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테마 에세이]봄<2>백영옥

  • 입력 2009년 3월 13일 02시 58분


위안의 봄바람

개구리도 놀라 깨어난다는 경칩. 생뚱맞게 사랑니가 함께 놀랐는지 부어올랐다. 개학을 한 탓인지 치과에는 앞머리를 바짝 깎은 어린이 서너 명이 죽상을 하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턱을 괸 녀석, 엄마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사탕을 먹는 녀석, 사약 받는 장희빈 얼굴로 입술을 깨물고 있는 녀석…. 나는 아이들 틈에 앉아 신문을 보는 둥 마는 둥 앉아 있었다.

곧 내 차례가 됐다. 나는 입을 벌린 채 누워 있었다. 아…이 느낌. 미국인들이 가장 공포스러워 하는 의사가 ‘치과의사’라는 통계는 바로 이런 감정 때문일 것이다. 드르륵드르륵 들려오는 무서운 기계음, 쉬익쉬익 톱질하는 듯한 소음들, 게다가 타인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어야 하는 수치심까지. 내 옆에는 방금 전, 사탕을 쭉쭉 빨고 있던 남자애가 누워 있었다. 그곳은 알록달록한 만화캐릭터로 디자인된 어린이 전용 공간으로 보였다.

“자. 지금 주사를 놓을 건데, 쪼금 아플 거거든? 근데 3초만 참으면 괜찮아지니까 울지 말기! 약속 지키면 간호사 누나가 선물도 줄 거야! 선생님이 안 아프게 해줄게. 야…너, 진짜 잘 참는구나.”

커튼을 쳐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살갑고 나긋나긋한 의사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의사는 치료 도중에도 계속 아이를 어르고 달랬다. 그때, 마스크를 쓴 채 나를 내려보던 의사가 말했다.

“환자분! 입 더 크게 벌리세요!”

그는 방심한 내게 마취주사 한 방을 쏘고 오른쪽 볼을 툭툭 치더니, 커다란 집게 같은 것으로 내 사랑니를 사정없이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아아아…오른쪽 볼이 그의 집게에 걸려 끌려가고 있었다. 아아아…뭐라고 소릴 질러야 할 것 같긴 한데, 아아아…마취가 돼서 당최 혀가 움직이지 않았다. 물론 치과의사는 내 사랑니를 성공리에 뽑아냈다. 하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복잡한 심정으로 나는 의사를 바라봤다.

치과를 나와 초등학교 운동장을 지나갔다. 놀이터를 지나니 팔짱을 낀 엄마들이 아이들을 유심히 지켜보며 벤치에 앉아 얘기하고 있었다. 순간 나는 이 억울함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나도 보호받고 싶다. 나이 서른을 넘겨 ‘동정 없는 세상’에 훽∼ 던져지고 나니, 위로받고 싶단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러니까 나 역시 치과에서 ‘참 잘했어요∼’ 도장 같은 걸 받고 싶었던 거다.

아까 치과에서 만난 사탕 문 그 아이가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아지랑이 속으로 신나게 달려가고 있었다. 미역처럼 부들거리는 머릿결, 아까 웃으며 그 머리를 쓰다듬던 치과의사의 얼굴이 묘하게 겹쳐졌다. 우리 속엔 누구나 상처받은 어린아이 한 명이 살고 있다. 아…나도 무서운 치과에 가면 문득 어린이가 되고 싶어진다. 입을 벌리자 뽑아낸 사랑니 자리에 봄바람이 고인다.

백영옥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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