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주 명인의 술 이야기]<6>지리산 솔송주 박흥선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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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2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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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두 정여창 선생의 16대손 며느리인 박흥선 명인이 소줏고리에서 나온 지리산 솔송주를 맛보고 있다. 박 명인은 술을 전혀 못하지만 혀끝의 감각으로 솔송주의 품질을 가늠할 수 있다. 함양=최재호 기자
일두 정여창 선생의 16대손 며느리인 박흥선 명인이 소줏고리에서 나온 지리산 솔송주를 맛보고 있다. 박 명인은 술을 전혀 못하지만 혀끝의 감각으로 솔송주의 품질을 가늠할 수 있다. 함양=최재호 기자
《조선시대 영남 유림의 맥을 논할 때 ‘좌안동 우함양(左安東 右咸陽)’이라고 표현한다. 그만큼 경남 함양은 일찌감치 묵향의 꽃을 피운 선비 고을이다. 그 중에서도 지리산을 병풍 삼아 볕 좋은 곳에 자리 잡은 함양군 지곡면 개평마을이 대표적이다. ‘조선5현(朝鮮五賢’) 가운데 한 사람인 일두 정여창 선생(1450∼1504)의 500년 된 고택(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186호)이 이곳에 있다. 하동 정 씨의 집성촌인 이 마을에는 200년 이상 된 기와집 수십 채와 아담한 돌담길이 세월의 흔적을 지우지 않고 남아 있다.》

청정 암반수… 깊은 솔향… ‘지리산의 술’

또 하나. 늘 푸르고 꼿꼿한 소나무와 선비의 절개를 닮은 명주가 500년 세월을 이어오고 있다. 정 선생 가문에서 500년째 내려오는 가양주(家釀酒)인 ‘지리산 솔송주’다.

“물 좋은 곳에서 좋은 술이 나기 마련이죠. 술의 절대량이 물로 채워지니 어떤 물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명주가 결정됩니다. 솔송주는 지리산 지하 암반수에 지리산 골짜기에서 나는 찹쌀, 솔잎, 송순, 누룩을 버무린 지리산의 술입니다.”

솔송주의 맥을 유일하게 지켜오고 있는 박흥선 씨(57·전통식품명인 27호)는 정 선생의 16대손 며느리이다. 33년 전 개평마을에 시집을 와서 시어머니에게 술 빚는 법을 배웠다. 100세인 시어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아 요즘엔 박 명인 혼자 맡고 있다.

“처음 시집왔을 땐 누룩 냄새를 맡지도 못했어요. 30년 넘게 술을 빚어왔지만 술은 한잔도 못 비워요. ‘이런 내가 가문의 술을 빚을 수 있을까’ 하고 고민했지만 가양주의 맥을 이어가야겠다는 생각에 제조법을 배웠습니다.”

술은 못하지만 혀끝으로 술이 잘 빚어졌는지를 판단할 수 있다. 남편 정천상 씨(63)의 도움도 컸다. 정 씨는 20대 초반 총각 시절부터 맛본 솔송주에 대한 절대미각이 있다. 그의 기억으로는 솔송주 한잔을 맛보기 위해 전국에서 개평마을을 찾은 주당 나그네가 엄청났다고 한다.

지금 솔송주가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당시엔 술 이름이 ‘송순주(松荀酒)’였다는 점. 박 명인이 1996년 주조허가를 받는 과정에서 타 지역에서 먼저 등록한 송순주와의 중복을 막기 위해 한글로 풀어 솔송주라고 이름 붙였다.

함양 선비들의 주안상에 오르던 솔송주의 제조과정은 이렇다. 찹쌀 죽에 누룩을 잘 섞어 독에 보관하고 사흘가량 발효해 밑술을 만든다. 식힌 고두밥과 살짝 찐 솔잎과 송순을 밑술과 섞어 보름가량 숙성한다. 송순을 찌는 건 떫은맛을 없애기 위해서다. 숙성된 술을 채와 창호지에 걸러내 서늘한 곳에서 20일가량 보관한 뒤 맑은 윗술을 떠내면 비로소 솔송주가 완성된다.

발효과정에서 남은 당분(잔당)을 조절하는 건 박 명인만의 비법이다. 당분이 없으면 독한 술이 되고 너무 많으면 고유의 술맛이 사라진다. 솔향 가득한 술은 이렇게 후손의 손끝에서 가문의 명예를 지켜왔다.

여느 술 빚는 사람처럼 박 명인도 발효와 숙성을 중요시 한다. 날씨와 온도에 따라 숙성기간이 달라지기 때문에 하루 종일 신경을 곤두세운다. “발효는 하늘만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술을 빚는 과정에서 기도를 많이 드립니다.” 가톨릭 신자인 박 명인은 술 빚는 과정이 기도의 과정이라고 표현했다.

솔송주는 이름을 닮은 맛을 낸다. 진한 솔향이 먼저 코끝을 파고든다. 도수가 높지만 달짝지근한 맛에 목 넘김이 부드럽다. 뒤끝이 깨끗한 게 특징이다.

1996년부터 솔송주는 대변신을 꾀했다. 가양주 특성상 공급이 달리던 솔송주 명성을 전국과 해외로 확대하기 위해 대량 생산의 길로 접어들었다. 박 명인 부부가 개평마을 인근에 대형 술도가인 ‘명가원’을 차렸다. 현대식 술도가에서 만든 솔송주는 13%짜리 약주와 40%짜리 증류주로 나뉜다.

솔송주와 명가원에서 만드는 과실주는 해외에서도 인기다. 홍콩 중국 미국 일본 등 6개 나라에 수출하고 있다. 그동안 정천상 씨가 매년 서너 차례씩 국내외 주류 박람회에서 솔송주의 우수성을 알리고 다녔다. 박 명인도 직감과 손맛으로 전수된 제조법을 대중화로 이끌어내기 위해 술도가에서 몇 년을 연구했다.

전통을 간직한 노력 덕분에 솔송주는 지난해 경남 창원시에서 열린 환경 올림픽인 ‘2008 람사르 총회’에서 공식 건배주로 채택됐다. 2007년 노무현 대통령의 북한 방문 때 남측이 내놓은 공식 만찬주 가운데 하나였다.

함양=윤희각 기자 tot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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