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에 울려퍼지는 동양

  • 입력 2009년 3월 10일 02시 57분


재미 설치작가 조숙진씨 공공조형물 ‘기원의 종’

“108개의 동종 서로 다른 소리에서 번뇌 털고 위안 느끼길”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시청 연방청사 경찰청(LAPD)이 자리한 시내 중심가. 바람이 불 때면 어디선가 은은한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소리에 이끌려 작은 광장에 다가서면 나무 격자 구조물에 올망졸망 매달린 작은 종이 눈에 들어온다. 종마다 달린 금속판에는 삶에 힘을 주는 단어가 새겨져 있다. LOVE, PEACE, HOPE….

로스앤젤레스 도심 한복판에서 만난 공공조형물 ‘기원의 종’. 특이하게도 동양적 사유의 힘과 정서가 듬뿍 배어 있다. 사연을 알고 보면 수긍이 간다.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의 공공광장에 들어선 영구 조형물이 바로 한국 작가의 손으로 완성됐기 때문. 그 주인공은 뉴욕에서 활동 중인 설치작가 조숙진 씨(49). 2004년 심사를 거쳐 25만 달러 규모의 프로젝트를 위임받는 성과를 거두었다.

“유명 작가도 후보로 올랐다는데 제가 뽑혀 뜻밖이었죠. 경찰청과 이웃한 로스앤젤레스 메트로 구치소 앞에 들어선 ‘기원의 종’은 수명을 다하고 죽은 삼나무로 만든 9개의 기둥, 인간의 번뇌를 상징하는 108개의 동종으로 구성된 작품입니다. 건물 성격상 공사 초기에 시와 지역사회의 논쟁이 있었는데 이를 화합과 평화에 초점을 둔 작품으로 치유하고자 하는 마음을 담았죠.”

작품의 핵심은 한국에서 만든 108개 동종(지름 7.5cm)이 울리는 소리에 있다. 각기 무게가 다른 종은 움직일 때마다 음악을 연주하듯 다른 톤의 소리를 낸다. 번잡함이 잦아드는 밤이 될수록, 위로 갈수록 소리는 잘 들린다. 산사에 온 듯, 마음을 어루만지는 로스앤젤레스의 종소리는 도심 속 명상의 체험을 선사한다.

“한국에선 제야의 종을 33번 치고, 일본은 108번 울립니다.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종소리처럼, 모든 이의 고통과 번뇌를 몰아내고 새 출발을 비는 의미를 표현했어요.”

홍익대 대학원을 마치고 1988년 도미한 그는 20여 회의 개인전을 통해 국내보다 미국에서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1990년 오케이해리스갤러리에서 가진 초대전은 다큐비디오 ‘아트 투데이’에서 세계적인 사진작가 신디 셔먼, 화가인 사이 톰블리와 함께 ‘이달의 작가’로 소개될 만큼 호평 받았다. 2003년 미국의 잡지 ‘조각’의 표지에 실렸다. 1980년대 이후 45명의 조각가를 소개한 책 ‘조각독자(A Sculpture Reader)’는 리처드 롱, 조너선 브로프스키와 함께 그를 뽑아 주었다.

대학원 시절 미술재료를 살 돈이 없어 종이상자나 합판에 그림을 그렸던 한국의 여성작가에겐 의미 있는 성취였다. “힘든 시절도 있었지만, 그 경험을 통해 값싼 재료에 대한 예술적 가능성과 가치를 발견했어요. 그 영역을 버려진 나무로 확대해 로스앤젤레스 작품에도 ‘자연사’한 삼나무를 재생해 생명을 상징했죠.”

25년간 일상에서 발견한 나무를 이용해 조각과 설치작업을 해 온 그의 관심은 물질과 정신, 삶과 죽음, 시간과 공간의 관계에 있다. 공공조형물에서도 그의 꿈은 분명하다. 많은 이들에게 정신적 치유와 영감을 불어넣고 싶다는 것.

“공공미술을 하면서 사람들이 고정관념을 깨고 변화하는 것을 경험했어요. 가슴에 남는 작업으로 삶에 긍정의 힘을 불어넣는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로스앤젤레스=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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