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가 본 이 책]인간의 파괴충동 제어 불가능한 꿈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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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8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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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람들은 싸우는가?/버트런드 러셀 지음·이순희 옮김/246쪽·1만3500원/비아북

버트런드 러셀(1872∼1970)은 20세기의 대표적 사상가다. 지칠 줄 모르는 활약을 펼치며 거의 한 세기를 살았던 그는 전문적인 수리철학자로 시작해 인식론과 과학철학을 거치며 사회학 역사학 정치학 등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경이적인 집필 능력을 과시했다. 말년에는 취미였던 탐정소설을 직접 쓰기도 해 모두 100여 권에 이르는 저술을 남긴 박람강기(博覽强記)의 천재였다. 철학자로서는 이례적으로 1950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할 정도로 그의 글은 유려하다.

또 러셀은 젊은 시절부터 사회 참여를 실천한 사상가였다. 모든 현상과 기존 제도에 의문을 품은 그는 생각을 숨기지 않고 세상의 편견과 맞서 싸웠으며 숱한 박해를 받기 일쑤였다. 조부가 빅토리아 여왕 시절 총리를 지낸 명문대가 출신이었음에도 평생 자유인이자 독립적 지식인으로 살았던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광기와 애국주의에 온 유럽이 휘말렸던 1916년, 영국에서 행한 반전 대중강연의 사자후가 바로 ‘왜 사람들은 싸우는가’(원제는 ‘사회재건의 원리’)였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100년 전의 저작이다.

놀라운 것은 인간성의 본질, 국가와 전쟁, 소유와 분배, 교육과 결혼, 교회와 종교 등을 다룬 이 책에서 저자가 드는 당대적 예화들만 낡았을 뿐이지 주제에 대한 통찰은 생생한 현실감으로 살아있다는 사실이다. 세월의 흐름을 넘어 사안의 정곡을 찌르는 그의 혜안은 놀랄 만하다. 예컨대 유럽의 진보적 지식인 대부분이 ‘사회주의 혁명의 모국’ 소련을 동경하고 찬양하던 1920년에 소련을 여행한 러셀은 전체주의 사회가 되어가는 소련의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한 ‘볼셰비즘의 이론과 실천’을 출간해 파문을 일으킨다. 중국 대륙이 대혼란에 빠져 아시아의 병자로 여겨지던 1930년대 베이징에서 1년을 체재한 그는 중국이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거인임을 논증한 ‘중국의 문제들’을 썼으며 후에 러셀의 식견은 대부분 정확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의 이런 능력은 ‘왜 사람들은 싸우는가’에서도 재확인된다. 이 책의 집필 시기는 러셀이 활발히 반전활동을 펴던 기간과 일치한다. 반전평화운동 때문에 벌금형을 받고 대학 강사직을 박탈당했으며 1918년에는 투옥되어 6개월의 실형을 받았으나 그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이 저서는 이론과 실천을 결합해 살아 움직이는 당대의 문제와 고투함으로써 장구한 생명력을 획득한 러셀의 결기와 비전을 증명하는 책이기도 하다.

영국의 철학자 러셀은 전쟁을 영구히 종식시킬 수 있는 방안으로 지구상의 모든 군사력을 독점한 국제기관을 만들 것을 제안했다. 1961년 영국 런던 트레펄가 광장에서 핵무장에 반대하는 연설을 하고 있는 러셀. 사진 제공 비아북
영국의 철학자 러셀은 전쟁을 영구히 종식시킬 수 있는 방안으로 지구상의 모든 군사력을 독점한 국제기관을 만들 것을 제안했다. 1961년 영국 런던 트레펄가 광장에서 핵무장에 반대하는 연설을 하고 있는 러셀. 사진 제공 비아북
예컨대 전쟁을 인간 본성에 기인한 하나의 제도로 묘파한 3장은 전쟁에 대한 경제적·정치적 조망의 한계를 넘어서려 한다. 인류 대부분이 화합보다는 충돌을 지향하는 충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때로 공동체 전체가 전쟁에 대한 맹목적 충동에 휩쓸릴 수 있다는 것이다. 전쟁이 욕구 충족이나 합리적 계산 때문에 발생하는 차원보다 인간성에 내재한 충동에 의해 생겨나는 측면에 주목하는 러셀은 이런 충동을 도덕과 규범으로 제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본다. 따라서 그의 전쟁론에는 인간론의 전제가 깔려 있다. 1장이 다루는 인간 행동의 두 원천은 충동과 욕구인데 이 가운데 충동이 더 근본적이라는 것이다.

충동은 크게 파괴적 충동과 창조적 충동으로 구별된다. 전쟁과 돈의 숭배, 국가권력에 대한 맹신 등이 삶을 저해하는 파괴적 충동의 사례다. 이에 비해 창조적 충동은 인간과 사회를 풍요롭게 하는 과학, 예술, 사랑의 모체이기도 하다. 따라서 싸움과 투쟁을 줄여 사회를 재건하기 위한 근본원리는 파괴적 충동을 순화하고 창조적 충동을 장려하는 데 있다. 러셀은 이런 사회 재건의 원리가 소유와 분배, 교육과 결혼, 교회와 종교 등의 문제에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미 제도화되어 버린 전쟁을 극복하기 위해서도 파괴적 충동을 제어하는 사회적 노력과 공동체적 실천을 병행해야 한다. 이는 교육과 경제구조, 결혼과 종교 영역의 광범위한 질적 변화를 통해서만 비로소 달성 가능할 터이지만 결코 불가능한 꿈이 아니다. 결론인 8장이 웅변하는 것처럼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그리고 여성운동 같은 찬란한 사회 재건의 노력도 처음에는 소수의 이상주의자들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전쟁을 영구히 종식시킬 수 있는 방안으로 러셀은 지구상의 전 군사력을 독점한 국제기관이라는 아이디어를 제시한다. 문제는 독점적 군사력을 가졌지만 ‘민족국가의 국내 문제는 간섭하지 않은 채 민족국가들 간의 관계만을 규제하는’ 이 국제기관이 자신의 본분을 지켜 군사력 남용을 절제하고 민주적 통제의 대상이 될 수 있을지가 불확실하다는 점이다. 차후의 저작에서도 그는 이 문제를 명쾌하게 풀지 못했으며 세계평화를 위한 억압적 세계정부의 필요성을 우울한 어조로 시인하기도 했다.

흥미로운 점은 제1차 세계대전과 베트남전쟁에 극렬히 반대했던 그도 ‘선을 위한 불가피한 서막’으로서 반(反)히틀러 투쟁을 지지했다는 사실이다. 러셀같이 급진적인 반전평화주의자조차도 나치라는 악을 제거하기 위한 ‘정의로운 전쟁’의 가능성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반전론자 러셀이 직면해야 했던 이런 모순이 한반도에 대해 갖는 함의는 과연 없는 것일까.

윤평중 한신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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