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공립 극장들, 예술은 멀고 돈은 가깝다

  • 입력 2007년 11월 15일 03시 02분


《내년은 세종문화회관 개관 30주년, 서울 예술의 전당이 개관 20주년을 맞는 해다. 국립극장과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공연장으로 꼽히지만 이들을 바라보는 공연계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 9일 서울 정동 세실극장에서 열린 권오규 경제부총리와 공연계 인사들의 간담회에서도 “창작공연을 지원하고 육성해야 할 주요 국공립극장들이 재정자립도를 높이기 위해 대관료를 올리고 수익성 위주의 대관 사업에 치중한다” “이런 환경에선 공연예술이 살아남기 어렵다”는 불만의 소리가 쏟아졌다.》

○ 공연 기획 예산은 수십억, 공연 기획은 어디로?

올해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공연은 100여 편. 이 중 산하단체들의 정기공연을 제외하고 세종문화회관이 자체 기획한 공연은 ‘1000원의 행복’, 어린이 클래식 음악회 ‘피터와 늑대’ 등 12편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뮤지컬 ‘로미오와 줄리엣’ ‘시카고’ 등 흥행 뮤지컬이나 ‘번 더 플로어’ 같은 쇼 등에 공연장을 빌려준 대관 공연이었다.

세종문화회관, 예술의 전당, 국립극장 등 이른바 ‘빅3’ 공연장은 좋은 공연 기획을 명목으로 매년 국가에서 수십억 원의 공연 예산을 지원받는다. 하지만 이 예산을 제대로 집행하지 못하고 있다.

나재암 서울시의원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세종문화회관이 지난해에 서울시로부터 책정받은 공연사업 예산은 97억9000만 원. 이 중 48%에 불과한 46억9400만 원만 썼다. 올해 공연 예산도 지난달 말까지 44%인 39억7900만 원이 집행됐을 뿐이다. 세종문화회관 측은 “공연단체 사정으로 공연이 갑자기 취소된 경우가 있었고 산하단체가 노사 문제로 파업을 하는 바람에 예산 집행률이 많이 낮았다”며 “미집행된 예산은 이듬해 예산으로 이월됐다”고 말했다.

예술의 전당도 지난해 16억 원의 공연 예산이 미집행되는 등 집행률이 68%에 그쳤다. 국회 문화관광위원회 소속 박찬숙(한나라당) 의원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 5년간 예술의 전당은 매년 13억∼23억 원에 이르는 공연 예산을 미집행했다. 지난해의 경우 공연 예산 중 7억여 원은 서초구청에서 부과한 건물 및 토지에 대한 취득세로 전용됐다. 예술의 전당 관계자는 “공연 예산의 일부가 취득세 등에 쓰인 것은 문화관광부의 승인 등 적법한 절차를 밟아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내 최고의 공연장으로 꼽히는 예술의 전당의 경우 올해 전체 공연장 예산 중 공연 예산의 비율은 14.8%인 48억여 원에 불과하다. 5년 전 73억여 원(전체 예산의 25.2%)이었던 공연 예산은 무려 25억 원 가까이 줄었다. 그나마도 모두 집행하지 못한 셈이다.

○ 쉽게 벌고, 실적 올리고

“예술의 전당 재정자립도는 너무 높습니다. 예술성과 공익성을 강화하고 재정자립도를 낮춰야 합니다.” 5월 취임한 신현택 예술의 전당 사장은 취임 기자회견에서 이색적으로 재정자립도를 낮추겠다고 공약했다. 예술의 전당 재정자립도는 80% 선이다.

좋은 공연을 기획해 관객을 많이 불러 모아 재정자립도를 높였다면 칭찬받을 일이지만, 국내 주요 공연장들은 수입이 보장되지 않는 기획공연은 줄이는 반면 대관료나 주차료 인상 등 손쉬운 방법으로 재정자립도를 높이고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예술의 전당 관계자는 “총예산 300억여 원 중 국고로 지원받는 것은 60억 원에 불과하다”며 “나머지 240억 원가량의 수익을 스스로 창출해 내야 공연장을 운영할 수 있는 만큼 그런 부분에 대한 부담이 크다”고 말했다.

세종문화회관의 경우 2004년 재정자립도가 23.3%에서 지난해 30.3%로 올랐다. 같은 기간 공연 예산 집행률은 해마다 감소한 반면 공연장을 빌려주고 챙긴 대관료 수입은 매년 20∼80%씩 목표액을 초과 달성했다.

국립극장 역시 ‘돈 되는’ 뮤지컬에 대극장을 내주고 있다. 올해 초 브로드웨이 뮤지컬 ‘토요일 밤의 열기’ 내한공연이 국립극장 대극장에서 두 달 가까이 이어졌고 여름엔 뮤지컬 ‘캣츠’ 내한공연이 두 달간 장기 공연됐다. 연말에는 ‘명성황후’가 무대에 오르고, 내년 초에는 상업 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가 두 달 동안 공연될 예정이다.

국립극단을 비롯해 국립국악관현악단, 국립무용단 등 나라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순수예술단체가 상주하는 국립극장이 우리 문화를 이끌 기획공연 대신 상업 뮤지컬의 내한공연으로 1년에 서너 달씩 공연장을 채워 ‘국립’이라는 명칭이 무색할 정도다.

민경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국공립극장은 국민의 문화 수준을 향상시키고 예술가들이 창작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되어 주어야 한다”며 “국공립공연장이 이윤을 남기는 데 급급한 현 상황은 본분을 망각한 처사”라고 비판했다.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빅3 대관료 수준은

예술의전당 회당 380만원

세종문화회관은 600만원

공연장이 수익성을 위해 눈을 돌리는 부분은 대관사업. 공연 기획처럼 힘들이지 않고 손쉽게 수익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국립극장, 서울 예술의 전당, 세종문화회관 등 ‘빅3’ 공연장의 경우 독과점이나 다름없다. 서울시내에 객석이 2000∼3000석이 넘는 대극장을 갖춘 곳은 이 세 곳밖에 없어 대작을 공연하려는 기획사들은 이 공연장을 잡기 위해 애를 태운다. 공연 시장의 성장과 함께 최근 5년간 ‘빅3’ 공연장의 ‘파워’는 막강해졌다.

예술의 전당의 경우 올해 공연장 대관료(뮤지컬 기준)는 회당 380만 원으로 2년 전에 비해 21%(80만 원)나 올랐다. 2000년 대관료(215만 원)와 비교하면 176%가 치솟았다. 예술의 전당은 내년에 5%를 더 인상할 계획이다.

세종문화회관은 회당 600만 원(뮤지컬 기준)이다. 2회 공연을 하는 주말의 경우 대관료만 하루에 1200만 원이 넘는 셈이다.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공연했던 한 뮤지컬 관계자는 “비싼 대관료도 문제지만, 세종문화회관의 경우 대관료는 대관료대로 챙긴 뒤 대관 조건으로 심지어 수익의 일정 지분마저 요구한다”며 “극장 빌려 주고 가만히 앉아 대관료와 수익 지분까지 챙기는 것은 공연장의 횡포”라고 비난했다.

대관료는 티켓 가격의 상승으로도 이어진다. 뮤지컬 기획사들은 “거의 2년 주기로 대관료가 오르지만 극장 잡기가 하늘의 별따기인 만큼 울며 겨자 먹기로 대관료를 올려 주고 대신 티켓 가격을 올리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공연장은 “스타 캐스팅 등 배우 몸값이 더 문제지 대관료는 전체 제작비의 10%도 안 될 것”이라고 반박했다.

지난해 세종문화회관이 벌어들인 대관료는 47억1600만 원. 연초 목표액으로 잡았던 36억2200만 원의 30% 를 더 벌었다. 세종문화회관은 2005년에도 역시 목표액의 189%를 벌어 들였다.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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