’ 싶었죠.” 그래서 그는 학교를 그만뒀다.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유행가 노랫말처럼 너무 행복해서 교직을 떠났다. 그림을 죽도록 실컷 그려봐야겠다는 마음이었다.

그 무렵 창간을 앞둔 한겨레신문이 시사만화가를 모집했다. 중학교 시절 ‘내 마음의 노트’라는 창작 만화 모음집을 만들기도 했던 그에게 후배 화가 박불똥이 권했다. “형 같으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안 그래도 자신이 몸담고 있던 민중미술계에서 현실적 이슈를 다루는 그림을 그리면 ‘저런 걸 만화로 하면 화끈한데 좀 어중간하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이상하게 붙을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리고 1988년 갑자기 박재동은 시사만화가가 됐다.

이후 8년여. 그는 교단을 나올 때의 바람대로 됐다. 죽어라고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됐고, 그 속에는 사람의 삶이 있었고 민주화 과정을 밟아 나가는 시대가 담겼다. 예술지상주의자에서 민중미술가로 변모한 그가 시사만화를 그릴 때의 기분은 역사라는 태풍의 눈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고 했다. “시사만화가로서 조금이나마 민주화운동에 복무한 거라고 생각하지요.”

○ 화장실을 그림으로 점령하라

서울 인사동 문화거리 입구와 부천역의 화장실에 가면 그의 그림들이 걸려 있다. 마치 ‘이발소 그림’처럼. 과거 이발소에 걸려 있던, 어떻게 보면 천편일률적인 소재를 담은 그림들처럼 말이다. 물레방아가 돌고 연못에는 오리가 헤엄치는 아주 평화로운 풍경. “어렸을 때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깎는 그 짧은 시간, 그림 속 환상에 젖어들었어요. 잠시지만 내가 느낀 그 편안함. 그게 소중하다고 봐요.”

화장실을 갤러리로 바꾸고 싶은 것도 그런 마음에서다. 소변을 보는 찰나지만 그림을 보면서 어떤 상념에 젖게 하는 것. 그가 2년 전 어느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에서 소변기 위 벽에 붙은 작은 그림을 보고 느꼈던 감상이었다. 짝퉁이다, 삼류다 경멸할 게 아니라 잠시 꽃을, 언덕을, 소녀를 보고 즐기면 어떨까 싶었다. “내 그림이 저기 걸려서 많은 사람이 보면 얼마나 영광일까 싶어 한 거였어요.”

그의 꿈은 서울시 지하철역과 관공서 화장실을 모두 갤러리로 만드는 것이다. 자신의 그림과 다른 작가의 그림, 어린이들의 그림으로 화장실을 점령하는 것이다. “이게 진정한 민중미술이라고.” 만화도 그리고, 애니메이션도 만들고, 회화에도 몰두하고, 공부도 하고, 나중에는 영화배우도 되고 싶은, 자칭 ‘여러 가지 예술가’ 박재동. 그가 더 오랫동안 자유로운 인간으로 우리 곁에 남아주길 기원한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박재동 화백#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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