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내 인생을 바꾼 순간]이상봉의 ‘국제복장학원 들어서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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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7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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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과 이별한 생채기에 패션디자인의 새 살 돋다

이상봉은 가슴 속에 응축된 에너지를 끊임없이 패션 디자인에 쏟아내는 용광로 같은 디자이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이상봉은 가슴 속에 응축된 에너지를 끊임없이 패션 디자인에 쏟아내는 용광로 같은 디자이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하루에도 몇 번씩 오르내리던 바로 그 길목이었다. 서울 남산에 있는 학교에서 명동으로 뻔질나게 드나들던 그 길가였다. 신문에서 찢어낸 광고를 손에 쥐고 찾아가는 길이 너무 눈에 익다 했더니…. 3∼4년 간 그 앞을 지나치면서도 있는지조차 몰랐던 그곳, 국제복장학원의 문 앞에 이상봉은 섰다. 20대 중반을 넘어선 그때까지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던 일, 옷 만드는 일을 배우려고 온 가장의 마음은 복잡했다. ‘나는 이제 벼랑 끝에 섰다. 여기서 도망치면 더는 갈 곳이 없어.’ 문을 열고 들어섰다. 1980년 봄, 어느 아침이었다.

○ 연극에서 도망치다

그해 3월 초, 이상봉은 연극 연습에 열중이었다. 서울예전(현 서울예대) 방송연예과를 졸업한 직후 선배 연출가인 김기주 씨의 지휘 아래 동료 2명과 함께 땀을 흘렸다. 그해 동아일보를 비롯한 3개 신문사 신춘문예 희곡당선·입선작을 무대에 세우는 작업이었다. 그가 출연하는 작품은 현 서울대 미대 교수인 김병종 씨의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지붕 위에 오르기’. 교내 연극무대에 몇 번 서본 적이 있을 뿐이던 이 씨에게는 사실상 공식 데뷔 무대였다. 그러나 공연 일주일을 남겨 두고 그는 잠적했다.

“연극을 미치도록 사랑했는데… 두려웠어요. 사랑하기에 이별한다는 신파를 저는 믿어요. 연극을 사랑한 것만큼 두려웠어요. 제 능력의 한계를 느낀 거죠.”

1975년 서울예전에 입학하고 접한 연극은 그에게 새로운 삶을 보여줬다. 극도로 내성적이어서 자기 안에 꽁꽁 갇혀 지내며 극한 정신적 방황에 빠졌던 고등학교 시절의 기억을 잊어버리게 해준 선물이었다. 서로 별명을 부를 수 있는 친구 한 명 없었던 그는 연극을 접하면서 주위와 소통할 수 있게 됐다. 소리를 지르고, 몸을 움직이면서 비로소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게 됐다. 자기 자신을 혐오했던, 자기의 몸을 싫어했던 그는 무대라는 공간에서 ‘다른 사람’으로 살 수 있었다.

그는 어렸을 때 백반증(白斑症·멜라닌 색소가 소멸되면서 피부에 하얀 반점이 생기는 증상)과 비슷한 병을 앓았다. 몸 여기저기가 하얗게 변해갔다. 초등학교 시절 어머니의 손을 잡고 여러 병원을 다녔지만 “완치는 어렵다”는 말만 들었다. 소년은 여름에 반팔을 입을 수도, 대중목욕탕을 마음대로 갈 수도 없었다. 잠을 자다 온몸이 가려워 긁어대면 아침에 피투성이가 돼 있기도 했다. 손을 끈으로 묶고 잠을 청할 때도 있었다. 풍족하지 않은 집의 5녀 1남 외아들로 태어나 내향적인 성격이었던 그는 점점 더 자기 안으로 파고들었다. 고통받는 어린 짐승처럼 자기 상처를 스스로 핥기만 했다.

“고등학교 때는 칼을 지니고 다니기도 했어요. 왜 그랬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중학교 때 학교 아이들한테 몰매를 맞기도 했어요. 조그만 놈이 보호본능 때문에 그걸 품고 다녔던 것 같아요.”

병이 나을 수 없다는 절망에 ‘그럼 공부는 해서 뭘 해’ 하는 생각이 가득했다. 그 때문에 중고등학교 시절 공부라는 걸 해본 적이 없다. 조용히 집과 학교를 다람쥐 쳇바퀴 돌 듯했다. 이야기를 하는 친구는 3년 내내 한두 명이 고작이었다. 죽음도 생각했다. 시도도 여러 차례 했다. 죽음이 두렵지도 않았다. 어느 누구도 그의 아픔을 알지 못했다.

그런 그를 구원해 준 게 연극이었다. 재수를 하며 극작가를 꿈꿨던 그는 연극을 하면서 자기의 몸을 잊었다. 지워버렸다. 주위에서 “이상봉은 죽을 때까지 저(연극) 바닥에서 살 거야”라고 말할 정도로 몰입했다. 위기는 있었다. 서울예전 재학 중에 군대를 가야 했다. 입대 사흘 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제대 후 여동생들도 돌보며 가정을 이끌어야 했다. 도무지 복학할 여건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직장을 가졌지만 연극을 잊을 수는 없었다. 너무나도 하고 싶었다. 희망을 잃어버린 채 살던 그는 1978년 복학했다. 그랬던 그가 연극을 지워버린 것이다.

“내가 연극을 좋아하는 만큼 벽을 느꼈어요. 집안의 반대도 있었고요. 점점 힘들고 자신도 없고…. 이번 공연이 마지막이라고 약속했는데 막이 오르고 무대에 서면 그 약속을 지킬 자신이 없을 것 같았어요. 연극을 도저히 못 떠날 것 같았어요.” 그래서 그는 떠났다.

○ ‘이상봉은 다르다’

국제복장학원에 들어서던 그때 이상봉에게는 ‘디자이너가 돼야지’ 하는 마음은 없었다. 관심도 없었다. 따라서 디자이너를 평생 할 거라는 생각도 못했다. 돈을 벌어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책임감이 컸다. 국제복장학원을 알게 된 것도 우연이었다. 공연을 포기하고 시골에서 일주일간 잠적했다가 잠시 누님 집에서 그를 찾는 연극 동료를 피하던 때였다. 펼쳐든 신문에서 5cm²도 안 되는 크기의 광고가 눈에 띄었다. 아무 생각 없이 북 찢어서는 그 다음 날 바로 찾아가 등록을 했다. 왜 그랬는지 지금 생각해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애써 이유를 찾자면 연극을 할 때 옷 수선집을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은 했다. 수선집을 하는 친구가 “밥벌이는 된다”고 했던 기억이 있다. ‘그럼 낮에는 연극을 하고 밤에는 옷 수선을 하면 되겠네’ 하는 생각을 그때 잠깐 했다. 그게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그처럼 오전 10시부터 밤늦게까지 오전에는 디자인, 오후에는 패턴, 저녁에는 일러스트레이션을 쉬지 않고 들었던 원생은 흔하지 않았다. 하루 종일 배우고 또 배웠다. 빨리 졸업해서 옷 수선집을 차려야지 하는 마음이었다.

집에서는 그가 패션을 공부하는지 아무도 몰랐다. 어머니도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밤늦게 과제물을 들고 집에 들어섰다. 마루에서 조용히 손바느질을 하고 있는데 주무시는 줄 알았던 어머니께서 문을 열고 마루로 나오셨다. 어렸을 적 부엌에도 들이지 않았던 외아들이 실을 바늘에 꿰어 옷감을 이어나가는 모습을 보신 것이다. 두 사람의 눈이 딱 한 번 마주친 뒤 어머니는 아무 말씀도 없이 다시 방으로 들어가셨다. “생각하면 정말 찡해요. 어머니는 그때 아마 속으로 무너지셨을 겁니다.”  
▼ 바느질하는 내 모습에 어머니 가슴 무너져 내려 ▼

이 씨가 너무 겸손한 탓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학원을 다니며 패션 디자인을 공부할 때 한 번도 “너 정말 잘한다”라거나 “네가 최고”라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고 했다. “너는 꼭 디자이너의 길로 나가야 한다”는 말 역시 들어보지 못했다. 다만 “행운이 많았다”고 말한다. 학원 1년 과정을 마치자 국제패션디자인연구원이 문을 열었다. 패션 디자인으로서는 그에게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다. 교수진은 열정으로 가득했다. 연구원 동료들은 디자이너를 목표로 했다. 수선 기술자로 그치긴 아깝다는 생각을 했던 그는 연구원에서 그들과 같이 공부하면서 디자이너의 꿈과 희망을 더욱 키워 나갔다.

디자인은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동료와 경쟁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남하고 나를 비교해본 적도 없다. 그러나 자존심은 대단했다. 목숨과도 같은 연극을 뒤로하고 택한 일이었다. 뒤로 한발만 물러서도 낭떠러지로 곤두박질친다는 각오로 ‘칼’을 품었다. 디자이너로서의 꿈이 부풀던 연구원생 시절. 자신이 디자인한 옷을 만들어 모델까지 섭외해 입힌 뒤 사진을 찍어 한 교수에게 보여줬다. 쓱 보고 난 그 교수가 말했다. “너 학예회 하냐?” 충격이었다. 하지만 오기가 샘솟았다. ‘나는 연극도 포기하고 이 길을 걷고 있다. 앞으로 당신보다 더 유명해지겠다.’

그렇게 자신을 채찍질했다. 연구원을 졸업하고 중견 기성복업체의 브랜드를 책임지는 실장 직위까지 빠르게 올라갔다. 최고 권위의 중앙 디자인 콘테스트에서 입상도 했다. 그리고 1985년 당시 패션의 중심지 명동 제일백화점에 자신의 이름을 걸고 부티크(작업실)를 냈다. 그 시절 사람들은 그를 보고 말했다. “이상봉은 달라.”

○ 런웨이에서 인사하는 순간

이상봉은 끊임없이 뭔가 다르게 하고 싶었다.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고 싶었다. 그래서 영문 성씨도 다른 이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흔히 쓰는 ‘Lee’나 ‘Rhee’가 아니라 ‘Lie’라고 썼다. 누가 거짓말이라는 뜻의 ‘Lie’를 쓰겠느냐는 생각에서다. 우리나라 패션계에서 모델의 가슴을 드러낸 옷을 만들어 캣워크를 걷게 한 것도, 옷에 한글 서체를 과감히 집어넣어 해외 팬의 열광을 끌어낸 것도 그가 처음이었다.

30년간 디자이너로 일했지만 매번 쇼를 올릴 때마다 집에 들어가지 않고 몰입한다. 가족에게 미안할 때도 많았다. 하지만 항상 열심히 하자, 최선을 다하자고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이제 한국 패션계의 리더 격이지만 신인일 때와 마찬가지로 죽는 순간까지 자기 자신과의 경쟁을 마다하지 않을 작정이다. 쇼를 끝내고 텅 빈 런웨이를 바라보면 ‘그래, 오늘도 나와의 싸움을 이겨냈구나’ 하는 마음뿐이다.

그가 가장 존경하는 프랑스의 전설적인 디자이너 이브 생로랑은 생전 “오로지 행복한 순간은 쇼를 마치고 런웨이에서 인사하는 순간”이라고 했다. 이상봉도 마찬가지다. 런웨이에서는 그 순간을 언제나 만끽하고 싶다. ‘상봉, 잘 견뎌냈어.’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 이상봉 씨는…

고 앙드레김, 진태옥, 이신우, 이영희 등의 뒤를 잇는 우리나라 2세대 디자이너다. 2006년 MBC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에서 출연진을 조련해 패션쇼에 세우는 역할을 훌륭히 맡아 대중적인 인기까지 모은 흔치 않은 패션 전문가다. 디자이너가 된 지 올해로 만 30년이 되는 그는 한글을 패션에 접목하는 파격을 선보여 국내외에서 호평을 받았다. 미국의 인기 팝가수 리아나와 켈리 롤런드, 프랑스 배우 쥘리에트 비노슈 등이 그의 옷을 입었고 피겨스케이팅 김연아 선수도 그가 디자인한 드레스를 입고 공연을 했다. 37세 이후 자신은 언제나 37세라고 이야기하며 정확한 나이는 공개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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