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헌의 가인열전]<21·끝>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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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1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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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아의 10년, 케이팝의 10년

캐리커처 최남진 기자 namjin@donga.com
캐리커처 최남진 기자 namjin@donga.com
동아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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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가수의 외국 시장 진출은 한류 이전에도 존재했다. 트로트의 전설인 이난영의 두 딸과 조카로 이루어진 김시스터스가 미국 CBS의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하고 코스터스의 곡인 ‘찰리 브라운(Charlie Brown)’을 리메이크한 노래로 빌보드 R&B 차트에 오른 것이 1962년이었다. 이미자를 비롯한 1960년대 트로트 가수들이 일본 시장을 두드리면서 70년대의 이성애, 80년대의 계은숙과 김연자로 이어졌고, 조용필은 일본 시장에서만 세 장의 골드 레코드를 기록했다.

그러나 새로운 밀레니엄의 원년인 2000년, 고작 열다섯 살에 데뷔한 한 소녀가 한국 대중음악사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바꾼다. 1990년대 후반 H.O.T와 S.E.S라는 아이돌 그룹으로 국내 시장을 평정한 SM엔터테인먼트는 그 자신감을 바탕으로 아예 첫걸음부터 한국과 일본, 나아가 미국을 겨냥한 ‘인터내셔널 뮤지션’을 기획했으며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음반시장을 보유한 일본의 메이저 기획사인 에이벡스와 손잡고 보아라는 이름의 비밀병기를 일본에 상륙시킨다. 그 순간은 TV 드라마로 일기 시작한 한류가 음악 부문에도 본격적으로 점화되기 시작한 가슴 뭉클한 장면이었으며 한국의 대중음악이 비좁은 한반도의 남녘을 벗어나 글로벌 스탠더드의 한 축으로 도약하는 기념비적인 순간이었다.

보아는 21세기 첫 10년 동안 단 한 명의 영웅이며 동시에 상징이다. 그는 R&B에 기반해 다채로운 음악 장르를 혼합하는 자유로운 어번(Urban) 스타일의 뛰어난 보컬 능력과 댄싱을 비롯한 화려한 비주얼 능력을 겸비했다. 2002년 그의 일본 시장 데뷔 앨범 ‘리슨 투 마이 하트(Listen to My Heart)’는 밀리언셀러를 기록하며 일본의 빌보드라고 할 수 있는 오리콘 차트의 앨범 넘버 원(No.1)을 기록하는 신기원을 열었고, 이듬해의 두 번째 앨범 ‘발렌티(Valenti)’는 발매 당일 100만 장을 판매하는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보아는 무려 일곱 장의 앨범을 차트의 정상에 연속적으로 올려놓았는데 이것은 일본 전체의 여가수 역사상 두 번째에 해당하는 놀라운 기록이다. 그리고 2009년 미국에 진출한 보아는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빌보드 메인 앨범 차트에 127위를 기록하는 첫발자국을 아로새긴다.

보아의 노래들은 오로지 한국인의 감성에만 의지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데뷔 앨범은 SM의 간판 작곡가 유영진을 위시해 이현정과 김형석 등 국내 작곡가가 참여했지만 일본 진출 이후의 앨범들은 한국과 일본, 유럽과 미국의 작곡가들이 망라되었다. 성숙한 여인의 향기를 물씬 뿜어내는 최근의 앨범 ‘허리케인 비너스(Hurricane Venus·2010년)’만 보더라도 전반에 배치된 댄스팝 넘버들은 외국의 작곡가들이, 그리고 발라드적 곡들은 김동률을 위시한 국내 작곡가들과 보아 본인이 작곡한 작품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보아가 김추자와 한영애, 혹은 박정현과 같은 디바들이 지닌 가창의 본능적이고 원시적인 생명력을 가졌다고 보긴 어렵다. 하지만 그(와 기획사)는 삼성이나 LG 같은 가전 회사들이 1970년대 이후 끊임없이 선진국의 기술을 수용해 집요하게 틈새시장을 파고들면서 마침내 기존의 메이저 기업들을 제치고 세계 시장 점유율의 정상을 차지한 것처럼 ‘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가능한 모든 재능의 요소들을 필사적으로 탑재하는 새로운 방법론의 길을 열었다.

그의 승리는 따라서 SM의 승리다. SM의 수장 이수만이 아무런 저작권 보호를 기대할 수 없었던 중국 시장에 H.O.T로 도전장을 던질 때만 해도 한국 대중음악의 해외 시장 진출은 그저 10대의 반짝 트렌드 상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위험이 다분했다. 그러나 중국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이 명민한 프로듀서는 처음부터 현지화 전략을 가동할 수 있는 가수를 기획했고, 보아는 그 희망에 대한 최선의 응답이었다.

보아는 한국 대중음악의 새로운 원년을 탄생시켰으며, 그를 기준으로 대중음악의 전후사가 다시 쓰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새로운 이정표이다.

보아의 10년은 케이팝(K-pop·한국대중가요) 세계화의 10년이었다. 그가 있음으로써 동방신기와 소녀시대 같은 아이돌 그룹들이 아시아 시장에 연착륙할 수 있는 성숙한 바탕이 구축된 것이다.

강헌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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