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김현진] 스타일 인 셀럽⑮ 장미희는 에르메스를 입는다

동아일보 입력 2010-05-20 15:51수정 2010-11-18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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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의 베레모, 가죽 스커트, 허리띠와 \'콜롬보\'의 ‘오데온\' 알타 미니백을 매치한 장미희. \'인생은 아름다워\'의 \'조아라 패션\'은 \'엄마가 뿔났다\'의 \'고은아 패션\'에 이어 화제가 되고 있다.(사진=드라마 화면 캡처)

럭셔리하다. 우아하다. 그런데 가끔 기러기, 아니 갈매기 울음 같은 경박한 웃음소리를 낸다. 재일교포라는 설정 탓이기도 하지만 구사하는 문장 역시 주어나 목적어가 생략되기 일쑤다. 영어로 치면 3형식 이상을 넘어가는 말이 없다.

"몇 살이예요?"
"아무것도 안 해요. 모레 결정하겠어요."
"하이, 파파(Hi, Papa)~."
"아, 우울해."

SBS 주말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리조트 대표 조아라 역을 맡은 장미희(52)는 한없이 지적으로도, 또 한없이 유아적으로도 보이는 캐릭터를 120% 소화해 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그가 호평을 받는 것이 연기력 때문만은 아니다. 주연급 배우들조차도 한 회당 등장 신이 10개 이상을 넘기 힘든 '멀티톱' 체제의 드라마에서 조아라 등장신이 유난히 화제가 되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 에르메스, 콜롬보도…명품 브랜드들의 '구애'


'비주얼' 때문이다. 아버지의 권유로 리조트 대표를 맡게 된 조아라가 제주공항에 도착하는 첫 신부터가 화려했다. 장미희가 입은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제니'의 악어가죽 코트는 무려 1억7000만원(그것도 국내에 딱 한 벌 수입된 '리미티드 에디션'이다). 카트에 수없이 쌓인 색색깔 트렁크는 역시 이탈리아 브랜드인 '콜롬보'와 '프라다' 제품. 악어가죽 소재는 개당 1억원을 웃돈다. 그가 손에 든 '에르메스' 버킨백까지 합치면 이 첫 신 하나에 등장한 패션 아이템들의 총 가격만 10억원 이상이다. 명품, 그것도 최상위층 명품 소비자들이 즐겨 찾는 브랜드들만 골라 걸친 장미희는 그러나 과하다기보다는 평소 모습인 양 자연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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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희는 이 드라마에서 리조트 대표라는 역할에 걸맞게 여성스럽고 우아한 디자인보다는 선이 굵고 세련된 스타일을 주로 소화하고 있다. 액세서리도 다이아몬드나 루비 같은 '블링블링'한 원석들보다는 은, 가죽 등을 소재로 한 심플한 제품들을 착용한다. 이를 위해 '데이빗 여먼', '조지 젠슨' 'CYE 디자인' 등의 모던한 브랜드들이 선택됐다.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조아라 역을 맡은 장미희의 첫 등장 신. 1억7000만원대의 '제니' 악어가죽 코트와 개당 1억원에 달하는 '콜롬보'의 악어가죽 트렁크가 눈에 띈다. 손에 든 가방은 '에르메스' 버킨백이다. (사진=드라마 화면 캡처)

장미희가 이번 드라마에서 자주 입고 나온 패션 아이템들 가운데는 '에르메스' 제품들이 많다. 8일 방영된 양병준 상무(김상중 분)와의 하이킹 신(자전거를 타고 초원에 도착해 영화 '사운드오브뮤직'의 한 장면을 찍는 양 흥분하던 신)에서 입은 조끼, 팔찌, 장갑, 목걸이, 모자가 모두 '에르메스' 제품이었다. 어깨 부분이 봉긋하게 오른 '안느 퐁텐' 블라우스, '알렉산더 맥퀸'의 롱스커트와 곁들여진 에르메스풍 하이킹 패션은 단숨에 시청자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에르메스'가 드라마 출연을 위해 배우에게 협찬을 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그것도 그 대상이 20대의 인기 배우가 아닌 50대 배우라는 사실은 젊고 예쁘고 '핫'한 연예인만 선호해온 브랜드들의 '협찬 마인드'에 어긋나는 일이다.

이 브랜드 양현민 대리는 "드라마 출연을 위해 배우에게 공식적으로 협찬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장미희 씨가 미술과 영화 등 문화산업에 관심이 많아 예술가들을 후원해 온 브랜드 철학과 잘 통하고 평소 '에르메스'의 옷을 즐겨 입는 고객이기도 해 협찬을 결정했다"고 전했다. 현재 협찬에 따른 광고 효과와 매장 반응을 자체 조사 중이라는 이 브랜드는 "장미희 씨가 드라마 속에서 쓰고 나온 모자, 액세서리, '에르백' 등에 대해 문의하는 고객수가 크게 늘었고 이중 상당수가 실제 판매로 이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 50대 패셔니스타의 짜릿한 성과

장미희는 김수현 작가의 2008년작 '엄마가 뿔났다'에도 출연했다. 현실적이지만 귀엽기도 한 재벌가 안주인 고은아 역을 맡았던 그는 매회 화려한 패션을 선보여 화제가 됐다.

이미 이때부터 장미희를 향한 명품 브랜드들의 협찬 구애는 시작됐다. 그해 20대 여배우들을 제치고 최고의 패셔니스타로 등극한 그는 '스타일 아이콘 어워드'에서 아들 뻘인 가수 비와 공동으로 대상을 수상하는가 하면 '코리아베스트드레서 백조상' 시상식에서 최고상을 받았다. 그로 인해 '루비(RUBY)족'이라는 신조어까지 탄생했다. 상쾌하고(Refresh), 평범하지 않으며(Uncommon), 아름답고(Beauty), 젊은(Young) '50세+α'의 여성을 뜻하는 단어다.

'한물간' 또는 '엄마' 이미지에 머물기 마련인 50대 여성 연예인에게 명품 브랜드 협찬이 줄을 잇고 20대 '패션 워너비'들이 흠모의 시선을 보내는 것은 국내 패션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인생은 아름다워'의 드라마 홈페이지와 각종 게시판에도 장미희가 입고 나온 패션 브랜드에 대한 질문이 잇따르고 있다. 같은 드라마에 출연하는 남규리(25), 남상미(26)의 옷보다 장미희 패션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더 많다는 사실은 새삼 '장미희의 힘'을 느끼게 한다.

사실 국내 패션계 관계자들은 '섹스앤더시티'의 제시카 파커(45)와 같은 중년의 패셔니스타를 기다려 왔다고 말한다. 최고급 명품 브랜드의 실질적인 고객층이자 '큰 손'인 40대 이상 여성들이 또래 스타들이 입은 옷에 더 쉽게 '감정이입'을 하기 때문이다.

'콜롬보', '제니'를 수입하는 오르비스인터패션의 김기동 팀장은 "이들은 젊은 배우보다는 또래 배우가 입은 아이템들이 현실적으로 자신의 몸에 잘 맞을 것이라고 기대한다"고 말했다. 장미희가 '엄뿔'에 출연할 때도 '콜롬보'의 '오데온' 백을 협찬해 적지 않은 판매 효과를 거뒀다는 이 브랜드는 '인생은 아름다워'에는 '오데온'의 새 시리즈인 '알타 미니' 모델을 제공하고 있다.


'에르메스'의 조끼, 팔찌, 목걸이 등을 '안느 퐁텐'의 블라우스, '알렉산더 맥퀸' 스커트와 매치한 하이킹 신. 이 신이 방영된 후 장미희 패션에 대한 시청자들의 문의가 잇따랐다. (사진=드라마 화면 캡처)

▶ 카리스마, 안목, 교양…그녀의 명품 이미지

장미희를 아는 패션계 관계자들은 "그는 전문가 수준의 패션 마니아이자 실험적 디자이너들의 열렬한 지지자"라고 입을 모은다. '엄뿔'때부터 그의 스타일링을 맡아온 스타일리스트 조윤희 실장은 "매달 여러 권의 패션잡지를 정독해 브랜드, 신제품 정보에 대한 지식이 패션 에디터 수준"이라며 "일반인들은 시도하기 어려운 독특한 디자인의 의상도 거침없이 소화해내고 특이한 아이템들은 컬렉터처럼 소장도 하는 패션 애호가"라고 설명했다. 스타일리스트 역시 장미희가 직접 연락해 인연을 맺게 됐다. 조 실장이 패션잡지 에디터로 활동하던 당시 진행한 화보 스타일이 마음에 든다며 스타일링을 도와줄 것을 그가 먼저 제안한 것이다.

스타일리스트를 쓰기 전까지 혼자 의상을 준비해 왔다는 장미희는 '인생은 아름다워'에서도 본인 소장품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주황색 스카프를 두건처럼 두른 식탁 컷에서 입은 '마르탱 마르지엘라' 니트 티셔츠, 김상중에게 "혼자 밥 먹는 게 싫다. 저녁 한 끼 같이 먹을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장면에서 입은 어깨 볼록한 와인색 '랑방' 블라우스 등이 모두 그가 과거 직접 구입한 아이템들이다.

조 실장은 "(장미희 씨는) 캐릭터 분석을 한 후 드레스룸 한켠에 소장한 패션 아이템 중에 이번 작품에서 활용할 수 있을만한 것들을 먼저 따로 뽑아놓는다"며 "스타일리스트가 자칫 놓칠 수 있는 배우만의 캐릭터 해석 결과를 반영할 수 있어 스타일을 잡는데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장미희가 가장 좋아하는 디자이너는 벨기에 출신 해체주의 디자이너 마르탱 마르지엘라. 병마개, 카드 등 상상하기 힘든 재료로 옷을 만드는 것으로 유명한 디자이너다.

그는 2008년 패션잡지 '바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마르탱 마르지엘라 옷은 창조적인데다 철학이 보여서 더 마음에 들었다. 자크 데리다나 라캉의 해체주의를 옷이란 매개체를 통해 풀 줄 아는 사람이다…옷은 내가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생각과 감성을 공유할 때 가치가 드러나는 것이다."

자신의 패션 철학을 드러내기도 했다. "배우로서 옷을 잘 입는다는 것은 소비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배우가 자기 역할에 맞게 옷을 입기 위해 필연적으로 공부를 해야만 하는 문제다. 왜 저 옷이 사람들 마음을 잡아끄는지 아는 일은 발성 연습을 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다."

패션컨설턴트 심우찬 씨는 장미희가 때로는 튀어 보이는 패션 아이템을 선보임에도 경박하거나 유치해보이지 않는 이유를, 그가 뚜렷한 배우론을 갖춘 데서 찾았다.

"중년 여성은 이렇게 입어야 한다는 고정적 관념을 파격적인 패션 아이템으로 깨 나가면서 도 우아한 애티튜드 때문에 '튄다'는 느낌보다 '멋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래서 그는 화려한 '신상'에 목을 매는 '패션 빅팀(victim)'이 아닌, 패션을 현명하게 즐길 줄 아는 패션 애호가다."

2007년 7월 부천판타스틱영화제 개막식 레드카펫에서 선글래스를 모티프로 한 '마르탱 마르지엘라'의 의상을 입어 남다른 패션 센스를 뽐낸 장미희. 스포츠동아 자료사진.

대중은 그를 오랫동안 오해해 왔다. 1992년 '사의 찬미'로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남긴 수상 소감, "아름다운 밤이예요"와, 1998년 드라마 '육남매'에서 "똑(떡)사세요"를 외치던 지나치게 아름답고 청아한 목소리 탓이 크다. 소프라노처럼 높은 음역대의 우아한 목소리와 음절 하나, 음소 하나 놓치지 않는 정확한 발음 역시 '척(우아한 척, 아는 척)한다'는 빈정거림을 샀다.

그러나 '배우로서 옷을 잘 입는다는 것은 공부해야 할 문제'라는 철학을 거침없이 표현하는 그라면, 평소 그가 철학책과 심리학책을 끼고 살고 음악과 미술, 패션에 고도의 심미안을 가졌다는 지인들의 증언도 그저 그런 '연예인 미화 스토리'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만의 독특한 애티튜드와 우아한 아우라는 그 만큼의 교양의 깊이와 프로패셔널리즘을 반영한 산물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아이돌 스타들의 '팬덤'을 이루는 기본축이 그들의 성장 과정을 보는 흐뭇함과 기대라면, 한 시대를 풍미한 50대 여배우의 '팬덤'의 실체는 존경과 신뢰가 바탕이 될 것 같다. 장미희는 화면 속에서 그저 예쁘게만 보이는 '발리' 벨트 하나에도, '에르메스' 모자 하나에도 자신만의 철학을 반영했을지 모른다. 조아라의 기러기 같은 웃음소리, 유아적인 재일교포 말투 등 '오디오'에 뿐 아니라 '비디오'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또 다른 이유다.

김현진기자 brigh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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