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치미술가 이불 씨 日 도쿄 모리미술관서 대규모 초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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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2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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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찾기 20여년… 그 황홀한 도발

일본 도쿄의 모리미술관에서 4일부터 5월 27일까지 열리는 이불의 ‘나로부터, 오직 그대에게’전은 1990년대 작업부터 신작까지 대형 작품 45점을 한데 선보이는 중간 회고전 성격의 전시다. 거울의 방으로 꾸민 ‘유토피아와 환상풍경’ 섹션에선 ‘나의 거대 서사’(왼쪽) ‘브루노 타우트를 따라서’ 등의 작품을 볼 수 있다. 도쿄=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일본 도쿄의 모리미술관에서 4일부터 5월 27일까지 열리는 이불의 ‘나로부터, 오직 그대에게’전은 1990년대 작업부터 신작까지 대형 작품 45점을 한데 선보이는 중간 회고전 성격의 전시다. 거울의 방으로 꾸민 ‘유토피아와 환상풍경’ 섹션에선 ‘나의 거대 서사’(왼쪽) ‘브루노 타우트를 따라서’ 등의 작품을 볼 수 있다. 도쿄=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부드러운 조각작품 ‘몬스터’ 연작.
부드러운 조각작품 ‘몬스터’ 연작.
부모님은 연좌제의 사슬 때문에 취직을 할 수 없었다. 엄마는 생계를 위해 가내수공업을 시작했다. 어린 딸은 반짝이는 구슬로 예쁜 물건을 만드는 동네 아주머니들을 지켜보며 자랐다. 설치작가로 성장한 그는 자전적 서사에 사회적 이슈를 버무리고 이를 확장해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인간은 더 나아질 수 있는가’라는 근원적 화두에 매달려 20여 년을 달려왔다.

1990년대 이후 지금까지 치열하게 고민하고 작업해온 이불(李c·48) 씨의 얘기다. 그가 걸어온 창조의 여정을 돌아보는 대규모 초대전이 4일 일본 도쿄 롯폰기힐스 모리타워 53층의 모리미술관에서 개막했다. ‘나로부터, 오직 그대에게(From me, Belongs to you only)’란 제목의 전시는 자국 작가를 제외하곤 중국 스타작가 아이웨이웨이에 이어 아시아 작가의 개인전으로는 두 번째다.

홍익대 조소과를 졸업한 이 씨는 활동 초기 도발적 퍼포먼스로 화제를 모았다. 1997년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선 반짝이로 장식한 썩어가는 생선을 내놓아 파장을 일으켰고, 1999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특별상을 수상했으며, 2007년 프랑스 파리 카르티에 미술관에서 한국작가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수석큐레이터 가타오카 마미 씨는 그의 초기 작업부터 신작까지 대작 45점을 ‘순간적 존재’ ‘인간을 초월하여’ ‘유토피아와 환상풍경’ ‘나로부터, 오직 그대에게’와 스튜디오를 재현한 공간 등 다섯 섹션으로 배치했다.

3일 열린 개막식엔 원로작가 이우환, 엔리코 룽기 룩셈부르크현대미술관장, 에르베 샹데스 파리 카르티에현대미술재단 대표, 뉴욕의 리먼 모핀 갤러리 레이철 리먼 대표 등 국내외 인사 1000여 명이 참여했다. 전시는 5월 27일까지 이어지며 북미, 유럽에서도 열릴 예정이다.

○ 유토피아, 그리고 디스토피아

회고전 성격의 전시에는 대표작들이 망라돼 있다. PKM갤러리 박경미 대표는 해외에 전시된 뒤 외국 미술관에 소장돼 국내에서 볼 기회가 없던 작업을 감상할 수 있다며 반가워했다. 평론가 정준모 씨는 “스펙터클이 있는 전시”라며 “오늘의 이불이 있기까지를 보여주면서 내일의 이불, 세계의 이불을 상상하도록 해준다”고 말했다.

작품마다 그의 뚝심과 저력이 묻어난다. 인간의 내장이 뒤얽힌 듯한 부드러운 조각인 ‘몬스터’ 연작에서 시작된 전시는 퍼포먼스 영상, 기계와 유기적 형태가 결합된 사이보그, 욕망을 상징하는 스포츠카와 영면을 위한 관이 결합된 듯한 가라오케 캡슐, 크리스털 구슬 거울 등을 붙여 찬란히 빛나는 조각들, 백두산 천지를 형상화한 욕조 설치작품, 화려하지만 차가운 도시와 건축 형상의 조각 등으로 이어진다. 각 작품은 공간과의 기 싸움에 밀리지 않고 역동적이고 강력한 에너지를 뿜어낸다.

다양한 소재와 기법을 사용하면서도 그의 목소리는 이상과 현실의 부조화에 대한 관심을 유지한다. 세상은 늘 변해왔으나 이를 좋아졌다고만 볼 수 있느냐고 묻는 것이다. 유토피아를 향한 뜨거운 갈망과 좌절이란 거대 서사, 인간의 조건에 대한 저항과 성찰 같은 내면의 서사. 둘을 씨실과 날실로 엮은 작업은 이룰 수 없는 꿈을 향한 인간의 무모한 돌진을 일깨운다.

○ 서사적인, 그리고 시적인

그의 작품은 야누스적이다. 기괴한 듯 묘한 아름다움이 숨어 있다. 철학적 사유에 시적 감성도 풍성하다. 전시는 그 양면성의 매력을 개별 작품과 더불어 어둠과 빛의 공간을 교차해 드러낸다.

전시의 끝에 유리창 밖으로 거대 도시를 내려다보는 개의 형상이 자리한다. 작가의 30, 40대를 지켜주고 세상을 떠난 개를 소재로 한 최신작이다. 입에서 무언가를 토해내는 이미지는 그동안 쌓아온 모든 것을 훌훌 털고 새 것을 꿈꾸는 그의 마음자리를 닮았다.

실패해도, 늘 한계에 부닥치면서도 더 나은 삶이나 다른 삶을 향한 출구를 원하는 인간의 도전은 멈출 수 없다. 경계를 넘어서는 것, 표현할 수 없는 것, 이룰 수 없는 이상향을 향한 그의 두려움과 매혹은 다시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고 있다.

도쿄=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 이불 “인간의 조건, 계속 묻겠다” ▼


3년여 준비 기간을 거쳐 지난 20여 년을 돌아보는 전시를 완성한 이불 씨(사진). 개막 전날까지 긴장감이 묻어나던 얼굴은 4일 느긋하고 환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동안 여정을 뒤돌아보는 것을 두려워했지만 이렇게 모인 작업을 보니 스스로에게 그렇게 부끄럽게 살진 않았구나란 느낌이 들었다. 그때그때 지도 없이 작업했다고 생각했는데 나름대로 지도를 그려가며 작업했음도 알게 됐다. 내 지도의 테마는 인간의 조건에 대한 탐구과 질문이었다.”

그는 예술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지만 지금은 회의적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계속 노력하고 꿈꿔야 하며, 늘 같은 실패를 반복해도 그 절망과 좌절을 언급하는 자체가 적극적 저항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도발적이고 대담한 작업이 즐비한 전시에 서정적 제목을 붙인 이유가 궁금했다. “몇 년 전 블랙홀처럼 우울함의 바닥에 닿았을 때 연인이 선물과 함께 보내온 편지에서 이것은 오로지 너와 나에게 속한다는 구절을 읽었다. 그 순간 말할 수 없는 따뜻함, 사랑스러운 감정을 느꼈고 가장 힘들 때 전해온 따스함을 관객 한 명 한 명과 공유하고 싶었다.”

지난해 큰 시련을 겪은 일본 사회는 그가 던지는 질문을 지금 시점에서 매우 의미 있게 받아들인다. 그는 “내 전시를 본 뒤 인간의 오만에 대해, 이상향을 꿈꾸는 행위에 대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질문이 떠올랐다고 말하더라. 이런 시점에 예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희망적 대답을 찾지 못해도 우리는 질문을 계속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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