前 회장들이 새 회장 뽑는 독특한 한국시인협회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3월 1일 03시 00분


국내 최대의 시인단체인 한국시인협회(회장 이건청)가 새 회장을 뽑는다. 하지만 후보자도 선거 운동도 없다. 30년간 이어져온 협회의 독특한 회장 선출 방식 때문이다.

시인협회의 회장 선출은 평의원 회의에서 후보자를 추천하고, 총회에서 인준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추천된 후보가 총회에서 거부된 적이 없기에 사실상 평의원 회의에서 새 회장이 결정된다. 이번 평의원 회의는 5일, 총회는 24일 열린다.

회장 선출의 결정권을 쥔 평의원 회의는 전직 회장들로 구성된다. 협회 정관에 따르면 회장을 거치면 별도 절차 없이 종신직 평의원이 되며 이들은 새 회장에 대한 추천권을 독점한다. 현재 평의원은 김남조 김종길 홍윤숙 김광림 성찬경 정진규 허영자 이근배 김종해 오세영 오탁번 등 11명의 원로시인이다. 이건청 현 회장은 차기 회장 선출 때부터 추천 권한을 행사한다.

전임 회장들이 모여 새 회장을 선출하는 방식은 1982년 조병화 회장 때부터 시작됐다. 이전에는 투표로 회장을 뽑았지만 선거를 둘러싸고 파벌 다툼이 생기고 잡음이 많아지자 평의원 추천으로 방식을 바꿨다.

이 회장은 “그동안 다른 문인단체들에서는 선거 잡음과 분란이 끊이질 않았지만 시인협회는 평의원 추대 방식을 통해 무난하게 새 회장을 선출해 왔다. 시인협회가 지금의 권위를 유지할 수 있는 것도 이 추대 방식을 유지한 덕이 크다”고 말했다.

하지만 회원 수가 1400명이 넘는 단체에서 10명 남짓한 원로들이 회장 추천권을 독점하는 것은 문제라는 지적도 있다. 회장 추천권을 비롯해 원로들 위주로 협회가 운영되다 보니 젊은 시인들의 참여가 점점 줄어든다는 것이다.

시인협회의 한 중견 회원은 “선생님들의 면면은 뛰어나지만 일부 문파의 원로가 자신의 후배에게 회장을 물려주는 경향도 있다”며 “권위 있는 문학단체인 만큼 회장 선출 방식을 시대에 맞게 변경하는 것을 고민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 시인 주요한이 밝힌 ‘창조’의 탄생과 폐간 그리고 문우들 ▼

한국 최초의 문예동인지인 ‘창조(創造)’는 어떻게 탄생했고 사라졌을까.

창조 창립 멤버로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시인 주요한(1900∼1979·사진)이 1969년 4월 7일부터 대한일보에 연재한 ‘나와 창조시대’를 보면 궁금증이 풀린다. 계간 문학지 ‘연인’이 봄호 특집기사로 주요한과 김동인의 신문 연재물을 발굴해 소개했다.

“진남포에서 온 유학생 김환이 문예잡지를 발간하는 안을 먼저 낸 것으로 기억된다. 1918년 여름, (김)동인이 여름방학에 고향을 다녀오면서 잡지 출판 비용을 가지고 왔다. 청산학원에 재학 중이던 전영택 오천석 두 학생이 동인으로 참가하고 김억도 들어왔다. (…)서로 사귀는 범위가 좁기 때문에 이상 전부가 평양 출신 아니면 평안도 청년들이었다.”

1919년 2월 창간된 창조는 당시 새로운 문학 사조였던 자연주의와 사실주의를 개척했으며 자유시 발전에도 기여했다. 한국 최초의 근대 자유시인 ‘불놀이’와 단편소설인 김동인의 ‘배따라기’, 전영택의 ‘천치? 천재?’ 등이 이 동인지를 통해 발표됐다.

창조가 창간 2년 3개월 만인 1921년 5월 통권 9호로 종간된 연유는 김동인이 1931년 8월 매일신보에 연재한 글에 나온다. “‘창조 동인들은 이만하였으면 이제는 기관 잡지가 없더라도 자립할 수 있다. 그러니 폐간하여도 좋다.’ 이것은 표면적 이유였다 (…)바람난 동인들은 제멋대로 놀았다. 서로 만났다 할지라도 서로 자기의 게으름을 감추고자 창조에 관한 이야기는 일절 안 하였다. 이리하여 창조는 유아무중에 폐간이 된 것이다.”

주요한이 창조 폐간 후 문우들의 근황을 소개한 부분도 흥미롭다. “김동인은 이미 재산을 거의 탕진해 아내와도 이혼하고, 새장가들어 서울로 이사 와서 계속 소설을 썼다. 그러나 원고료를 가지고 생활하기는 곤란한 처지 같았다. 작품 면에서 주옥같은 단편들이 쏟아져 나와 거의 한 세대를 긋는 위치에 있었다고 하겠다.”

전영택에 대한 평은 이렇다. “여학교 선생으로 취직했었고, 틈틈이 인도주의적인 소설을 써냈다. (…)작품의 수효는 많지 아니하나 그의 영혼의 부르짖음이었고 역시 어떤 시대를 표상하기보다 홀로 빛나는 별이었다.”

“김억은 계속 시를 썼고 동아일보 학예부 기자로 있었는데, 내가 거기 입사하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무단 퇴사해서 원산 해수욕장으로 달아나고 말았다. 기자생활이 그에게는 고통이었던 모양이다.” 6·25전쟁 때 납북된 김억에 대해 주요한은 “소식을 모르니 애통스럽다”며 “만년에라도 서정파의 대표로 지성파에 대항하는 큰 존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며 아쉬워했다.

회사 후배였던 현진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했다. “현진건이 동아일보의 명 사회부장으로 있을 때 나는 편집국장 직을 맡아 보았다. 현진건은 술을 잘 먹었고, 한번은 크게 취해서 사장실에 들어가서 주정을 한 일도 있다. 혹은 취한 체하고 했는지도 모른다. 당시 송진우 사장은 그 주정을 잘 받아 주었을 뿐 아니라 그 이면의 뜻을 알고 사원 대우를 높여주기도 했다.”

주요한은 본인에 대해서는 “나는 원래 술을 못하고 사교성이 없는 성미이기 때문에 문인들과 어울려 다니지 못했고, 따라서 30년대 작가들과의 면식은 거의 다 있었지마는 그들의 일화에 대해서는 간접으로 들었을 뿐이다”고 적었다.

연인 봄호는 시인 김기림이 1940년대 새한민보 등에 실었던 ‘민주주의에 부침’을 비롯한 시 4편, ‘슬픈 폭군’을 비롯한 산문 2편도 발굴해 소개했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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