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8 서울수복 60주년]각계 인사들이 전하는 人共통치 3개월

동아일보 입력 2010-09-27 03:00수정 2010-09-27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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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집마다 쌀 몰수… 집회열어 징집… “92일은 지옥이었다”
6·25전쟁 인민공화국 치하 3개월 동안 서울에서는 거의 매일 김일성과 스탈린을 우상화하는 집회가 열렸다. 김성칠 교수는 “김일성 장군과 스딸린 원수의 초상화를 크게 만들어가지고 떠메고 다니는 모양은 그리 좋은 풍경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기록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28일은 국군과 유엔군이 6·25전쟁 발발 사흘 만에 함락된 수도 서울을 북한군으로부터 수복한 지 60년이 되는 날이다. 1950년 6월 28일부터 9월 28일까지 약 3개월간 서울시민 140여만 명은 인민공화국(인공)의 통치 아래 있었다. 인공 치하의 서울 생활은 어땠을까. 김성칠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1951년 작고·당시 37세), 이현희 성신여대 명예교수(당시 13세), 극작가 이원경 씨(당시 34세)가 당시 쓴 일기와 회고, 그리고 소설가 김원일 씨(당시 8세)의 증언을 통해 인공 치하 서울의 모습을 분야별로 재구성했다.》

○ 6월 28일, 느닷없이 맞은 인공

“오전 3시경 식구들과 건넌방에서 자고 있는데 갑자기 파란불이 번쩍하면서 ‘쿵, 쾅’ 하는 요란한 폭음에 소스라쳐 깼다. 둥실 떴다가 가라앉은 듯한 기분이었다.”

이현희 교수가 회고하는 1950년 6월 28일의 기억이다. 이 교수에 따르면 폭음은 한강인도교를 폭파하는 소리로 이때까지 남하하지 못한 서울 시민은 모두 고립됐다. 이날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했고 시민들은 마음의 준비도 없이 인공 치하에 놓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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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사이 세상은 아주 뒤집히고야 말았다”는 김성칠 교수의 기록처럼 서울은 이날부터 순식간에 인공 체제로 바뀌었다.

“거리에는 이미 붉은 기를 흔들며 만세를 부르는 사람이 있고 학교 깃대엔 말로만 듣던 인공기가 나부끼고 있다.”(김성칠) “한성중학교 학생 30여 명이 트럭을 탄 채 웃음을 띠고 시가지를 왕래하며 ‘김일성 장군 만세’ ‘조선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쳤다.”(이현희)

아버지가 남로당 간부였던 김원일 씨는 “우리 가족도 28일 충무로에 인공기가 나부끼는 것을 보고야 서울이 점령된 것을 알았다”며 북한의 서울 점령이 순식간에 벌어졌다고 회고했다.

신분 역전 현상도 곳곳에서 벌어졌다. “보통(초등)학교도 마치지 못해 소송기록을 순한글로 쓴대도 이해할 수 없을 판무식꾼이던 구멍가게 이윤기 씨가 인민위원회 간부이자 재판관으로 선출되고… 이력서의 출신에는 빈농과 노동자로 쓰는 게 제일 좋다고 한다. 갑자기 빈농의 아들이 되고 노동자의 아우가 된 교수들이 없지 않을 것이다.”(김성칠)

○ 경제: 인플레와 식량난에 민심이반

“대한민국 시절에 쌀값이 2000원을 넘었다 해서 백성들이 아우성을 친 일이 어제런(인) 듯한데 인민군이 들어온 후로 5000원 고개를 거짓말처럼 넘기고 이제는 1만 원을 바라보게 되었다.”(김성칠·7월 11일)

‘인민을 위한 정치’를 선전하던 인공은 점령 직후부터 급격한 인플레이션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데다 식량난까지 겹쳐 민심이 크게 술렁거렸다. “이천 여주 용인 양주 일대에는 서울서 온 식량 구하는 이들로 붐비고 있다. 부자도 관리도 변호사도 의사도 다 팽개치고 쌀 구하러 시골 구석구석을 뒤지며 다닌다.”(이현희·8월 23일)

김원일 씨는 “그나마 당원 가족이라 굶지는 않았으나 대개의 서울 시민들은 굉장히 힘들었다. 나중에는 명아주나 이런 못 먹는 풀까지 삶아 먹었다. 빨리 수복이 안 됐으면 모두 굶어 죽었을 것이다”라고 회상했다.

식량난에는 인민군의 점령 초기 수탈이 한몫했다. 점령 직후부터 식량 조사를 명목으로 모두 압수했다. 이후 배급을 주겠다고 했으나 배급은 나오지 않았다.

“내무서원들이 닥치더니 ‘김일성 장군님이 곧 수백 섬의 쌀을 보내오기로 약속이 되어 있소’ 옥신각신하다가 강탈당한 것이다. 어머니는 대성통곡이다. 일제 때도 비록 놋그릇 수저 양푼 젓가락은 다 빼앗아가도 쌀을 몽땅 털어가기는 처음이다 하신다.… 배급 준다던 쌀은 누가 다 타 먹었는지 아예 없는지 쌀은 구경조차 못하고 있다.”(이현희·7월 11일, 8월 11일)

○ 정치: 인민재판과 김일성 스탈린 숭배

“(인민위원회의 지시로) 형 누님과 같이 ‘위대한 인민의 지도자 김일성 장군 만세!’ ‘영명한 인민의 수령 김일성 장군 서울 입성 환영!’ 이런 것을 써서 붙였다. 살려면 어쩔 수 없나 보다.”(이현희·7월 3일)

곳곳에서 ‘반동’으로 몰아 즉석 처형하는 인민재판이 열렸다. 김원일 씨는 “민심이 너무 나빠져 인민재판이 점령 3일 만에 중단됐다”고 말했으나, 이현희 교수와 이원경 씨는 “7, 8월에도 계속됐다”고 회고했다. 인민재판은 잔인성 못지않게 일관성 없는 기준으로 반발을 샀다. “대한민국 시절에 상당히 날치던 사람들도 아직 아무 일 없이 지나고 있는데, 그런가 하면 참으로 애매하다 싶은 사람들이 많이 경을 치고 허망하게 총살을 당하고 만다. 이것이 바로 인민공화국의 장기인지도 모른다.”(김성칠·8월 16일)

남로당 출신 외에는 정치적 활동이 탄압됐다. 남한에서 좌익계열이던 여운형의 근로인민당이나 김구를 계승한 한국독립당도 예외는 아니었다. 김성칠 교수의 일기에는 ‘노동당에서는 공공연히 근로인민당이 자기비판을 하고 또 전향을 해야 한다고 떠드니 글쎄 천하에 이럴 법이 있느냐’는 근로인민당 관계자의 하소연이 기록돼 있다.

○ 사회: 수시로 열린 집회와 의용군 징집

“이즘은 무슨 모임이 있으면 부인네가 나서는 것이 버릇처럼 되었다. 다른 목적으로 모였던 회합이 곧잘 궐기대회로 변하여 그 자리에서 의용군을 뽑아 보내게 되므로 집회에는 노인이 아니면 여자로 판을 친다.”(김성칠·7월 15일)

가장 큰 사회적 문제로 대두된 것은 의용군 징집이었다. 대부분 사전통고 없이 끌려갔다. 이원경 씨는 “한밤중에 집을 뒤지고 길가는 사람들을 잡아가 길에 남자라고는 노인만이 뜨문뜨문 걸어다니는 것이 보일 뿐이었다”며 “나도 연극인 모임에 갔다가 그 자리에서 징집돼 전선으로 끌려가다 미아리에서 간신히 탈출했다”고 회고했다. 이현희 교수의 ‘20세 작은형’은 징집을 피하기 위해 2층 천장 속에 숨어 살며 아예 바깥출입을 하지 않고 밖의 동정만 살피고 내무서원이 나오면 새 우는 소리로 신호를 하도록 하며 3개월을 버텼다.

시민들은 ‘반동’으로 몰리지 않기 위해 일부러 허름하게 입고 다녔다. “어이 된 셈인지 모두들 허름한 노동복 쓰봉(바지)에 윗도리는 샤쓰(셔츠) 바람이고 머리는 한결같이 탈모가 아니면 보릿짚 모자이다.”(김성칠·6월 30일) 이원경 씨도 “밀짚벙거지 200원. 이것은 너나 할 것 없이 쓰고 다닌다. 모자 안 쓴 사람은 출옥동지, 인민위원회, 인민군이다”라고 기록했다.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

▼ 60년전 ‘트위터’ 단파라디오 ▼
전쟁 메신저 역할… 인천상륙작전도 미리 알아


6·25전쟁 당시 인민공화국 치하 서울의 3개월을 기록한 예술원 회원 이원경 씨의 일기.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인민공화국(인공)은 서울 점령 후 남한 신문을 모두 폐간시키고 해방일보 등 3개 신문만 발행했다. 내용은 김일성에 대한 찬사나 인민군의 승전보가 대부분이었다. 대구와 부산이 ‘해방’되고 이승만 대통령이 생포됐다는 조직적인 삐라도 나돌았다. 그럼에도 인공 치하 3개월간 서울 시민들의 협력은 매우 소극적이었다. 집회에는 어린이와 노인, 여성들만 참여했다. 인공이 발행한 북한 화폐는 8(북한 돈) 대 1(남한 돈)의 비율이어서 인기가 없었다. 북한 돈은 마지못해 받거나 아예 받기를 거부하고 남한 화폐를 쓰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서울 시민들의 소극적 저항에는 단파라디오의 역할이 컸다. 이원경 씨는 “미군정이 끝나고 물러가면서 미군들이 듣던 단파라디오가 많이 거리로 나왔다. (미국이나 일본에서 방송하는) 단파라디오를 들어보니 6·25전쟁에 대한 북한군이나 대한민국 방송 모두 거짓이더라. 그래서 이를 듣고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이현희 교수는 9월 6일자 일기에 “아버지는 ‘라디오에서 맥아더 장군이 서해안 일대 중 거점을 찾아 상륙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며 9일 뒤 감행된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소문을 이미 기록으로 남겼다.

인민위원회의 감시가 심했기 때문에 숨어서 라디오를 듣는 것도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라디오를 들으실 때는 내가 대문 쪽에 나가서 여기저기를 살핀다. 잡히면 목숨이 위태롭기 때문이다. 가끔 라디오에서 이상한 탁음이 나오거나 삐삐 할 때가 있어 여간 오금이 저리는 것이 아니다.”(이현희)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




▲동영상=김일성 사진 들고 광화문 활보하는 옛날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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