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옥 감독 “노력 열정 최은희가 내 영화의 전부다”

  • 입력 2006년 4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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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보 단독 입수한 신상옥 감독 ‘마지막 인터뷰’

11일 타계한 신상옥 감독은 병세가 악화되기 시작하던 2월 중순 경기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 자택에서 생애 마지막 인터뷰를 하고 자신의 작품세계와 삶에 대한 거장의 소회를 소상히 피력했다.

6월 24일 경기 남양주종합촬영소 내에 문을 열 ‘신상옥 기념관’ 개관식을 기념해 한국영화인복지재단(이사장 정진우)에서 출간하는 ‘위대한 영화인 신상옥’에 싣기 위한 것이었다. 영화평론가 박현신(추계예대 영상문화학부 강사) 씨가 진행한 이 인터뷰에서 신 감독은 ‘영화인 신상옥’을 이루는 요소로 “노력과 열정, 창의력 그리고 최은희와 ‘신 필름’”을 꼽았다. 다음은 본지가 입수한 신 감독의 마지막 인터뷰 주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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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재미있고 감동적이어야 해요”

―영화감독으로서 감독님만의 특별함은 무엇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어린 시절부터 영화를 남달리 좋아했어요. 영화를 보다 보니 기술적인 것을 넘어 보는 사람이 감동을 받고 재미를 느끼게 하는 영화를 만드는 것을 생각하게 했어요. 내가 미술을 전공해서 구도에 신경을 많이 썼어요.”

―감독님의 영화는 대부분 근대와 전근대적 사고가 공존합니다. 어느 한쪽을 비판하는 것으로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유교적인 소재를 많이 찍었는데, 솔직히 얘기하면 그것은 유교를 비판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숭상하는 거예요. 유교의 좋은 점을 클로즈업하는 거예요.”

―혁명적 인물(김옥균, 대원군, 이준 등)에게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남자들의 영화를 많이 한다고는 했어요. 저는 의지를 가진 남자들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았어요.”

―홍콩에서 영화사를 갖고 계셨습니다. 한국영화의 세계화를 염두에 두신 건가요.

“그런 것도 있어요. 그리고 검열 때문에 영화를 만들어도 국내에서 개봉이 안 되니까, 내가 영화사 만들어 밖에서 찍고 한국에 들여오려고 했어요.”

―많은 월북 예술가가 북한에서 예술가로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지 못한 것에 비해 감독님께서는 영화를 계속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요. 대부분의 월북 예술가는 그들의 예술을 계속 이어 나가지 못했어요. 그러나 그들과 다르게 나는 좀 특별한 경우였어요.”

―‘영화인 신상옥’을 이루는 요소는 무엇입니까.

“나 자신만을 말한다면 노력과 열정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중요한 것은 창의력이지요. 또 다른 요소는 최은희와 ‘신 필름’이라고 생각해요.

○ “감독은 예술적 정신이 있어야 해요”

―감독님께서 좋아하는 감독은 누구인가요.

“찰리 채플린과 나운규를 좋아하고 윌리엄 와일더와 프레드 진네만을 좋아해요. 채플린과 나운규는 제작과 감독, 배우를 같이한다는 점에서 그들의 예술적 에스프리(esprit·정신)를 존경해요.”

―최근의 한국영화 중에서 주목하신 작품이 있다면….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가 잘 만들어졌어요. 남자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는 점과 영화적 소재는 좋은데, 리얼리티가 부족한 것 같았어요.”

―감독님의 최근 관심은 뮤지컬에도 있는 것 같습니다. 뮤지컬의 매력은 뭔가요.

“뮤지컬도 예술의 한 형식이에요. 스펙터클하고 심미적인 미장센을 구사할 수 있고 음악과 무용 등 다양한 연출을 할 수 있어요.”

―계획 중인 영화 ‘칭기즈칸’과 ‘꽃제비’(가제)는 어떻습니까?

“‘칭기즈칸’은 계속 관심을 가진 세계적 테마였어요. 시나리오가 준비되었는데 요즘 TV에서 수입해 시리즈로 방영하니까 막상 영화로 만들어졌을 때는 관심이 떨어질 것 같아요. ‘꽃제비’는 중국과 북한의 경계에서 생활하는 청소년들의 이야기인데, 사회성 있는 좋은 영화가 될 거예요.”

―영화감독의 자질에 대해 말씀해 주신다면….

“감독은 미술이든 음악이든 문학이든, 그것이 무엇이든 하나에 통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거기에는 에스프리가 있어야 해요.”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 신상옥 감독의 작품 세계

신상옥 감독의 영화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있었다. 그 손은 특히 1960년대 수많은 ‘고무신 관객’을 진공청소기처럼 극장으로 빨아들였다. 그 ‘보이지 않는 손’의 정체는 미학적 완성도와 대중적인 감각의 경계선에서 그가 보여 준 절묘한 줄타기라고 할 수 있다.

신 감독은 모든 장르의 영화를 다 잘 만들어 보려는 욕심이 강했다. 그리고 자신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확신을 늘 가졌다. 그가 장르적으로는 코미디물만 제외하고 역사극이나 전쟁물, 멜로드라마, 공포물, 액션물을 넘나들고 내용적으로도 문예영화와 사회성 짙은 드라마, 대중영화를 자유롭게 오갔던 것은 이런 영화적 열정과 욕망의 발로다.

연출 데뷔작인 ‘악야’(1952년)로 시작된 신 감독의 1950년대는 영화적 기술과 미학의 완성도를 추구한 시기다. 특히 그를 톱스타 최은희와 만나게 한 영화 ‘코리아’(1953년)는 비록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한국의 역사를 소개한 해외 홍보용 영화였지만 각 숏(shot)에 리듬을 살린 편집 기술이 돋보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시절 신 감독은 자신의 영화사를 운영하는 동시에 직접 제작 편집 각본 연출 기획 등을 아우르면서 영화사 조직의 전문성과 분업화된 제작 시스템을 갖추어 나가기 시작했다.

1950년대 후반 신 감독의 영화들은 최은희를 주인공으로 전쟁미망인 문제나 결혼관, 연애 풍속도처럼 당시 여성들이 가진 삶의 문제를 다룬다. 신 감독은 여주인공으로 하여금 영화 속에서 전통적 가치를 따르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러한 가치들의 불합리성과 억압성을 부각시켰다.

신 감독은 한국영화의 황금기인 1960년대에 전성기를 누렸다. 그의 전성기는 1960년 설립한 ‘신 필름’과 함께 시작됐다. 당시 신 필름의 영화가 나오면 다른 제작사들이 개봉 시기를 미뤘을 정도로 신 필름의 위세는 대단했다.

‘성춘향’(1961년),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년), ‘연산군’(1961년)과 같은 1960년대 초반 영화들이 흥행과 작품성에서 모두 성과를 거두면서 그는 영화에 재능이 있는 인재와 자본력 같은 풍부한 제작 인프라를 갖출 수 있었다. 1964년에는 공군 조종사들의 전우애와 사랑, 조국애를 다룬 ‘빨간 마후라’를 감독해 흥행 대박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의 영화들이 이어간 흥행 고공행진은 1975년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당시 영화 ‘장미와 들개’의 영화 선전용 예고편에 검열 미필 장면이 삽입되었다는 이유로 1975년 11월 신 감독 영화사의 등록이 취소당했다. 그는 그동안 구축해 온 거대한 영화 산업 시스템이 몰락하는 장면을 지켜봐야 했고, 이후 국내 작품 활동이 어려워지자 홍콩과 미국으로 진출해 해외에서 만든 영화를 역으로 한국으로 들여오려고 시도했다.

신 감독이 무려 20여 년간 한국영화의 중심에 설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영화 전문가들은 신 감독이 자주 쓰던 단어 ‘에스프리(예술혼)’에서 그 해답을 찾는다. 대중이 흥미진진하게 볼 수 있으면서도 예술적 향취가 깃들어 있는 자신만의 영화적 DNA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위대한 영화인 신상옥’을 집필한 영화평론가 박현신 씨는 “신 감독이 앞서가는 사상을 가진 모던한 감독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열녀문’ 같은 작품에서 보듯 그의 작품에는 보수적이고 유교적인 냄새가 숨어 있다”면서 “그는 ‘대원군’ 같은 작품을 통해 남성성 짙은 영웅의 세계를 추구하는 한편으로 전통의 미덕과 유교적인 여성상을 보이지 않게 추구했다”고 평가했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 정진우 감독의 회고 “인간을 고민한 자유인”

“어찌 보면 신상옥 감독이 겪은 모든 비극은 그가 선구자여서 발생한 일들이에요.”

신 감독 빈소의 호상(護喪·초상에 관한 모든 일을 맡아 살피는 사람)을 맡은 정진우(68·영화감독·사진) 한국영화인복지재단 이사장은 12일 이렇게 말했다.

정 이사장은 학생 때인 1955년 신 감독 영화에 엑스트라로 참여하며 신 감독과 첫 인연을 맺은 후 수십 년간 동고동락해 왔다.

“19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에 이르기까지 국내 대부분 영화인들의 꿈은 ‘신상옥을 뛰어넘는 것’이었어요. 감독이자 제작자였고 배급업자이면서도 카메라 기술자였던 신 감독은 ‘영화감독’이라기보다는 총체적인 ‘영화인’이었습니다.”

그는 “신 감독은 격식에 신경을 쓰지 않는 자유인이었다”면서 한겨울 영화 촬영장에 맨발에 구두를 신고 나타났던 일과 1970년대 외국영화 수입 쿼터를 둘러싼 비리를 다룬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할 때도 티셔츠 차림이었던 것을 회고했다. 그는 “일부 영화 평론가들은 신 감독의 영화를 단순 상업영화로 폄훼하기도 하지만 ‘성춘향’이나 ‘연산군’이 그렇듯 신 감독의 영화에는 늘 ‘인간’과 ‘고민’이 들어 있었다”고 말했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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