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선 2008년 여성 아이돌 그룹 ‘모닝구무스메’의 후지모토 미키가 타이틀 롤을 맡아 화제가 됐던 연극 ‘하카나’. 망나니 노름꾼 스즈지로(김장동)와 도깨비의 장난 탓에 ‘괴물’ 태어난 천하절색 하카나(박선애)의 애절한 사랑에 다양한 신화적 코드를 녹여 넣었다. 사진 제공 극단 시월
극단 시월의 창단공연으로 국내 초연 중인 연극 ‘하카나’(요코우치 겐스케 작·김문광 각색·김영록 연출)는 일본 고대 도깨비 설화에 살을 붙인 작품이다. 10세기경 채록된 이 설화는 도깨비와 도박에서 이겨 정체불명의 미녀를 얻게 된 노름꾼의 허망한 이야기다. ‘천녀유혼’ 유의 지극히 동양적인 이 기담(奇談)에 판도라와 피그말리온, 파우스트와 프랑켄슈타인 같은 서양신화의 효모가 가미되면서 진한 감동이 발효된다. 어쩌면 거기에 극예술의 진짜 묘미가 숨어 있는지 모른다.
천하 망나니로 노름의 귀재인 스즈지로(김장동)는 노름판에서 만난 도깨비 적귀(진영선)와 도박에서 이긴 대가로 천하절색 미녀(박선애)를 손에 넣는다. 하지만 하카나라는 이름의 미녀는 제대로 된 사람이 아니다. 공동묘지의 시체의 여기저기를 뜯어 맞춘 뒤 갓난아기의 영혼을 불어넣은 ‘괴물’이다. 이 괴물이 온전한 여자가 되는 데는 100일의 시한이 따른다. 암만 몸이 달아도 그 전에 그를 품으면 물거품이 되어 사라진다.
과연 하카나는 선물일까 함정일까. 그리스신화에서 신이 인간에게 선물한 판도라를 떠올리게 한다. 메리 셀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이 보여주는 섬뜩함도 지녔다.
연극은 이 지점에서 돌연 그리스 신화를 원용한 버나드 쇼 원작의 ‘피그말리온’(뮤지컬 ‘마이 페어 레이디’의 원작)을 끌고 온다. 불학무식한 스즈지로와 지내며 욕설을 입에 달고 살던 하카나는 “(교육을 통해) 진짜 사람으로 만들어주겠다”는 승려 묘해(김현기)를 만난다. 도박의 여신의 총애를 받아 백전백승을 자랑하던 스즈지로는 하카나를 교육시킬 것인지 말 것인지를 놓고 묘해와 도박을 벌여 처음으로 패한다. 스즈지로에게 평생 처음의 사랑이 찾아오자 그의 운은 바닥을 드러낸 것이다.
도박판에서 연전연패하던 스즈지로가 전 재산을 탕진하는 동안 엄청난 지식 습득 속도를 자랑하는 하카나는 요조숙녀가 되어 나타난다. 태어나 49일 만에 인간의 도리를 깨친 하카나는 생명의 은인 스즈지로에게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서약한다.
하지만 스즈지로의 어리석은 욕망은 멈출 줄 모른다. 하카나와 새 삶을 시작할 종잣돈을 마련하겠다며 살인을 저지르고 결국엔 하카나를 사창가에 넘기게 된다. 남자와 몸을 섞으면 물거품이 될 하카나의 운명은 풍전등화의 신세다. 연극은 여기서 악마에게 영혼을 판 파우스트의 전설을 끌고 온다. 하카나를 구하기 위해 적귀를 찾아간 스즈지로는 자신의 영혼을 걸고 최후의 도박을 펼친다.
다소 과도한 성적 묘사에도 불구하고 연극이 끝날 무렵 많은 여성 관객은 눈물을 훔친다. 지상 최악의 밑바닥 인생이 지고지순한 사랑에 눈떠가는 과정에 감동해서일 것이다. 수많은 신화적 코드를 눈치 챈 관객은 처음엔 도박에, 다음엔 사랑에 모든 것을 걸 수밖에 없는 인생의 아이러니에 한숨을 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연극의 진짜 묘미는 그런 멜로드라마의 감동이나 신화적 교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유미리 씨가 수상한 일본 최고 권위의 기시다 희곡상을 한 해 앞서 수상한 극작가 요코우치 씨(50)는 수많은 신화를 변주하면서도 그것을 신의 관점이 아닌 인간의 관점으로 뒤집는다.
하카나는 분명 도깨비가 파놓은 함정이다. 그 하카나에 대한 애욕 때문에 스즈지로는 모든 것을 잃는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도깨비의 시각이다. 스즈지로에게 하카나는 최고의 선물이다. 자기 자신밖에 몰랐던 스즈지로가 ‘내 게 아닌 것’으로서 타자(他者)를 받아들이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깨치게 해준 존재이기 때문이다. 도박을 향한 스즈지로의 무모함과 하카나를 향한 스즈지로의 무모함이 차별화되는 점도 여기서 빚어진다.
타자란 괴물로 대하면 괴물로 복수하고, 사랑으로 대하면 사랑으로 보답하는 존재다. 인간이 되는 길은 바로 그런 물아일체의 경지를 터득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판도라와 피그말리온, 파우스트와 프랑켄슈타인 설화의 무의식구조를 이루는 핵심이 아닐까.
권재현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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