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14년 소설가 오영수 출생

  • 입력 2006년 2월 11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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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오영수(吳永壽)가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한 때는 1950년대다. 전후(戰後) 현실의 참담함과 궁핍함이 그 시기 대부분의 문학 작품에 고스란히 반영됐지만, 오영수의 소설은 이런 경향에서 비켜나 있다. 그의 많은 소설은 향토적인 정서를 담고 있다. 현실 도피적이라는 지적도 있지만, 토착적인 분위기는 오영수 소설의 뚜렷한 특징이 됐다.

오영수는 1914년 2월 11일 울산 울주군 언양면에서 태어났다. 언양은 자연 경관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고향이 작품 세계의 모태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집안이 어려워 보통학교를 졸업한 열네 살 때부터 우체국 사무원, 면사무소 서기 같은 일을 하면서 가계를 도와야 했다. 20대에는 돈을 벌기 위해 만주로 건너가기도 했다.

1943년 교사였던 아내가 부산 동래의 일광보통고등학교로 전근해 그곳에서 살게 됐다. 동래는 그에게 매우 중요한 문학적 계기가 된 곳이다. 바닷가에서의 생활은 오영수의 대표작인 ‘갯마을’의 모티브가 됐다. 작가의 길을 걷게 된 중요한 만남도 이뤄졌다. 당시 동래에 있던 소설가 김동리의 형 김범부와 교유하면서 김동리와도 인연을 맺었다. 그는 1949년 김동리의 추천으로 잡지 ‘신천지’에 ‘남이와 엿장수’를 발표하며 소설가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동래를 떠난 것은 6·25전쟁 와중의 서울 수복 후다. 서울로 올라와 시인 박재삼, 평론가 조연현 등과 함께 문예지 ‘현대문학’을 창간했고 초대 편집장을 맡았다.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며 왕성하게 소설을 썼지만 오영수는 도시 체질이 아니었다. 대부분 그의 작품은 외딴 두메산골이나 바닷가 어촌이 무대였으며, 도시가 배경인 소설은 도시의 어두운 부분을 주로 다루었다.

향수에다 육신의 피로까지 겹치자 1977년 낙향했다. 몸을 추스르고 정신을 가다듬어 창작에 전념했다. 이듬해 소설집을 펴내는 등 힘이 붙는 듯했으나 1979년 1월 ‘특질고(特質考)’ 사건이 터졌다. 각 지방의 특질을 향토적 차원에서 고찰한다는 이 글이 특정 지역 사람들을 비하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커다란 파문이 일었다. 그는 심한 충격을 받아 앓아누웠고 창작 활동을 중단했다. 간암을 앓던 그는 그해 5월 세상을 떠났다.

목판화 운동을 벌였던 민중화가 윤(1986년 작고)이 그의 아들이다. 딸 숙희도 화가다. 예술적 재능을 물려받은 자식뿐만 아니라 자연에 대한 사랑을 내림한 자식도 있었다. 막내아들 건(1990년 작고)은 대학을 졸업한 뒤 전북 부안으로 귀농해 평생을 농민운동에 바쳤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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