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구한말 조선을 바라본 ‘긍정의눈’]<끝>일제 속셈 간파한 서구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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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1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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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의 조선개발 목적은 아시아 침략위한 병참기지화”

러일전쟁 초반 승기를 잡은 일본군 장성들이 축배를 들고 있다. 세계는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을 경이의 눈으로 봤지만, 한국을 긍정적으로 봤던 외국인들은 그 뒤에 숨은 일본의 야욕과 야만을 봤다. 동아일보DB
러일전쟁 초반 승기를 잡은 일본군 장성들이 축배를 들고 있다. 세계는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을 경이의 눈으로 봤지만, 한국을 긍정적으로 봤던 외국인들은 그 뒤에 숨은 일본의 야욕과 야만을 봤다. 동아일보DB
1870∼1874년 일본 도쿄(東京)대 교수였던 윌리엄 그리피스는 저서 ‘은자의 나라 한국’(1882년)에서 “일본의 모든 행동은 궁극적으로 조선합병 정책으로 일관했다”고 썼다.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 침략 이후, 1870년대 일본에서는 다시 정한론(征韓論)이 대두했다. 그러나 세계 순방을 마치고 돌아온 일본사절단은 세계정세가 일본에 유리하지 않다며 이를 반대했다. 일본 내각은 이러한 이유로 정한론을 부결했는데, 이 결정에 굴복하지 않은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같은 강경론자들은 관직을 사퇴하고 사쓰마(薩摩)로 돌아가 한국을 무너뜨릴 새로운 방안을 강구했다.

러일전쟁 후 변한 세계의 일본관


1905년 을사늑약(乙巳條約) 이전, 한국에 살던 외국인들은 일본의 야욕을 감지했으나 한국의 개혁에 도움이 될 거라며 일본의 간섭을 기대하기도 했다. 친한파 호머 헐버트조차 외세의 영향력이 굴욕적이긴 해도 러시아보다는 일본이 한국의 개화를 담당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도쿄에서 2년, 한국에서 5년 넘게 외교관 생활을 했던 미국인 윌리엄 샌즈는 일본을 예리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샌즈가 본 일본인들은 친절하고 예의바르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을 기죽이는 습관이 있고 “싸움을 하면 상대편을 죽이거나 아니면 불구로 만드는” 민족이었다. “일본인보다 더 매섭고 빠르게 주먹질을 하며 분개하는 사람은 지구상에 없다. 일본인들이 난폭한 행위를 할 때는 그 배경에 국가가 있다고 봐야 한다.”

일본은 결코 한국이 스스로 발전해 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조선의 궁내부 고문관으로 일하던 샌즈는 한국이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길은 중립화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본은 샌즈가 시도하는 모든 개혁에 사사건건 반대했다. “한국인 스스로 하는 개혁은 영토 병합을 가로막는 장애물”이기 때문이었다.

샌즈가 보기에 일본이 러일전쟁(1904∼1905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철저하게 유럽 문명의 공격성을 배웠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영리하게도 유럽에 열등하지 않으려면 힘은 힘으로 대처해야 하고, 전쟁에서 이기면 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했고 서구는 이를 경이롭게 바라봤다. 1892년 일본과 한국을 모두 다녀간 영국 정치인 조지 커즌은 일본의 한국 지배는 광기 어린 난센스이며 혐오감만을 주고 있고, 생각보다 어려운 능력 밖의 일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나 러일전쟁 후 일본의 위상은 달라졌다. 팽창과 힘이 민족의 우월함을 증명하던 시대에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식민(植民)능력까지 덩달아 보증 받게 됐다.

일본의 내심을 꿰뚫은 매킨지


일본의 한국 지배는 만만치 않았다. 식민통치 초기 일본은 ‘한국인과 일본인은 다른 종족’이며 강한 종족이 약한 종족을 지배해야 한다는 병합이데올로기로 식민주의를 시도했다. 그러나 한국인을 동화시키는 게 쉽지 않다는 걸 깨닫자 ‘한국과 일본은 한 핏줄’이니 재결합해야 한다는 통합이데올로기로 옮겨갔다. 실제 한국인과 외국인들 중에는 상처 입은 한국인의 자존심을 어루만져 주는 ‘한국과 일본은 한 가족’이라는 몽롱한 이데올로기를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일본이 아무리 수법을 바꿔도 영국 기자 프레드릭 매킨지만큼은 일본의 실체를 꿰뚫어 봤다. “내가 반일(反日)적이라고 한다면 기꺼이 반일의 피고가 되고자 한다”던 매킨지는 “나만큼 일본인의 성격과 그들의 소행에 대해 통찰력 있게 기록한 사람은 없다”고 확신했다. 1905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아시아는 하나’라는 정책으로 한국의 대신들을 회유할 때, 샌즈조차도 중립화만 지켜진다면 그럴듯한 제안이라고 본 반면 매킨지는 “(이는) 일본의 독재를 의미할 뿐 들어볼 가치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매킨지가 보기에 일본은 애초 그릇된 정신상태에서 시작했고 잘못된 이상(理想)을 세웠다. “일본이 한국을 동화시키려면 한국인을 직접 죽이거나, 마약이나 악습을 퍼뜨려 적극적으로 타락시켜야 가능할 터였다.” “일본이 공공건물을 짓고 농업기술을 개선하고 통신시설을 확충하는 등 물질적인 면에서의 업적은 다소 인정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일본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한국을 다스렸다. 전국에 교통·통신망을 갖춘 것은 군대를 신속히 이동하고 아시아 대륙에서 한국을 군사적인 전략기지로 이용하기 위한 속셈이었다.”

매킨지는 “천박하고 심술궂은 소작인 태생의 일본여자가 갑자기 남편이 떼돈을 벌자, 지금은 남편의 고용인으로 전락해 가난하고 불행해진 양반집 마님(한국)을 대하듯 한다”며 일본의 한국 지배가 가당찮다는 것을 역설했다. 한국에서 사나운 일본을 경험한 매킨지는 세계를 향해 일본의 군국주의를 조심하라고 거듭 경고했다. “일본은 세계평화에 치명적 위협이 될 것이다. 일본은 필연적으로 만주를 침략하고 중국까지 확장할 것이다. 세계열강이 일본에 계속 나약하게 반응하면 적어도 30년 이내에 극동에서 커다란 전쟁을 맞이할 것이다.” 일본을 대견스럽게만 여기던 세계를 향해 ‘일본 경고’를 누차 발한 이는 매킨지 말고는 없었다. 그의 예언은 일본이 훗날 야기한 아시아와 태평양에서의 대재앙으로 적중했다.

박수영 작가·건국대 겸임교수 feenpark@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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