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손택균의 카덴차>무례함에 대하여: ‘레터스 투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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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0월 12일 11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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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만다 사이프리드를 처음 본 것은 몇 년 전 케이블TV 영화채널에서 방영한 '퀸카로 살아남는 법'²에서였다. 열아홉 살 때 출연한 데뷔작. '퀸카' 역은 당연히 아니었다. 미국의 한 고등학교 퀸카 보위를 둘러싼 권력이동에 따라 레이첼 맥애덤스³의 등 뒤에서 린제이 로한의 등 뒤로 잽싸게 이동하는 병풍 역할이 그의 몫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내리 6년 동안 여자라는 생명체와 말 한 마디 섞어보지 못한 암흑의 성장기를 보낸 탓에 10대 후반 여자아이들의 학교 내 권력암투 실상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하지만 대학시절 자의 85% 타의 15% 정도의 인증으로 퀸카인 양 행세하고 다니셨던 주위 분들에 대한 기억을 돌이켜보면, 그 배후에는 언제나 '퀸카로…'에서의 사이프리드를 닮은 '병풍 피플'이 있었다.

병풍 피플의 뚜렷한 특징은, 죄송합니다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생김새가 뚜렷하게 기억나지 않는다는 거다. '퀸카로…'에서의 사이프리드도 그랬다. 분명 맥애덤스와 로한의 등 뒤에 계속 붙어 있긴 했던 것 같은데 딱히 그가 어떤 형상을 하고 있었는지는 복기하기 어렵다. 후반부에 주요 등장인물들이 졸업파티인지 학예회인지 촌스러운 무대에 올라 '아아 우리들 정말 너무너무 이쁘지 않나요'라는 표정으로 춤추며 노래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거기서 사이프리드가 잠깐 살짝 눈에 띄긴 했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유달리 통통했기 때문이다. 귀엽지만 바보스러운 연분홍색 아기돼지. 그 영화에서 사이프리드의 배역 비중과 이미지는 '토이 스토리'의 돼지저금통 '햄'에 가까웠다.

결코 이름을 알게 될 리 없는, 그저 그런 비슷비슷한 청춘물에 몇 번 더 병풍으로 대충 끼워 넣어지다가 흐지부지 사라질 배우일 줄 알았건만. 어이구 웬걸. 2년 전 광화문 씨네큐브에 홀로 앉아 '맘마 미아!'를 보다가 도입부 장면부터 눈과 귀를 의심했다.

"허니 허니~ 까르르. 웬 유 두 유어 씽! 까르르…."
"아이 해브 어 드리리리리임…. 이프 유 씨 더 원더러러러러…."

아아아 이토록 청아한 바이브레이션이란. '은쟁반에 옥구슬이 또르르 굴러가는 소리'라는 낯 뜨거운 관습적 표현의 명확한 대상이 실재할 줄이야. 갓 스물 무렵 인간이 경험하는 4년이라는 시간은 정말 얼마나 원더러러러러스한 것인가. '퀸카로…'의 사이프리드와 '맘마 미아!'의 사이프리드는 대학교 학생증 사진과 졸업앨범 사진 사이만큼의 간극을 보여준다. 지중해의 따신 햇볕에 사알짝 그을려 촉촉한 윤기가 더욱 도드라져 보이는 탱탱한 피부 위로 발그레 떠오른 동그란 두 볼. 그것은 긴 잠에서 막 부스스 깨어난 듯 수줍게 벌어진, 아침 이슬방울 총총 얹어진 장미꽃잎에 다름없었다.

아아아 이 아가씨. 그때는 그저 젖살 미처 덜 빠진 미운오리새끼일 뿐이었구나. 아아아 죄송해요. 점잖은 관객들은 어찌된 영문인지 입을 모아 한결같이 "노익장 메릴 스트립의 여전한 활력"을 칭찬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영화 막판 한때 레밍턴 스틸이셨던 은퇴한 007 아저씨를 앞에 세워놓고 스트립이 'Winner Takes It All'을 열창하는 장면을 보며 상당량의 인내심 에너지를 소비해야 했다. '맘마 미아!'는 스트립의 안쓰러운 오버액션을 사이프리드의 갓 피어난 꽃다움으로 애써 감싸 보정해 겨우겨우 그럴듯하게 차려 낸 영화였다, 고 생각한다.

6일 개봉한 '레터스 투 줄리엣'을 굳이 꾸역꾸역 일반시사⁴ 참석을 요청해 관람한 것은 당연히 사이프리드의 꽃다운 얼굴을 만끽하고 싶어서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한 장면도 빠짐없이 그녀의 발그레한 두 볼, 창백하게 맑고 푸른 두 눈이 계속 등장한다는데. 게다가 본격적인 사랑 이야기라는데. 내용이 어지간히 지루하지 않는 한 대강 참아낼 수 있으리라. 눈과 귀가 대체로 즐거우리라. 그런 계산이었다.

줄거리는 식상하지 않다. 이탈리아 베로나로 요리사 연인과 함께 혼전신혼여행을 온 작가지망생 소피(사이프리드). '로미오와 줄리엣'의 배경 도시답게 그곳에는 '오밤중 줄리엣 집을 찾아간 로미오가 애타는 마음을 고백했던 발코니'의 모델이 됐다고 홍보되는 장소가 있다. 14세기 지어진 한 저택 발코니가 어찌어찌 '줄리엣의 집'으로 이름 붙여져 관광명소로 활용되고 있는 거다. 실제로 2009년부터 베로나 시는 1000유로를 받고 이곳을 결혼식 장소로 빌려주고 있다. 혹시 베로나 시가 이 영화의 제작투자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을까. 별로 확인해보고 싶지 않다. 한국 모처에 홍길동 생가가 마련된 것과 비슷한 사연 아니겠는가. 좌우당간 영화의 주요 배경은 바로 이곳, '줄리엣의 발코니라 여겨지는 베로나 시내의 한 발코니'다.


영화 속에서는 연인과 가슴 아픈 이별을 한 (것으로 보이는) 수많은 여성들이 여행 중 이곳에 들러 자신의 가슴 저린 사연을 편지에 고이 적어 발코니 아래 벽에 붙이거나 벽돌 틈새에 쑤셔 넣고 간다. 이 역시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 별로 들지 않는다. 그런 사람이 영화에서처럼 허다하겠는가. 영화 '레터스…'를 보고 난 뒤 우연히 베로나에 가게 된 사람이라면 애매한 짬이 났을 때 슬쩍 한번 찾아가보게 될지 모르겠다. 문득 떠오르는 것은 '화양연화' 라스트 신에서 앙코르와트 사원 돌 벽 틈새에 얼굴을 파묻고 뭔가를 고즈넉이 속삭이는 양조위의 뒷모습. 하지만 '레터스…'는 그에 감히 견줄 수 없는, 베로나 시 주변 이탈리아 교외 관광지 홍보 영화에 가깝다.

소피는 줄리엣의 발코니 아래 벽 앞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편지를 죄다 수거해 어디론가 가져가는 한 여인을 따라간다. 그가 당도한 어느 집에는 식탁에 둘러앉아 슬픔에 빠진 여자들의 사연에 일일이 답장을 써 주는, 비현실적으로 팔자 좋아 뵈는 천사 표 여성들이 앉아 있다. 작가로 데뷔하기 위해 이야깃거리를 찾아 헤매던 소피는 그들의 소명의식 넘치는 대필 작업에 흥미를 느끼고 동반 체험취재에 들어간다.


그 과정에서 소피가 만난 인물이 문제의 클레어(바네사 레드그레이브)라는 할머니다. 소피는 클레어가 무려 50년 전 이 벽에 끼워놓은 편지를 우연히5 발굴해 정성껏 답장을 써 보낸다. 반세기가 흐르는 동안 이사 한 번 안 갔던 클레어는 그 답장을 아무런 배달사고 없이 받고 손자를 대동해 베로나로 날아온다. 20대 무렵 여행 중 만나 격정에 달떴지만 막상 용기가 나질 않아 눈물로 차버렸던 이탈리안 가이를 다시 만나기 위해.

안정된 삶을 위해 선택해 평생 해로한 무뚝뚝한 남편과는 얼마 전 사별했다. 마침 몹시 적적했던 차에 청춘 시절 써 보냈던 편지의 답장을 받았으니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 이탈리아를 장화 털듯 뒤져서라도 옛사랑을 찾아내겠다는 늘그막 정열을 불태우는 클레어. 소피는 그 여정에 동행해 자신의 처녀작을 써내려간다. 결론은 뭐, 당연히 에브리바디 해피, 러브 이스 올 어라운드다.

출구 바로 옆 자리였으니 언제든 시사회장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영화가 시작하고 30분쯤 지나자 슬슬 짜증이 났던 것. 사이프리드는 여전히 꽃처럼 예뻤지만, 그래서 더 불편했다.

로맨틱 코미디에 웬 까칠 반응이냐고 하겠지만, 아무래도 저건 좀 아니다 싶은 것은 영화 속 캐릭터들이 한결같이 보여주는 과거지사에 대한 '얼렁뚱땅'이었다. 클레어의 손자 찰리(크리스토퍼 이건)만이 잠시나마 유일하게 공감이 간 캐릭터다. 영국인 찰리는 노구의 할머니가 먼 길을 무리하게 다니는 것보다 할아버지를 깡그리 잊고 옛사랑 찾기에 몰두하는 모습을 못마땅해 한다. 어서 포기시키고 돌아가려 했는데 웬 미국 여자가 좋은 글감 찾았다며 주변을 얼쩡거리면서 할머니를 부추기는 것. 당연히 열 받는다.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 대신 키워준 할아버지. 무뚝뚝했지만 멋지고 속 깊은 분이었는데. 무덤 덮은 흙이 마른 지 이제 얼마나 됐다고, 할머니는 어째서 두 발 벗고 청춘의 추억을 찾아 타국 유람을 왔단 말인지. 그래도 화는 못 내고 걱정이 돼서 휴가 내고 따라왔는데 이 뻔뻔한 여자는 대체 뭐람. 이 애 때문에 베로나 주변에 사는 노인들 전부 수소문하게 생겼네. 투덜투덜.

할머니도, 소피도, 아마 여성 관객들도. 입을 모아 손자 찰리의 무례함을 비판한다. 중반을 넘어선 시점부터 찰리가 무례했음을 자아비판하며 소피를 상냥히 대하기 시작하자 모든 상황이 한꺼번에 좋아지고 이야기도 술술 잘 풀리는 것처럼 보인다.

'무례함'이라는 것은, 뭘까.

맺어짐은 끊어짐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맺었다 끊어진 자리는 그러기 전과 절대 같을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내가 시종 의아했던 것은 끊어낸 사람들이 일관되게 보여주는 후련함 또는 행복함에 겨운 표정이었다.


소피와 찰리를 동행한 옛사랑 되찾기 교외 여행 도중, 클레어는 소피에게 죽은 남편에 대해서 "좋은 사람이었어" 정도로 아주 짤막하게 언급한다. 클레어의 설명에 따르면 젊은 시절 불타오르듯 빠져들었던 이탈리아 매력남 로렌조야말로 운명의 연인이었으며, 자신의 소심함 때문에 놓쳐버리고 평생을 후회한, 인생에 단 하나 뿐인 완벽한 이상형이었다. 영화 말미 클레어는 사랑스런 소피를 놓쳐버릴 형편에 처한 손자에게 간곡히 조언한다.

"나처럼 50년을 기다리진 말거라."

영화는 소피의 예비남편 빅터(가엘 가르시아 베르날6)를 이기적인 워커홀릭으로 묘사해 혹시 있을지도 모를 관객의 동정심 발생 가능성을 봉쇄한다. 빅터는 찰리에 비해 키가 작고 생김새도 두드러지지 않은 주제에 어여쁜 예비신부를 혼자 방치한다. 게다가 어렵게 떠나온 혼전신혼여행을 식당개업 준비여행으로 써먹었으니, 모질게 차여도 싸다. 그런 식이다.

무뚝뚝한 남편을 50년간 묵묵히 참아내고 살아온 클레어와 볼품없는 워커홀릭 피앙세를 어렵사리 떼어낸 소피는, 마침내 '진정한 운명적 사랑'을 찾아 해피 에버 애프터 하였다는 것. 그게 이 영화의 내용이다.

그런데 그 기준. 도대체 뭘까. 이 영화 속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운명적인,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필생의 인연이란 것은, 어떻게 하면 헛발질 안 하고 알아챌 수 있을까. 클레어 할머니는 어떤 신통한 능력을 가졌기에 50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운명의 그 남자를 잠깐만 보고 단박에 알아챌 수 있다는 걸까.

클레어가 반세기 동안 잊지 못한 이탈리안 가이 로렌조가 마침내 등장하는 결말 장면은 이 영화가 제시하는 '운명의 그이 판단 기준'을 명쾌하게 보여준다. "내가 당신의 로렌조요!"라고 애정공세를 퍼붓는 괴짜 뱃사공, 배불뚝이 시골영감, 식당 주인, 심지어 성직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잠깐의 머뭇거림도 없이 고개를 가로젓던 클레어. 우연히 들른 어느 포도농장 주인을 먼발치서 한눈에 보고도, '아아 로렌조' 하는 표정으로 가슴 벅찬 미소를 짓는다.

로렌조 할아버지는, 백마를 타고 등장한다. 관운장처럼 날렵하게. 아직 물러지지 않은, 터질 듯 팽팽한 가슴근육을 셔츠 밑에 가까스로 감춘 채.

'잘못된 판단'이었던 피앙세 빅터를 차버리고 소피가 선택한 찰리는 어떤가.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훤칠하고 장대한 미남. 그러면서도 느끼하거나 소심한 느낌은 전혀 없는, 차가운 듯한 언행 뒤에 은근한 배려와 반듯한 매너까지 감추고 있는, 근래 보기 드문 건실한 청년이다.

클레어에게서도, 소피에게서도, 죽은 남편과 옛 애인 역시 한때 자신이 사랑해서 배필로 선택해 오랜 세월을 공유한 사람이었다는 애잔함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1시간 45분짜리 로맨스 영화에 그런 걸 어떻게 집어넣느냐 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엇비슷한 발랄 모드 분위기의 로맨스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가 '레터스…'보다 한 수 위로 보이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먹고…'의 주인공 리즈(줄리아 로버츠) 역시 진정한 행복과 자아를 찾아 떠나는 과정에서 한 남자를 자신의 삶에서 처절히 잘라낸다. 하지만 영화 '먹고…'는 원작으로 삼은 주인공의 자전 에세이와 달리 느닷없이 버림받은 남편 스티븐(빌리 크루덥)을 중간 중간 짤막하지만 중요한 이야깃거리로 등장시킨다. 누구나 자신의 판단을 믿고 관계를 정리하지만 동반자에 대한 회자정리는 결코 머리로 판단하는 것만큼 깔끔하게 이뤄지지 않는다는 사실. '먹고…'는 이것을 보여주면서 보다 많은 관객의 공감을 얻는다.

과거는 분식회계 되는 법이다.

수십 년 전 떠나보낸 그 남자 또는 그 여자. 정말 지금 옆에 있는 사람보다 모든 면에서 탁월했던, 어리석음 탓에 아깝게 놓쳐버린 '진짜 운명의 그 사람'이었을까.
소피 스스로 영화 속에서 이에 대한 답을 하고 있다. "'what if'라는 가정은 나머지 인생을 뒤흔들 만큼의 위협을 안길 수 있다"고. 'what if'를 개입할수록 삶은 추레해진다. 유복한 남편과 적절한 시기에 사별한 귀부인이 아닌 바에야.

사랑? 오오 제발.

영화 '레터스…'가 주구장창 이야기하는 것은 그저 '욕망'일 뿐이다. "마음 가는 대로 하라"는 소피의 대사를 "욕망에 충실하라" 정도로 바꾼다면 이 영화 속의 모든 어처구니없는 상황은 한층 개연성을 얻을 것이다. 로렌조가 클레어의 옛 남편에 비해, 찰리가 빅터에 비해 더 매력적인 남성인 것만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사랑과 욕망을 구분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버림받은 사람들에 대한 '무례'다.


1. cadenza. 클래식 음악에서, 연주자의 재량에 따라 마음대로 연주하도록 작곡가가 비워 놓은 부분.

2. 원제는 'Mean Girls' 즉, 야비한 가시나들. 극장에 앉아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해서 관람하기는 민망한, 공연히 일찍 일어나버린 휴일 오전에 심드렁하게 TV 채널을 돌리다가 중간부터 틀어놓고 슬렁슬렁 딴 짓 하며 보기에 적합한 영화다. 퀸카와 그 추종세력의 '잔인무도한 알력다툼→극적인 화해→한 뼘 성장했다는 깨달음을 자부하는 흐뭇한 미소→풋사랑과의 귀여운 키스'로 이어지는 뻔하고 뻔한 스토리를 달착지근하게 버무린, 분명 처음 보는데 언젠가 본 듯한, 다시 말해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인 내용.

3. 골빈당 바비인형으로만 보였던 이분의 필모그래피도 사이프리드 못잖은 서프라이즈다. 2009년의 저평가 문제작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의 키 플레이어는 러셀 크로나 벤 애플랙이 아닌 이 여자였다.

4. 언론시사가 아닌 일반시사는 관객 반응을 생짜로 가늠하기에 유리하다는 장점이 있다. (도대체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지만) 대개 오후 2시에 열리는 언론시사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참석 못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신문기자가 한창 마감에 불붙어 있어야 하는 오후 시간에 용감하게 편집국을 빠져나가 시사회장에 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대체로 저녁 8시 이후 열리는 일반시사를 자주 이용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간에, 게다가 금요일에, 더구나 신촌에서, 하물며 여성취향 로맨틱코미디 영화를 '혼자' 보러 들어가 앉아 있는 것은 '참말 내가 전생에 죄를 참 많이 지었나보다' 싶은 상황이다. 그 난감함은 언젠가 겨울휴가 때 혼자 푸켓 행 비행기에 앉아있던 시간과 거의 등가라 할 수 있다.

5. 판타스틱 슈퍼 잉크로 쓰였는지 반세기가 흐르는 동안 숱한 비바람에도 전혀 번지거나 흐려지지 않은 채 벽돌담 틈새에 고이 보존돼 온 편지. 오랜 세월 동안 그 누구의 눈에도 띄지 못했지만 주인공 소피의 눈길 한차례 손길 한번에 마법처럼 재까닥 그 봉인을 연다. '트랜스포머2'의 '사막 한가운데서 순식간에 매트릭스 발견' 장면에 비할 만한 황당무계.

6. 훌륭한 미국 밖 배우들이 할리우드 영화에서 망가지는 꼴을 보면 안쓰럽다 못해 가끔 분노까지 치민다. 주윤발과 이연걸이 대표적 사례. 예상을 확 깨는 유쾌한 플롯의 영화를 좋아하고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을 잘 모르는 관객이라면, DVD로 출시돼 있는 2005년작 '수면의 과학'을 추천한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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