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37년 백백교 피해자 유골 발굴

  • 입력 2007년 6월 8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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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역사상 가장 무서운 범죄라는 기록으로, 다른 자랑할 것이 없는 우리는 후세에 가서도 이 부끄러움을 무엇으로도 씻을 수 없게 되었다.’(본보 1940년 3월 20일자)

‘조선 역사상 전무후무한 범죄’라는 백백교(白白敎) 사건.

죄상이 너무나 흉포해 마치 출처 불명의 사담(史談)처럼 들리지만 이 사건은 안타깝게도 본보도 여러 차례 대서특필했던 실화다.

“곧 심판의 날이 온다. 너희가 전국 53곳의 피난처에 가 있으면 난 금강산에 은거한다. 그때 천부(天父)님이 내려오셔서 난 임금이 되고 너희는 헌금을 바치는 순서대로 벼슬을 받아 날 모시게 된다.”

백백교의 교주 전용해와 그의 일당들은 무지몽매한 농민들에게 불로불사(不老不死)를 시켜 주고 세상이 자기 천하가 되면 고관대작(高官大爵)의 관직을 준다고 했다. 또 머지않아 ‘노아의 홍수’ 같은 심판이 오면 교도들만 건져 주겠다는 등 온갖 허무맹랑한 말로 사람들을 미혹했다.

물론 하나같이 다 거짓말이었다.

그들은 남녀 신도들의 고혈을 짜 재산을 통째로 상납하게 하고 돈이 없으면 딸이라도 바치게 해 성적 노예로 삼았다. 또 자기의 정사(情事)를 여신도들이 지켜보게 하고는 이를 ‘신(神)의 행사’라고 포장했다.

이에 불만을 가지는 교도가 있으면 가차 없이 죽여 버렸다. 이때 살인을 담당한 간부들은 스스로를 ‘벽력사(霹靂使)’라고 불렀다.

당시 본보 보도에 따르면 일본 경찰은 강원 평강, 경기 연천 등을 돌아 1937년 6월 8일 양평 지역에서 시체 발굴 작업을 계속했다. 이때까지 발견된 유골이 무려 380구. 백백교 일당은 실로 ‘인간 백정’들과 다름없었다.

경찰은 이 초대형 사건을 조사하면서 3만 장이 넘는 조서를 작성했고 24차례 현장조사를 나갔다. 각 읍면에서는 시체 처리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조선총독부에 자금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고 한다.

전모가 탄로 나자 전용해는 산속으로 들어가 자살한 것으로 전해진다. 나머지 핵심 간부 12명도 1940년 경성(京城) 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본보는 백백교 사건을 ‘미신에 가까운 맹목적인 신앙과 무식(無識)이 낳은 범죄’라고 규정했다. 실제 이 사건의 피해자 중 제일 ‘유식한’ 사람은 소학교 졸업생이었다고 한다. 암울한 일제시대를 더 어둡게 만든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참극이었다.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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