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46년 제1회 칸영화제 개막

  • 입력 2007년 9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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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제 프랑스 교육예술장관이 “프랑스에서 국제 영화제를 열자”고 제안한 것은 1939년이었다.

7년 먼저 시작해 독보적인 국제 영화제로 자리 잡고 있던 베니스 영화제에 대항하자는 취지였다. 단순한 라이벌 의식의 발로만은 아니었다.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부가 베니스 영화제 참가작 선정에 개입해 ‘예술로서의 영화를 겨룬다’는 순수한 의미를 퇴색시켰다는 사실을 노린 것이었다.

프랑스는 미국과 영국의 지지를 업고 영화제 준비에 착수했다. 먼저 개최 희망 도시들로부터 신청을 받았다. 대서양에 접한 해변 도시 비아리츠, 로마 시대부터 온천지로 유명한 비시 등이 나섰다. 경쟁 끝에 개최권은 ‘태양과 매혹적인 주변 환경’을 내세운 지중해 연안의 휴양 도시 칸에 돌아갔다.

개막일은 9월 1일. 그런데 착착 진행되던 영화제는 바로 이날 초대형급 비상 상황이 터지면서 막을 올리지도 못한 채 취소됐다.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것.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이었다. 세계가 전쟁에 휩싸이면서 후일도 기약할 수 없게 됐다.

전쟁이 끝나자 프랑스 예술인들은 다시 영화제를 추진했다. 1946년 9월 20일 마침내 제1회 칸 국제영화제가 열렸다. 시인 겸 극작가 장 콕토가 직접 제작한 ‘미녀와 야수’를 비롯해 18개국의 영화가 출품됐다.

막상 시작은 했지만 그 뒤에도 곡절은 많았다. 1948년, 1950년에는 예산이 없어 영화제를 열지 못했다. 1968년에는 프랑스를 뒤흔들던 학생혁명의 바람이 칸에도 불어 닥쳤다. 일부 감독들이 혁명을 지지한다는 의사 표시로 출품작을 철회했다. 루이 말, 로만 폴란스키, 장뤼크 고다르 같은 열혈 감독들은 영화 상영을 몸으로 막기도 했다.

초기 칸 영화제는 상을 놓고 경쟁하는 행사라기보다는 영화 토론회에 가까웠다. 출품작 대부분에 이런저런 이름을 붙인 상이 돌아갔다. 지금은 전 세계에서 취재진만 4000여 명이 모여들 정도로 규모가 커졌고 경쟁도 치열해졌다.

출품작들이 경쟁을 벌이는 영화제 기간에 시내 곳곳에서도 ‘전쟁’이 벌어진다. ‘숙박 전쟁’ ‘교통 전쟁’이다. 인파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지만 사람들의 표정은 밝다. ‘태양과 매혹적인 환경’을 가진 칸의 매력, 그리고 영화가 주는 즐거움 때문이다.

칸 영화제 출범 당시 장 콕토는 이 영화제를 이렇게 정의했다.

“이것은 하나의 작은 우주다. 세상 사람들이 직접 만나고, 같은 언어로 소통을 한다면 세상은 이런 모습의 우주가 될 것이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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