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낭소리 이충렬감독, 5년만에 찾은 노부부와 자신의 인생

  • 입력 2009년 2월 17일 12시 08분


영화 ‘워낭소리’의 한 장면.
영화 ‘워낭소리’의 한 장면.
영화 ‘워낭소리’의 한 장면.
영화 ‘워낭소리’의 한 장면.
이충렬 감독.
이충렬 감독.
"'딸랑딸랑' 워낭소리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면 거기에 아버지가 서 있었어요."

유년시절 이충렬 감독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다. “가족들을 위해 땀 흘리며 일하시고 헌신하시는 아버지를 되살려보고 싶었어요. 어릴 적 기억속의 아버지를 찾다보니까 자연스럽게 아버지와 닮은꼴인 소가 생각이 난거죠.”

그의 기억 속 아버지와 소는 항상 우직하고 묵직하고 듬직한 모습이었다. 그의 시선에서 둘은 이상하리만치 서로 닮아 있었고 가족을 위해 말없이 일하는 모습은 어린 시절의 우상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그래, 한번 해 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저에게는 이미 아버지와 소에 대한 추억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현실 속으로 불러오는 작업만 하면 되는 것이었거든요. 잠시 잊고 있었던 소중한 존재를 떠올려보고 그 감사함에 헌사하고 위로하자는 측면이 있었죠. 그래서 궁극적으로 지금의 워낭소리가 탄생한 것입니다.”

워낭소리는 기획에만 5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IMF가 터지고 경제가 어려워졌을 때 시대 상황과 맞물려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고자 하는 욕망은 더욱 절실해 졌다고 한다.

“2000년부터 본격적으로 찾아 나섰죠. 제가 방송PD를 하다보니까 마을 이장님이라든지 면 서기 같은 인적 네트워크가 구축이 되어 있었거든요. 그래서 10년 걸릴 것을 5년 만에 봉화에서 찾았어요.” 5년 동안 그는 직접 전국 방방곡곡을 발로 뛰어다녔다. “제가 궁극적으로 보여주고 싶은 것은 ‘헌신’이었어요. 고향을 닮은 올드하고 핸디캡이 있는 그런 대상, 그래서 경북 봉화의 할아버지와 소, 그리고 할머니와 맞아 떨어진 것이죠.”

봉화의 노부부를 만나다

하지만 봉화의 노부부와 소는 그의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처음 뵈었을 때는 너무 쇠락해서 심란할 정도였어요. 원시림에 가까운 자연환경과 낡은 집도 문제였지만 문제는 할아버지였죠. 할머니는 말씀도 잘 하시고 인터뷰도 잘 되는데 할아버지는 기존의 다큐멘터리의 작법대로 할 수 없는 조건들을 다 갖추시고 있었어요.” 할아버지는 귀도 잘 들리지 않았고 화법이 단조로워서 다큐멘터리에서 가장 기본적인 인터뷰가 불가능했다. 게다가 카메라를 들이대면 사진 찍는 줄 알고 제 자리에 멈추셨다(지금도 카메라를 들이 대면 사진 찍는 줄 아신다고 한다). “일단 근접촬영을 시도하면 어색해져요. 늙은 소와 할아버지는 일하다가 같이 꾸벅꾸벅 졸기 일쑤고요. 카메라를 들이대면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것은 리얼리티가 손상되는 것이고. 그래서 ‘이 방법은 안 되겠다’ 싶었죠.”

소리로 서로의 ‘관계’를 만드는 것

그래서 그는 ‘소리를 찍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마이크를 채워드리고 멀리서 지켜봤다. 그제야 자연스러운 말과 행동이 나오기 시작했다. “비디오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어요. 정상인의 입장에서 보면 보이는 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앞을 못 보는 사람에게 진실은 비디오가 아니고 소리죠. 우리가 눈을 감고 봐도 어떤 사람의 진정성을 느낄 수 있다면 그림이 없어도 아무 하자가 없다고 생각해요.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소에게는 차라리 ‘예쁜 그림들이 더 가공된 것이고 연출일 수 있다’고 생각 한 거죠.” 그래서 ‘워낭소리’에서는 잘 만들어진 그림보다 노부부의 진솔한 대화 소리, 주변을 휘감는 새들의 소리, 고물라디오에서 들리는 오래된 음악 소리, 골골한 할아버지의 신음소리가 중요했다. 그는 ‘노부부와 소가 펼치는 이야기의 원형질’을 그림이 아닌 그들 사이의 소리에서 찾고자 했다. ‘소리’를 기본으로 한 ‘워낭소리’의 구성은 이렇게 탄생했다.

영상 연출에서도 시간의 순서대로 찍고 편집하는 기존의 방법을 바꿨다. 그는 영화 서두에서 소의 죽음을 관객들에게 미리 알렸다. 그는 그 이유를 “‘워낭소리’가 진실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정서를 자극하는 다큐멘터리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소는 죽었다고 시작했으니까 더 이상 궁금할 게 없는 거죠. 하지만 그 관계는 여전히 궁금하다는 것입니다. ‘대체 소와 할아버지는 어떤 관계였고, 어떻게 죽은 것일까?’라는 의문이죠.”

그가 주목한 부분은 구도와 관계였다. “할아버지와 늙은 소, 그리고 할머니의 삼각구도에서 관계가 보였어요. 젊은 소를 사오면서 삼각관계가 사각구도로 발전하고 그 안에 또 관계가 형성됐어요. 기존의 다큐멘터리가 시간의 순서대로 찍고 편집해 간다면 저는 미시적으로 구도와 관계에 집중했어요. 그러다보면 시간은 자연스럽게 관계의 사이사이에 배치될 것이고 그 관계가 만들어낸 정서들도 계속 쌓일 것 이라고 생각했죠.”

피사체와의 거리 두기

그는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할아버지 할머니와 식사 한번, 잠 한번 함께 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할머니에게 어머니라고 부르지도 않았어요. 한번은 할머니가 나를 호되게 뭐라 하시는 거예요. ‘왜 옆 동네 나랑 동갑인 할머니에게는 어머니라고 부르고 나는 그렇게 안 부르냐.’고. 서운해 하시더라고요.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영화 중간 송아지가 할아버지를 공격하는 장면에 정지화면을 넣은 이유를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나도 모르게 (할아버지를 구하려고)뛰어 들어갔어요. 그래서 제가 나온 장면들을 다 잘랐어요. 철저하게 일관성 있는 관찰자의 입장이 되어야 하겠기에 그랬던 것이죠.”

그는 철저하게 관찰자의 입장에서 노부부와 소를 바라보았다고 했다. 제작비가 모자라서 상주하지는 못했지만 한 달에 4~5번 꾸준히 내려가 노부부와 소를 바라보는 ‘관찰자’가 되었다.

제작비 문제 때문에 상주하지 못해서 그는 많은 장면을 스스로 놓쳤다고 했다. “그것이 아쉽지 않냐”는 질문에 그는 오히려 그것이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했다. “소가 쓰러지는 장면은 못 잡았어요. 하지만 소가 쓰러진 상태에서 할아버지가 일으켜 세우려고 노력하는 장면은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죠. 만약에 소가 쓰러지는 소위 쌘 그림을 넣었다면 할아버지는 동물학대로 욕을 먹고 비난을 받았을지도 몰라요. ‘저렇게 가혹할 수 있나. 저건 동물 학대다.’라고 말이죠. 하지만 조금 거리를 두고 바라봤던 덕에 할아버지가 쓰러진 소를 어떻게든 살려 보려는 마음이 전달되어 감동이 배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동아닷컴 이철 기자

대박, 그리고 어색함

‘워낭소리’는 이미 70만 관객을 돌파했다. 독립영화계에서는 경사가 났다. 단 7개 극장에서 시작해 이젠 120개가 넘는 극장에 영화가 걸렸고, 사라져가는 것과 잊고 사는 것에 대한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독립영화의 흥행돌풍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세상의 주목도, 언론의 인터뷰도 아직 어색하고 두렵다고 했다. “하루하루가 믿기지 않아요. 지금 이렇게 인터뷰하고 있는 것도 낯설고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한참동안 이럴 것 같아요.” 그는 영화감독이라고 불리는 것이 아직 어색하다며 자신은 ‘영화감독’이 아니고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독립PD’라고 했다.

방송에서 영화로

어릴 적 부터 그림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처음에는 에니메이션을 시작했다. 연출공부를 하기 위해 외주제작사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이 방송을 시작한 계기였다. 외주제작사 PD로 안 해 본 프로그램이 없다고 했다. “외주 제작 일을 하면서도 계속 옮겨 다녔어요. 좀 더 ‘쌘’ 스승을 찾고 싶어서 우리나라 프로덕션들은 안 가 본 곳이 없을 정도로 많이 옮겨 다녔죠.”

‘워낭소리’도 처음에는 방송용으로 기획되었다. 하지만 전파를 타지 못하고 ‘워낭소리’는 영화로 스크린에서 세상의 빛을 보았다. 사전제작 방식을 택한 것이 그 발단이었다. 사전제작 방식을 택한 이유를 그는 “방송국에서 ‘터치’를 받기 싫어서”라고 답했다. 온전히 그가 하고 싶은 방식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방송국에서 컨펌을 받지 않고 진행하는 사전제작은 그 제작비용을 온전히 제작사 혹은 개별PD가 부담해야 했기 때문에 그는 제작비를 지원해 줄 제작자를 찾아야 했다.

“‘워낭소리’를 만들기 위해서 제작비 지원을 받아야 했어요. 다행히 제작비를 대 준다는 분이 있어 방송용으로 편집해서 내 보내려고 했죠. 그런데 방송국에서 주는 단가하고 제작비가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어요. 그대로 방송으로 내 보내면 빚을 두 세배 지고 끝날 판이었죠. 이러다가는 망하겠다 싶었어요. 제작사 입장에서는 협찬을 받아서 제작비를 맞추고 이윤을 남겨야 하는데 진행이 잘 안된 것이죠. 차라리 이럴 바에는 누구에게 파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고 영화로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거예요. 하지만 결과가 이렇게 좋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어요.”

나는 실패한 독립PD

그는 여의도의 독립PD다. 독립PD들을 ‘독립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주로 시사교양 파트를 담당하는 여의도 주변 프로덕션들에 속한 독립PD들은 열악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고군분투하며 양질의 방송 프로그램들을 생산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인간극장, VJ특공대 등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프로그램들과 각 방송사의 아침교양 프로그램, 다수의 특집 다큐멘터리들이 그들의 손에서 만들어진다.

‘워낭소리’로 제2회 한국독립PD상 특별상을 수상한 그에게 “성공한 진짜 ‘독립군’같다”고 말하자 뜻밖에도 “나는 실패한 독립PD”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외주 PD들은 자신의 의지로 프로그램을 만들기보다는 방송국에서 프로그램의 성격이 결정되면 거기에 맞춰서 납품하는 구조예요. 그렇기 때문에 구성이나 편집권 자체가 독립PD들에게 있지 않아요. 외주제작 시스템은 저 같이 고집 센 사람에게는 맞지 않다고 봐야죠.”

하나의 방송 프로그램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이루어진다. PD와 작가, 그리고 프로그램을 담당하는 선임PD의 뜻이 모아져야 하나의 프로그램이 생산된다. 프로그램의 방향성이나 구성은 온전히 담당 PD의 몫이 아니다. 특히나 외주제작PD들에게는 더 가혹하다. 그들은 스스로 만든 프로그램의 저작권도 갖지 못한다. 계약 단계에서부터 저작권은 방송국에 귀속된다. 그는 이 같은 방송제작시스템에 적응을 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내가 만든 프로그램이 내 것이 되지 못하는 것, 내가 구성해서 편집해서 글을 쓰지 못하는 것이죠. 그래서 차라리 방송 보다는 영화 쪽으로 좀 더 일찍 왔다면 스스로 좀 더 편했을지 몰라요.”

그는 기존 방송제작의 문법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를 ‘독립PD계의 이단아’라고 말했다. “작가가 가장 싫어했던 PD가 이충렬 일수도 있어요. 말을 안 들으니까. 그래서 실패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영화감독' 보다는 '독립PD'

하지만 그는 차선책으로 택한 영화판에서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다. “방송은 되는 아이템, 안 되는 아이템, 호불호가 명확하기 때문에 저 같이 고집 세고 주장이 강한 사람은 방송에서 성공하기 힘들죠. 하지만 이쪽(독립영화)은 좀 더 자유로워요. 표현하는 것도 더 자유롭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여기는 결정적으로 선임PD나 작가가 아닌 관객에게 시사를 받고 평가 받으니 더 좋습니다.”

영화로의 상영이 결정되고 난 후 그는 편집에 더 심혈을 기울이게 되었다고 한다. 관객이 원하는 최선의 구성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만큼 책임이 막중해 진 탓이다. 1년 반 동안 편집을 했다. 그는 그것을 ‘생각의 진화’라고 했다. 끊임없이 허물고 다시 쌓는 과정을 반복했다. “선덴스 영화제에 가기 전까지 계속 수정했어요. 그랬더니 제작자가 제발 그만 좀 하라고 하더라고요. 음악도 계속 바꿨어요. 음악 하는 후배는 ‘형, 나 형이랑 더 이상 힘들어서 못하겠어.’ 그러더라고요.”

‘워낭소리’가 떴다고 영화인이 되겠다는 것은 아니라고 그는 말했다. 방송에서 성공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는 지금도 방송 다큐멘터리로 인정받는 PD가 되고 싶다고 했다. 독립PD라면 누구나 갖고 있을 ‘현실’과 ‘꿈’의 줄타기에서 ‘꿈’이 승리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했다. “그쪽(방송)에서 인정받아보고 싶어요. '독립PD'가 더 좋죠. ‘영화감독’ 보다는요.”

“생활의 여유가 조금 생기셨냐”는 질문에 그는 지금도 집에는 쌀이 없다고 말한다. 꿈을 위해 결혼도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열정적으로 생각한 것들을 ‘쌀이 떨어질 때 즈음’ 한편씩 만들었다고 한다. '워낭소리’ 역시 그러한 열정의 결과물이다.

가슴으로 보는 다큐멘터리 PD

‘워낭소리’ 주인공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젊은 소의 최근 근황을 물었다. 할머니는 여전하시고 할아버지는 지금은 건강이 더 좋지 않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아직도 일을 하고 계신다고 했다. 끊임없이 일하시는 할아버지는 늙은 일소를 닮았다. 일소는 지속적으로 부리다가 놀게 해주면 소는 스스로 ‘내가 끝날 때가 되었나보다, 죽을 때가 되었나보다.’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일하지 않으면 소는 팔려가 죽는다고 생각한다.

“제가 보기에 그 분은 죽기 전까지 일을 하실 것 같아요. 죽기 직전까지 일을 했던 일소를 닮은 거죠. 최근에는 젊은 소를 길들여 부리십니다. 하지만 젊은 소는 빠른데 할아버지가 젊은 소를 따라가질 못해요. 예전 늙은 소와 함께 보여줬던 그 느릿함의 템포는 볼 수 없죠. 그래서 할아버지는 이제 더 이상 졸 수 없어요. 저는 그 모습이 좋은 모습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위해 흥행수입의 일부를 드릴 생각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세간의 지나친 관심을 경계했다.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서 돈 많이 벌었으니까 나 좀 꿔달라, 안주면 위해를 가하겠다는 둥, 협박하고, 이건 옳지 않습니다. 얼마 전 호소문도 드린 것처럼 할아버지, 할머니는 영화 속에서만 관심을 주시고 그 분들의 삶은 지켜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어떤 것을 만들고 싶은지 계획을 물었다. 그는 다큐멘터리의 영원한 아이템인 소수자를 이해하고 누구를 가르치고, 계몽하는 것들은 이미 다른 사람들이 다 하고 있기 때문에 안 만든다고 했다. 그리고 ‘워낭소리’ 같은 일상의 소소한 아름다움을 다큐멘터리로 표현하고 싶다고 했다. “눈에 보이는 것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아름다운 것들을 만들고 싶어요. 머리로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닌 가슴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을 만들고 싶습니다. 저는 마음을 다루는 다큐멘터리 PD가 되고 싶습니다.”

이철 동아닷컴 기자 kino2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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