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4>

  • 입력 2009년 1월 8일 02시 58분


일러스트레이션 김한민
일러스트레이션 김한민
마음은 잊더라도 몸을 기억하는 사랑이 더 지독할까, 몸은 잊어도 마음을 기억하는 사랑이 더 지독할까.

사내는 ‘HOT MOOD’란 글자를 둘러싼 붉은 하트를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인종, 나이, 성격이 제각각인 여인들이 허공에 떴다. “직접 입력!”이라고 속삭인 다음, 왼손 검지에 심은 메모리칩을 다시 하트에 갖다 댔다. 박진숙의 기본 정보와 그녀에 대한 사내의 기억들이 전송되었다. 사내는 깍지 낀 양손을 뒷목에 대고 허리를 한껏 젖혔다. 죽인 여자들을 음미할 때마다 이 자세를 선호했다.

<사이버 섹스에 관한 법>이 2041년 특별시연합시회를 통과한 후 17세 이상 성인 남녀라면 누구나 사이버 섹스를 즐길 수 있었다. 특별시 체제 자체를 반대하는 자연인 그룹은 이 법이 무분별한 성욕을 정당화한다고 비난했지만, 2041년 강간과 낙태율은 2040년보다 오히려 15퍼센트가 줄었다. 범죄 욕망을 사이버 공간에서 해소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힘을 얻었다.

생존 인물과의 사이버 섹스는 상대방의 사전 동의가 필요했다. 동의 없이 몰래 욕정을 불태우다가는 사이버 강간범으로 체포된다. 사내는 진숙에게 미리 허락을 받아두었다.

“불의의 사고가 생기더라도 당신을 영영 기억하고파! 그러니 제발…….”

사내는 여자들과 첫 밤을 보낸 후 이 문장을 관용구처럼 지껄였다. 놀랍게도 열에 아홉은 천박한 속삭임을 쉽게 믿었고 사이버 강간죄에 대한 면죄부를 선물했다.

승인!

사랑을 나눌 공간으로 ‘가을 숲 오두막’을 택한 후 다시 눈을 감았다.

원피스 차림의 진숙이 오솔길로 걸어 나왔다.

“당신만을 위한 춤이에요.”

두 팔을 머리 위로 올린 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그녀의 소원은 발레리나였고, 열세 살에는 유망주로 뽑혀 파리까지 갔었다. 그곳에서 발목이 부서져 복사뼈 아래를 기계발로 바꿨다. 100퍼센트 인간만이 발레리나가 된다는 고전무용계의 내규가 없었다면, 유전형질연구소 귀퉁이에서 유전자 변형 뱀을 키우는 대신 특별시를 순회하며 때론 백조로 날고 때론 줄리엣의 눈물을 떨어뜨렸으리라.

진숙이 양손을 곱게 모아 뻗으며 다가왔다. 마지막 춤사위였다. 그의 손을 잡아당겨 깊이깊이 입을 맞췄다.

“뉴욕특별시로 데려가신다는 약속, 정말이죠?”

“그래, 이번 사업만 마무리되면…….”

사내는 진숙의 손목을 쥐고 오막살이로 들어섰다. 문을 닫자마자 그녀를 안아들고 침실로 갔다. 침대 위로 그녀를 가볍게 던졌다.

침대를 가득 채운 수백 마리 뱀이 사랑에 들뜬 여인을 받고 휘감고 덮었다.

“이리 와요, 내 사랑!”

진숙이 휘적휘적 두 팔을 흔들어댔다.

사내도 침대로 몸을 날려 아랫배를 진숙의 사타구니에 바짝 붙였다. 그녀의 가는 허리가 활처럼 휘었다. 엇갈려 접힌 두 발이 사내의 엉덩이를 죄었다. 사내가 북을 울리듯 엉덩이를 한껏 뒤로 뺐다가 빠르고 힘차게 밀어 넣기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튕겨 오른 뱀들이 진숙의 젖가슴에 비처럼 쏟아졌다. 그들은 정녕 달뜬 두 마리 뱀이었다.

사내가 어깨를 당겨 진숙을 무릎에 앉혔다. 젖꼭지를 문지르고 빗장뼈를 핥으며 그녀의 입이 목덜미까지 스멀스멀 올라왔다. 사내가 턱을 치켜들며 외쳤다.

“물엇! 가자, 아마존으로!”

어깨를 깨물리는 순간, 침대도 뱀들도 진숙마저 사라졌다. 사내가 황급히 눈을 떴다.

“쿠쾅!”

화장실 문을 부수며 단발머리 백인 여자가 뛰어 들어왔다.

“클락!”

사내는 그녀의 주먹을 재빨리 피하며 불청객의 턱을 걷어찼다. ‘77퍼센트 천연몸 23퍼센트 기계몸, 여자’란 침입자에 대한 설명이 스크린에 떴다.

“이 새끼가! 감히 보안청 형사 남앨리스를 쳐?”

앨리스가 괄괄 고함과 함께 달려들었다. 사내는 그녀를 꽉 끌어안은 후 무릎으로 허벅지를 번갈아 후려쳤다. 주저앉은 그녀의 멱살을 잡고 끌어올렸다. 사내는 슬쩍 복도를 살폈다. 아무도 없었다. 오른쪽 기계 팔을 높이 치켜들었다.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는 것이다.

휘익.

그 순간, 황소바람과 함께 토네이도 강철구두가 사내의 뺨을 후려쳤다. 사내는 일어서려 했지만 넘어지고 또 넘어졌다. 팔다리가 심하게 떨렸고 정신마저 가물가물 흐렸다. 새끼손가락 까닥이는 것이 바위를 드는 것보다 힘들 즈음, 단정한 목소리가 사내의 뺨 위로 떨어졌다.

“여기는 대뇌수사팀 은석범 검사다. ‘사건번호 35’, 상황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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