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75년 美10대 소녀 부모살해

  • 입력 2007년 6월 28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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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아. 전혀. 너도 그럴 필요 없어. 릴랙스(Relax).”(마를린이 남자친구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한 부부가 사라졌다. 신고를 한 건 남편의 동업자. 일주일간 소식이 끊겼다. 집안은 어지러웠고 열일곱 살 딸 마를린은 모른다고 했다. 사건은 단순 실종으로 미궁에 빠졌다.

딸의 행동이 수상했다. 자꾸만 말을 바꿨다. 처음엔 여행 갔다더니 이윽고 아빠가 엄마를 죽였단다. 신문 인터뷰에선 엄마가 킬러라고 했다. 재개된 수사, 그리고 자백.

“내가 둘 다 죽여서 태웠어요.”

악마의 대리인은 남자친구 척 라일리였다. 1975년 6월 28일 마를린은 계획대로 아버지 짐 올리브와 쇼핑을 하러 간다. 혼자 남은 엄마는 척의 장도리와 부엌칼에 목숨을 잃었고, 때마침 돌아온 짐은 총알 세례를 받았다. 연인은 시체를 인근 야산에서 불태운 뒤 일상으로 돌아왔다.

이유는 어이없었다. “엄마는 늘 ‘친엄마처럼 창부가 될 거냐’며 괴롭혔다.” 히스테리가 심했던 입양모 나오미. 마를린에겐 단지 ‘제거해야 할’ 적이었다. 망나니 남자친구는 자신을 편하게 해 줄 좋은 도구였다.

제대로 된 연인도 아니었다. 경찰은 “필요에 의한 계약적(contractual) 관계”라고 발표했다. 척은 마약을, 마를린은 섹스를 제공했을 뿐. 즐기는 데 방해가 됐기 때문에 ‘처리’한 것이다.

미국 사회는 충격에 빠졌다. 평범한 가정에서 잔혹한 존속살인이라니. 미국 중산층의 ‘아메리칸 뷰티’가 무너졌다. 곪을 대로 곪은 ‘미즘(Meism)’의 표출이었다.

풍요로움에 드리운 그림자. 1970년대 미국은 처음으로 1등을 놓친 우등생이었다. 개국 이후 처음으로 베트남전의 패배를 맛보았다. 발전 일로였던 경제마저 일시적 공황을 맞았다.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의 몰락.”(니올 퍼거슨) 타인에 대한 관심은 옅어졌다. 자기 것 챙기기에 바빴다. ‘Me Decade’가 도래한 것이다.

이기주의의 팽배 속에 화려한 경제성장에만 집착했다. 개탄은 잦아들고 재산 불리기에 골몰했다. “1970년대 미국인의 머릿속엔 부동산뿐이었다. ‘집은 샀느냐, 집은 얼마냐’가 대화의 전부였다”(책 ‘페이퍼 머니’) 마치 어느 사회처럼.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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