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만나는 시]엄재국 ‘녹, 봄봄’

  • 입력 2007년 3월 16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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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 봄봄 - 엄재국

서너 살 계집애가 맨땅에

사타구니 사이로 녹물을 찔끔 흘리는 봄

허공이 녹슬면 꽃이 피는가

홍매화 가득한 뒤뜰 그쪽 허공이 녹슬었다

어머니를 땅에 묻고

한 사람의 생애를 갈무리하는 무덤이

너무 얕아 슬펐던 그 슬픔도 녹슬었다

일순간 무너지는 건물처럼 봄은 온다

무너지는 것들,

삭아가는 것들의 힘이 폭발하며 오는 봄을

지탱할 수 있는 건 어디에도 없다

잎 몇 장 달아 폐허를 확인하는 고목

파편처럼 튀어오른 희미한 낮달의 미소

죽은 나무가 거느리는 풍경을 새기며

봄은 지금 진공상태를 건너고 있다

지구의 중력이 미치지 않는 저쪽,

허물어진 건물의 철근 같은 잎 없는 나무들

드러난 허공의 늑골들

그 늑골에 꽃잎이 묻어 허공은 한 번 더 녹슬고

부서진 봄 몇 조각 거두는 영산홍

저 노회한 꽃잎은 땅 위에서 얼굴이 붉다

봄을 부식시키는 빛깔이 지천으로 번지는 봄

오줌 누는 계집애의 보이지 않는 경련처럼

녹슨 꽃잎을 밀어내고 바르르 전율하는 봄

- 시집 '정비공장 장미꽃'(애지) 중에서

모든 낡은 것들이 새 몸을 얻는 게 봄인데, 저 시인은 봄을 무너짐이라 하는구나. 쇠붙이 따위를 맥없이 부식시키는 게 녹인데, 저 시인은 꽃을 녹이라 하는구나. 아하, 봄을 무너짐이라 하니, 더 이상 무너질 것이 없구나. 꽃을 녹이라 하니, 더 이상 녹슬 것이 없구나. 녹들도 꽃처럼 붉구나, 새순도 슬픔처럼 푸르구나. 어쨌든 만화방창!

- 시인 반 칠 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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