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바닷길 요트 일주] 울부짖는 바다…“이 맛이 세일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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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월 6일 07시 00분


“할아버지 만화가 맞아요?” 거문도 분교 특강, 아! 허화백의 굴욕
“날아라 슈퍼보드 알아?” 칠판에 저팔계 쓱쓱 그제야 아이들의 눈망울이 초롱해진다

강풍이 휘몰아치는 바다는 사나운 짐승처럼 날뛰며 포효했다. 너울에 솟구쳤다 가라앉을 때 배의 앞머리가 거의 물에 잠길 정도. 그러나 바다의 사나이들은 한 치도 굴하지 않고 거센 파도를 뚫고 쾌속 항진하고 있다.
강풍이 휘몰아치는 바다는 사나운 짐승처럼 날뛰며 포효했다. 너울에 솟구쳤다 가라앉을 때 배의 앞머리가 거의 물에 잠길 정도. 그러나 바다의 사나이들은 한 치도 굴하지 않고 거센 파도를 뚫고 쾌속 항진하고 있다.
아무리 남녘이라 해도 겨울로 접어드는 11월의 제주 바다는 비를 맞기에 적당한 장소가 결코 아니었다. 화순항을 빠져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우리를 뒤쫓던 먹구름이 서귀포 앞바다에서 기어이 비를 뿌리기 시작한 것이다. 코끝에, 턱 끝에 방울방울 맺힐 뿐이던 이슬비가 점점 굵어져 급기야 목덜미를 타고 흘러들어 소스라치게 만들었다.

마치 가늘고 차가운 혀가 핥고 있는 느낌. 바다는 빗방울들이 그려낸 수많은 동심원들로 소란했고, 대원들은 작은 돛단배의 지붕 없는 갑판에서 차가운 비에 젖었다. 다행히 비구름은 범섬을 지날 때 쯤 우리 배를 추월해 완벽한 반원형의 거대한 무지개를 남겨놓고 한라산을 향해 멀어져갔다. 비구름은 겨울의 진군을 다급하게 알리는 봉수대의 봉화인 듯 이미 정수리에 하얗게 눈을 이고 있는 한라산에 새 눈을 내릴 터였다. 범섬, 문섬, 섭섬을 스치듯 지나 외돌개를 지날 때쯤에야 비에 젖었던 옷이 다 말랐다. 배는 저물녘에 섭지코지 건너편 신양항으로 들어갔다.

이튿날인 11월 7일, 집단가출호는 새벽 4시에 제주도와 작별을 고했다. 지금까지 수많은 섬과 포구를 들러온 집단가출호였지만 제주도는 특히 맘이 쓰인다. 요트가 정박할만한 마땅한 마리나가 없는 가운데 제주도요트협회와 해양경찰, 어촌계, 선주협회 등이 우리 배를 돌보는데 커다란 수고를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제주도요트협회의 김기윤 이사, 표연봉 이사는 우리 배가 화순항에 정박 중 돌풍에 밀리는 위기의 순간 현장으로 달려와 도와주기도 했다.

찬란한 아침 햇살 아래 섭지코지, 성산일출봉, 우도의 차례로 제주도가 멀어져간다. 다음 목적지 거문도까지는 약 80km. 선미에 묶어놓은 끄심바리 낚시에 70cm짜리 방어가 낚여 점심거리를 제공했다.

지난 4차 항해 때 흑산도의 한 낚시점에서 박영석 대장이 찾아낸 이 낚시는 낚싯대도 없이 달랑 가짜 미끼(루어)와 줄 뿐인 초 원시적인 도구였지만 효율만큼은 기가 막혔다. 그저 배 뒤에 묶어놓고 있다가 생각날 때 감아들이면 어김없이 고기가 물려 있곤 했다. 남서해를 항해하던 9,10월엔 주로 삼치가 물었고, 이번엔 방어와 참치 종류인 가다랭이, 그리고 만새기까지 걸려 식량 조달에 큰 역할을 해내고 있다.

거문도 동도 선착장에는 서니호(선장 김대규)가 이미 도착해있었다. 남해안을 항해 중인 서니호는 우리와 같은 전곡항 출신의 레이싱 요트로 거문도∼여수 구간을 우리와 함께 항해하기 위해 이날 아침 여수를 떠나 한발 앞서 거문도에 닿아 있었던 것이다.

거문도초등학교 동도분교는 선착장에서 200여m 떨어진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한 때 학생수가 200명을 넘었던 때도 있었으나 지금은 전교생이 4명뿐인 초미니 학교다. 허영만 화백의 섬 방문을 미리 알고 있던 학교와 학부모측이 아이들을 위한 ‘허영만의 특별 미술수업’을 요청했고, 허화백은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허영만 화백 항해 스케치지난 항해에서 히말라야의 사나이 박영석 대장이 잠깐이긴 하지만 배멀미에 시달린 것은 ‘멀미 앞에 장사 없다’는 것을 입증하는 사건이었다. 8000m급 고산의 희박한 산소와 낮은 기압 속에서, 깎아지른 절벽에서도 꿋꿋이 버텨온 그를 배멀미가 넉다운시킨 것이다. 6차 항해를 앞두고 15노트 가까운 바람이 불 것이라는 예보를 접하고 내가 제일 먼저 준비한 것은 귀 밑에 붙이는 멀미 방지 패치였다.문제는 엔진을 거의 쓰지 않고, 거의 노숙에 가까운 형태로 야영을 하는 등 문자 그대로 야생의 항해를 해나가고 있는 집단가출호 대원들 중에서 이런걸 붙이고 항해한 전례가 없다는 사실. 하지만 박영석도 고개를 젓게 만든 멀미가 아니던가? 울렁거리면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그래도 항해 내내 누가 볼까봐 목덜미에 신경이 쓰인 것은 사실이었다
허영만 화백 항해 스케치
지난 항해에서 히말라야의 사나이 박영석 대장이 잠깐이긴 하지만 배멀미에 시달린 것은 ‘멀미 앞에 장사 없다’는 것을 입증하는 사건이었다. 8000m급 고산의 희박한 산소와 낮은 기압 속에서, 깎아지른 절벽에서도 꿋꿋이 버텨온 그를 배멀미가 넉다운시킨 것이다. 6차 항해를 앞두고 15노트 가까운 바람이 불 것이라는 예보를 접하고 내가 제일 먼저 준비한 것은 귀 밑에 붙이는 멀미 방지 패치였다.
문제는 엔진을 거의 쓰지 않고, 거의 노숙에 가까운 형태로 야영을 하는 등 문자 그대로 야생의 항해를 해나가고 있는 집단가출호 대원들 중에서 이런걸 붙이고 항해한 전례가 없다는 사실.
하지만 박영석도 고개를 젓게 만든 멀미가 아니던가? 울렁거리면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그래도 항해 내내 누가 볼까봐 목덜미에 신경이 쓰인 것은 사실이었다

특별 수업의 주제는 ‘애니메이션’. 1학년 래경이, 3학년 승희, 5학년 서연이, 6학년 현준이 등 재적 학생 전원이 참석해 출석률 100%를 기록한 가운데 아이들은 생전 처음 보는 허화백을 못내 낯설어했다. ‘식객’이나 ‘타짜’를 알 리 없는 섬 아이들이다.

각각의 그림 한장 한장이 어떻게 움직이는 만화영화로 만들어지는지에 대한 설명이 한창일 때 급기야 “그런데요∼ 할아버지 진짜 만화 그리는 사람 맞아요?”라는 질문이 나왔다.

잠시 난감해하던 허 화백. “늬들 ‘날아라 슈퍼보드’ 알지? 선글라스 낀 저팔계 나오는 만화영화. 그거 내가 그린거야.”

아이들은 칠판에 저팔계가 그려지는걸 보고는 그제 서야 까르르 웃으며 수상한 할아버지에게 마음을 열었다. 수업은 학부모들이 주축이 되어 동도 청년회에서 마을회관에 마련한 저녁 식사가 다 차려졌다며 이장님이 부르러 올 때까지 계속됐다. 청년회에서는 10kg 짜리 부시리를 잡아 회를 떠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여수로 향하는 날 아침, 바다는 험하게 변해있었다. 구름이 잔뜩 끼었고, 항의 깊숙한 안쪽 임에도 불구하고 강풍이 몰아친다. 김상현, 장혜란 부부 교사 등 동도 주민들의 걱정스런 배웅을 받으며 방파제를 벗어난 뒤 메인 세일을 올리자 돛에 가해지는 강력한 힘이 느껴진다.

거문도를 떠나 여수로 향하는 길

바다가 성난 짐승처럼 날뛰고 있다

삼킬 듯 달려드는 파도에 요트 휘청휘청

물벼락도 좋아! 선원들은 스릴에 흠뻑 젖는다


항구 바깥은 4∼5m의 파도가 일어 바다는 으르렁대고 있었다. 모터보트도 부럽지 않은 속력으로 백도를 오른쪽으로 바라보며 단숨에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을 가로 질렀다. 대원들은 모두 안전벨트에 연결된 확보줄을 라이프 라인에 걸고 헬멧과 고글로 중무장한 뒤 파도와 강풍에 맞섰다. 거문도 수역의 수려한 풍광은 거친 바다 위에서 더욱 빛났다. 빛나는 섬들은 저마다 하얗게 부서지는 물보라를 두르고 파도를 견뎌내고 있었다.

멀리 파도 너머로 우리와 비슷한 시각에 거문도를 출발해 백도로 향하던 유람선이 사나운 날씨에 서둘러 회항하는 것이 보인다. 파도를 넘어 배가 솟았다. 곤두박질 칠 때마다 물벼락이 갑판 위를 휩쓸고 지나갔는데 마스트에 위험하게 매달려 다큐멘터리 영상을 촬영하던 김기철 감독이 파도 한 방을 제대로 맞고 쓰러졌다. 김 감독은 곧 일어났지만 카메라는 짠물에 흠뻑 젖어 KO됐다.

점심시간이 됐으나 바람에 30도 정도 기운 채 쌩쌩 달리는 배의 어디에도 차분히 버너를 켜고 조리를 할 만한 평평하고 안정된 곳은 없다. 떡국과 라면, 쌀 등 식량이 있었지만 이런 난리 속에 뭔가를 끓여 식사를 준비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결국 식빵에 땅콩버터를 발라 요기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집단가출호의 조타장치는 요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바퀴 형태가 아니라 원시적인 막대기 스타일이다. 공간을 덜 차지하고 메커니즘이 간단해 고장 날 일이 없어 레이스 요트에서 선호하는 스타일인데, 특히 바람이 세고 파도가 높을 땐 바다의 상황이 조타핸들을 통해 가감 없이 전달된다. 이런 거친 날씨에 러더(선미 아래에 달린 방향 조종용 날. 갑판 위의 조타핸들과 연결되어있다)로부터 전해져오는 짜릿한 느낌은 낚시에서 큰 고기가 잡혔을 때의 ‘손맛’에 비견할만한 스릴 넘치는 즐거움이 있었다.

파도는 점점 높아져 배가 파도의 정점에서 골짜기로 떨어질 때의 낙차가 2층 건물 높이에 육박했고, 빔리치(옆바람을 받아 전진하는 것) 때는 배가 바짝 누워 마치 벽에 매달린 형국이다. 15노트를 웃돌던 바람은 오후 2시께부터 10노트로 떨어지며 클라이맥스를 넘겼다.

여수 가막만에 진입했을 땐 바람이 육지에 막혀 수면이 잔잔한 가운데 다시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항구에서 기다리던 허 화백의 고향 친구 분들(여수는 허화백의 고향이다)과 함께 장어구이로 저녁식사를 하는 내내 대원들은 굳이 흥분을 감추지 않고 방금 지나온 거친 바다를 화제 삼아 이야기꽃을 피웠다.

송철웅 아웃도어 칼럼니스트 cafe.naver.com/grouprunway

사진=이정식 스포츠 포토그래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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