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연어族이 돌아온다

  • 입력 2006년 6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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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 엑스포’에서 상담 중인 학생들. 해외에서 공부를 마친 뒤 귀국해 직장 생활을 하는 연어족들이 한국 사회에서 특별한 집단으로 주목받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유학 엑스포’에서 상담 중인 학생들. 해외에서 공부를 마친 뒤 귀국해 직장 생활을 하는 연어족들이 한국 사회에서 특별한 집단으로 주목받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2004년 취임한 강정원 국민은행장은 동년배에 비해 특이한 성장 이력이 눈에 띄었다. 그는 외환은행 해외지점에서 근무한 부친을 따라 외국을 돌아다니면서 초등학교는 일본, 중학교는 한국, 고등학교는 홍콩, 대학과 대학원은 미국에서 나왔다.

이후 씨티은행 뉴욕 본사에서 9개월 근무한 뒤 씨티은행 서울지점, 뱅커스트러스트 한국대표, 도이치뱅크 한국대표, 서울은행장을 지내는 등 줄곧 한국에서 보냈다. 학창 시절은 해외에서, 직장 생활은 한국에서 하고 있는 것이다.

강 행장처럼 해외에서 성장기를 보낸 뒤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강 행장이 성장할 당시에는 드물었지만 최근 외교관과 기업체 해외 주재원의 자녀와 조기 유학생들이 급증하면서 어릴 때부터 해외 생활을 한 이들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른바 ‘연어족(族)’으로 불린다. 하천에서 부화해 바다(외국)로 나갔다 다시 부화한 곳으로 회귀하는 연어의 특성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들은 중고교를 해외에서 다니고 국내 대학을 졸업하거나 외국에서 대학까지 졸업한 뒤 취업을 국내에서 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들의 장점은 글로벌 시대의 요건인 영어 실력과 국제 감각, 현지 문화에 대한 높은 이해력 등이다. 그러나 이들은 현지에서 취업할 기회가 있음에도 한국으로 돌아오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또 그들의 한국 생활은 어떠할까.

○ 미국 대학에서도 인종이나 출신지별로 모여

이들이 돌아오는 이유 중 하나는 현지 주류 사회로 진입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현지 명문대를 졸업하고도 보이지 않는 차별 때문에 취업을 꺼리거나 직장에 들어간다고 해도 현지인들의 텃세를 이겨 내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IBM 비즈니스컨설팅서비스 SCM팀의 정동민 컨설턴트는 “대학 시절 주류층 백인 학생들 간에도 출신 지역이나 앵글로색슨계 아일랜드계 유대계 등 인종이나 종교를 배경으로 배타적인 사교 그룹이 형성되는 것을 보며 동양인이 미국의 주류 사회에 진입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실감했다”며 “고교 때는 친구의 90%가 백인이었지만 대학 때는 동양인 친구가 더 많았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작지만 강한 대학’으로 손꼽히는 보우든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그는 “졸업할 무렵 몇몇 글로벌 기업의 본사에 합격했으나 불리한 처지에서 경쟁하기보다 한국이 더 나을 것 같아 한국IBM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현대·기아자동차그룹 마케팅총괄본부 해외시장조사팀의 이지은 대리는 공기업 주재원인 아버지를 따라 미국에서 중고교를 5년 다닌 뒤 한국외국어대 영어과를 졸업했다. 그는 고교 시절부터 외국인들이 미국의 좋은 직장에 들어가 승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 대리는 “1990년대 중반 미국 명문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현지 기업에 들어간 사람이 영주권을 보증해 준다는 이유로 번번이 성과보다 낮은 연봉을 제시하는 회사에 억울해하다 한국의 기업으로 옮기는 사례를 보며 한국행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딜로이트 안진회계법인 세무자문본부의 최영란 컨설턴트는 세계은행(IBRD) 국제통화기금(IMF)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 국제경제기구에 들어가지 못해 한국으로 온 경우. 그는 사업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 고교 1학년 때 필리핀으로 간 뒤 국립필리핀대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필리핀에는 국제적 수준의 기업이나 연구기관이 거의 없는 데다 미국 유럽 홍콩 등에 있는 국제경제기구로 진출하는 것도 여의치 않아 한국에 왔다”며 “한국은 국제화가 나름대로 잘 돼 있고 영어 실력을 발휘할 기회도 많다”고 말했다.

○ 현지 문화에 대한 이해가 경쟁력

연어족의 영어 실력이나 국제 감각은 한국 사회에서 경쟁력의 원천이다. 특히 청소년 시절에 외국 생활을 한 이들은 영어가 유창할 뿐만 아니라 현지 문화와 정서에 대한 이해력도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고교 3년 초에 미국에서 돌아와 고려대 경제학과를 나온 대우증권 국제조사팀 박성빈 연구원은 애널리스트 경력이 2년에 불과한데도 해외투자자를 담당하는 업무를 맡고 있다. 미국 싱가포르 태국 등에서 10여 년간 청소년기를 보낸 그는 현지 음식이나 파티 문화를 잘 이해하고 있는 데다 영어 농담에도 익숙해 외국인 투자자들과 사귀는 데 비교적 유리한 편이다.

그는 “거래 중인 월스트리트의 펀드매니저에게 미국에서 다닌 고등학교의 농구팀 이야기를 하다 그가 라이벌 학교 출신인 것을 알게 돼 친해졌다”며 “이를 계기로 동네의 레스토랑, 쇼핑 센터, 축제 등에 대한 대화를 주고받으며 유대를 강화했고 이젠 업무 외적으로도 전화와 e메일을 나누며 정보를 얻고 있다”고 말했다.

현대차그룹 이 대리의 경우도 현지 문화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외시장조사팀에서 활약하고 있다. 그는 이 팀에서 외국의 청소년과 젊은 소비자 트렌드 조사에 참여하고 있다.

그는 “미국 청소년들이 고교 때부터 운전을 하면서 자동차를 사물함으로 활용한다는 것을 본 경험을 살려 노트북PC 신발 운동복 휴대전화 책 농구공을 각각 수납할 수 있는 공간을 내부와 트렁크에 만들자는 제안을 해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외국인과 교포들이 많은 국내 외국계 기업에선 이런 연어족의 체험을 활용할 기회가 많지 않을 것 같아 지금 회사를 선택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연어족들의 한국 생활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청소년 시절 경험한 외국 문화와 한국 직장 문화의 차이로 인한 어려움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연어족들은 상명하복 분위기, 잦은 술자리, 어려운 한자 사용, 지나친 형식 갖추기 등을 한국 직장 생활의 어려움으로 꼽는다.

미국에서 중고교와 대학을 나온 이모 씨는 “고위층에 제출할 보고서에 일부러 한자를 섞어 쓰고 글자체와 표지 그래픽에 많은 정성을 기울이는 형식주의가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다”고 말했다.

외국과 한국 등 양쪽에 모두 적응하지 못한 이들도 있다. 중3 때 미국으로 건너가 주립대를 졸업한 김모 씨는 한국의 벤처 기업에 취업했으나 잦은 술자리와 불규칙한 퇴근 시간 때문에 상사와의 갈등 끝에 1년 만에 회사를 옮겼다. 이 회사에서도 적응을 하지 못한 그는 미국으로 가서 취업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그는 3년째 국내에서 백수로 지내고 있다.

○ 인적 네트워크를 위해 국내 대학으로

연어족들이 꼽는 또 다른 한국 생활의 어려움 중 하나는 학창 시절을 해외에서 보낸 탓으로 ‘동문 네트워크’가 빈약하는 점이다. 미국 보우든대를 나온 정 컨설턴트는 “한국인들이 적은 고교와 대학을 나오는 바람에 사회에서 동문을 만나기 어려워 인적 네트워크를 넓힐 수 없다는 점이 아쉽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에서 어학연수생들이 같은 대학이나 고교 출신이란 이유만으로 ‘형, 동생’ 하며 쉽게 친해지는 모습이 부러웠다”며 “한국 내 인적 네트워크를 넓히기 위해 연세대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중고교를 해외에서 마친 이들이 한국 대학을 선택하는 이유 중 하나가 인적 네트워크를 쌓기 위해서다. 홍보대행사 ‘시소컴’ PR팀의 이현지 씨는 기업체 주재원인 아버지를 따라 초등학교 때 인도네시아로 가서 고교 까지 현지 국제학교를 졸업한 뒤 대학은 고려대 언어학과를 나왔다.

이 씨는 미국에서 대학을 나와 한국에서 사회 생활을 하겠다고 했으나 부모는 학연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한국 대학을 추천했다.

그는 “하버드나 예일 등 최고 명문대가 아니라면 동문이 많은 한국의 명문대가 사회 생활에 더 유리할 것이란 부모의 말을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다”며 “사회 생활을 하면서 대학 동문을 만나면 반가움이 앞서고 업무 협조도 잘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박 연구원도 인맥의 가치를 강조하는 부모의 뜻에 따라 고교 3년 초에 귀국했다. 그는 “사람들이 처음 만날 때 출신 대학과 고교를 물은 뒤 동문이면 더 우호적으로 대한다”며 “고3 때는 자율이 거의 없는 학교 분위기가 너무 싫어 후회도 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 외국인에 대한 편견을 줄일 수 있어

연어족은 생활 체험을 통해 외국인에 대한 편견을 바로잡을 수 있는 것도 경쟁력의 원천 중 하나라고 말한다. 외국의 문화를 바르게 이해함으로써 글로벌 시대의 덕목인 열린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시소컴’의 이 씨는 “현지 체험이 없었다면 동남아 사람들은 게으르다고 생각했을 텐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며 “이런 경험이 소중하기에 가능하면 내 아이도 연어족으로 키우고 싶다”고 말했다.

최 컨설턴트는 “필리핀인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가진 한국인이 많은데, 나는 오히려 대학에서 같이 공부한 학생들의 지적 수준과 성실성 등 긍정적인 면을 더 강조한다”며 “이 같은 편견을 줄이는 일도 연어족이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정 컨설턴트도 “미국인들이 성적(性的)으로 문란하지 않으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물론 그런 이들도 있지만 미국을 이끌어 가는 상류층에는 청교도식 생활 방식을 유지하는 이도 많고 대학에서 더 열심히 공부한다”며 “이들은 단순히 돈보다 국제 사회에 기여하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미국인들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글=이세형 기자 turtle@donga.com

그래픽=이진선 기자 geranum@donga.com

“연어족? 이렇게 생각한다”

▽경희대 사회학과 박희제 교수=한국과 외국의 언어와 문화를 동시에 이해하는 연어족은 외국과의 연결고리 역할에 적합한 선택받은 집단이다. 현재는 주로 기업체에서 이들의 활동이 부각되지만 앞으로는 외교 통상 국방 등 정부 영역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영어와 해외 경험만으로 지나치게 우대받는다는 주장도 있지만, 앞으로 연어족이 늘어나면 이들 간의 경쟁이 치열해져 옥석이 구별될 것이다.

▽한양대 국제학부 김연규 교수=토론 교육과 다른 문화에 익숙해 유연한 사고를 가졌고 자신이 살던 나라의 경제와 정치를 잘 안다는 게 강점이다. 그러나 이념 갈등이나 부동산 문제 등 한국의 시사 문제에 대한 지식과 고급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이 일반 대학생들에 비해 부족하다. 한국식 예의범절에도 익숙하지 않다. 중요한 점은 앞으로 연어족이 더 늘어날 것이란 점이다. 이들이 한국 대학과 기업에 제대로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방법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

▽고려대 사회학과 윤인진 교수=글로벌 시대에 연어족이 한국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은 많고, 이들이 늘어나는 것도 바람직하다. 다만 연어족은 외국에서 살았고 영어를 잘한다는 이유만으로 순수 국내파가 ‘하늘에 별따기’로 꼽는 명문대와 일류 회사에 상대적으로 너무 쉽게 들어가는 것 같다. 이런 경향이 지나쳐 연어족을 새로운 특권층으로 인식하는 사회적 위화감이 조성되어선 곤란하다.

▽LG전자 인사팀 공효식 과장=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는 데 필요한 성장 동력으로 보고 있다. 과거에는 이들에게 한국식 직장 문화에 ‘알아서 적응하라’는 요구를 많이 했지만 최근에는 이들이 친근감을 느낄 수 있는 분위기를 먼저 조성하라고 부서장 등에게 권하고 있다. 해외 업무의 비중이 커지면서 입사 초부터 인기 부서에 배치되는 이도 많다. 그러나 회사 생활을 오래해도 한국식 공동체 의식이 부족해 마찰을 빚는 경우가 종종 있다.

▽SK 이현석 인력팀장=외국인 고객을 상대하는 해외 로드쇼 같은 업무에서 연어족 출신 사원들을 많이 활용하고 있다. 한국에서만 지낸 사람들보다 자기 의사 표현이 분명하고 사고방식도 긍정적인 게 큰 장점이다. 하지만 영어 실력과 해외 경험만을 지나치게 내세운 나머지 정작 업무 능력은 떨어져 회사 생활을 할 때 고생하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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