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보 현진건 심훈… 역사와 문학으로 민족의 길 밝히다

  • 입력 2008년 4월 1일 02시 53분


■ 교과서 속에서 만나는 東亞의 사람들

《동아일보는 1920년 창간 이후 88년 동안 조국의 독립과 민주화, 산업화를 위해 민족과 함께 해왔다. 중앙교육진흥연구소, 대한교과서, 금성출판사, 두산, 교학사 등에서 낸 고교 근현대사 검인정 교과서에서는 격동의 역사와 함께 해온 동아일보의 사람들과 사료(史料)적 가치를 지닌 동아일보 지면을 발견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말 만주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했던 김준엽 사회과학원 이사장은 ‘인촌 김성수의 사상과 일화’라는 책에서 “나라 없는 시대 동아일보는 우리 마음속의 정부였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당시 동아일보에 대해 고교 근현대사 교과서가 기술한 내용을 정리했다.》

편집국장 지낸 이광수 2·8선언 이끌어

김성수 송진우 여운형은 해방정국 주도

염상섭 주요한 등 근대문학 대표작 써

‘상록수’는 창사 15주년 기념 공모소설



○ 나라 없는 시대, 정부 역할을 한 동아일보

1920년 동아일보 초대 사장을 지낸 박영효(1861∼1939)는 개화파의 인물로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다. 그는 1883년 박문국을 설치해 최초의 근대적 신문인 한성순보를 발행해 개화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창간 당시 편집감독을 맡았던 양기탁(1871∼1938)도 영국인 베델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발행해 반일 논조를 폈던 언론인이었다. 총독부의 전신이었던 통감부는 베델을 추방하고 양기탁을 국채 보상금 횡령 혐의로 구속하는 등 갖은 탄압을 가했다.

동아일보 창립자인 인촌 김성수(1891∼1955)는 교과서에서 언론인, 교육자, 경성방직을 창립한 기업인, 광복 후 제2대 부통령을 맡는 등 건국 과정에 참여한 정치 지도자로서 다각도로 조명됐다. 오산학교 설립자이자 1919년 3·1운동 당시 기독교 대표였던 남강 이승훈(1864∼1930)은 동아일보 제4대 사장(1924년)을 맡았다.

‘주지(主旨)를 선명(宣明)하노라’라는 동아일보 창간사를 썼던 장덕수(1894∼1947)와 편집국장을 지냈던 소설가 이광수(1892∼1950)는 3·1운동의 계기가 됐던 ‘2·8독립선언’을 이끌어낸 주역으로 소개됐다.

동아일보 출신으로 해방정국을 주도하던 좌우익의 거물급 지도자에 대해서도 대부분의 교과서들이 다뤘다. 인촌 김성수와 함께 한국민주당을 결성했던 송진우(1890∼1945)는 동아일보 사장, 고문, 주필을 지냈으며, 조선인민당을 결성해 좌우합작운동을 벌였던 여운형(1886∼1947)은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동아일보 통신원(1922∼1923년)으로 활동했다. 조선공산당 당수와 북한 부주석을 지낸 박헌영(1900∼1956)도 동아일보에서 판매부 서기, 지방부 기자(1924년)로 활동했다.

○ 문학, 역사, 국학 연구의 요람

일제강점기 당시 언론인들은 문학인이자 역사학자였다. 고교 문학 교과서에 실린 근대 문학작품 중 동아일보 기자들의 작품이 상당수 있다.

동아일보 창간기자였던 소설가 염상섭(1897∼1963)의 한국 최초 자연주의 계열 소설 ‘표본실의 청개구리’ ‘만세전’은 고교 문학 교과서에 대부분 수록돼 있다.

최초의 신체시 ‘해(海)에게서 소년에게’를 쓴 육당 최남선(1890∼1957)은 동아일보 촉탁기자로 활동했고, 한국 최초의 근대적 장편소설 ‘무정’을 발표한 이광수와 최초의 자유시 ‘불놀이’를 지은 주요한(1900∼1979)은 편집국장을 지냈다.

소설 ‘임꺽정’으로 유명한 벽초 홍명희(1888∼1968)는 주필 겸 편집국장(1924∼1925년)으로 활동했다.

영화감독, 소설가, 시인으로 다재다능했던 심훈(1901∼1936)도 동아일보 기자(1924∼1925년)로 활동했다. 1930년대 농촌계몽운동을 배경으로 한 ‘상록수’는 1935년 동아일보 창사 15주년 기념 소설 공모에 당선됐던 작품. 두산 교과서는 “심훈은 시 ‘그날이 오면’이란 작품을 발표하여 이 시대 민족주의 노선을 선명하게 보여주었다”고 평가했다. ‘레디메이드 인생’ ‘탁류’ 등으로 사회 모순을 풍자한 채만식(1902∼1950), 김소월의 스승이었던 시인 김억(1893∼?), ‘국경의 밤’의 시인 김동환(1901∼1958)도 동아일보 기자였다.

1936년 일장기 말소사건 당시 체포돼 일경에 의해 고초를 당했던 사회부장 현진건(1900∼1943)도 ‘빈처’ ‘운수 좋은 날’을 쓴 소설가였다. 편집국장이었던 설의식(1900∼1954)이 일제가 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광화문을 강제로 헐어낸 것을 비판하는 수필 ‘헐려 짓는 광화문’(1926년)도 문학 교과서(두산)에 수록돼 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체포됐던 한글학자 이희승(1896∼1989)은 1960년대 동아일보 사장을 맡았다.

‘광복절 노래’를 작사한 정인보(1893∼1950)는 1927년 이후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활동하며 정약용 이순신 단군 등 우리 역사적 인물에 대한 연구를 활발히 기고했다.

특히 1935년 1월 1일부터 1936년 8월 동아일보가 정간될 때까지 282회에 걸쳐 단군부터 면면이 이어져 온 조선의 정신을 연재한 ‘5천년간 조선의 얼’은 그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의거 호외, 일장기 삭제 보도… 지면이 그대로 史草

근현대사 고교 검인정 교과서는 동아일보의 창간부터 독립운동 민주화운동 등 동아일보와 관련된 역사적 사건들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동아일보의 역사가 한국 근현대사의 흐름과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다.

○ 동아일보의 창간과 탄압 사례 대부분의 교과서는 1920년 동아일보의 창간을 의미 있게 다뤘다. 3·1운동 이후 일제가 문화 통치로 전환하자 민족의 여론을 대변하려는 노력의 산물이었다는 것. 그러나 동아일보는 일제의 극심한 검열과 탄압에 시달렸다. 금성출판사 교과서는 동아일보가 1929∼30년 신문 차압 31회, 기사 삭제 56회를 당했으며 정간도 한 차례 당한 것을 소개했다. 교과서들은 동아일보가 4차례의 발행정지를 당했으며 결국 1940년 일제에 의해 강제 폐간됐다는 사실을 다뤘다.

○ 브나로드 운동 동아일보가 1931년 여름방학 때부터 전개한 ‘브나로드’ 운동은 대부분 교과서에 실렸다. 브나로드는 러시아어로 ‘민중 속으로’라는 뜻. 이 운동은 학생들을 모집하고 전국 각지로 파견해 문맹자에게 글을 가르치고 미신 타파, 금주, 축첩제 폐지 등을 계몽해 민족의 실력을 키우자는 취지에서 비롯됐다. ‘배우자 가르치자 다 함께’라는 구호 아래 5000여 명의 계몽대원이 1300여 지역에서 10여만 명을 상대로 활발히 활동했다. 심훈의 ‘상록수’도 이 운동과 관련된 작품이다. 일제는 이 운동이 민족의식 고취로 이어질 것을 우려해 1935년 강제 중지시켰다.

○ 손기정 선수 일장기 삭제 사건 두산 교과서는 1936년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을 보도하면서 사진을 지운 일장기 삭제사건을 다뤘다. 이 사건으로 동아일보는 무기 정간됐고 사진을 직접 수정한 화가 이상범 이길용 기자를 비롯해 사장 송진우, 주필 김준연, 편집국장 설의식, 사회부장 현진건 등 11명이 체포됐다. 이길용 현진건 등 5명은 다시 언론 기관에 종사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석방됐고 사장 주필은 사임했다.

○ 독립운동 보도 당시 독립운동과 민족의 독립의식 고취를 다룬 동아일보 기사도 교과서들이 사료로 인용하고 있다. 동아일보는 1926년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지고 순국한 나석주 의사의 거사를 호외로 보도했다(두산, 천재교육). 또 서울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순국한 김상옥 의사의 묘지를 찾아 ‘아! 가슴에 품은 그 뜻은 어디다 두고 이제 공동묘지 한 모퉁이에 누웠느뇨’라고 쓴 동아일보 기사를 소개했다(대한교과서).

1937년 함경남도 갑산의 보천보에서 항일 유격대가 경찰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습격했다는 동아일보 기사도 일제의 민족말살 정책으로 우울하던 당시 민중에게 큰 위안이 됐다고 기술됐다(금성출판사, 천재교육).

이 밖에 1929년 3월 인도의 시성 타고르가 3·1운동 10주년을 맞아 지은 시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대에/빛나는 등불의 하나였던 코리아/그 등불 다시 한 번 켜지는 날에/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를 동아일보가 1929년 4월 2일 게재했다는 것도 소개했다(두산).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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