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한가위]한국 여성과 결혼한 伊 파텔라 형제

  • 입력 2005년 9월 16일 03시 02분


이탈리아에서 한국으로 건너와 예술과 사랑의 꽃을 피우고 있는 파텔라 형제 가족이 한복을 차려입고 활짝 웃고 있다. 한복협찬 김영석 전통한복
이탈리아에서 한국으로 건너와 예술과 사랑의 꽃을 피우고 있는 파텔라 형제 가족이 한복을 차려입고 활짝 웃고 있다. 한복협찬 김영석 전통한복
‘일 산구에 논 에 아쿠아(Il sangue non e’ acqua).’

이탈리아 속담으로 ‘피는 물이 아니다’는 뜻. 우리 속담인 ‘피는 물보다 진하다’와 같은 의미다.

피아니스트이자 이탈리아 레스토랑 ‘푸치니’(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지배인인 안토니오 파텔라(41) 씨와 서울발레시어터 지도위원인 루돌프 파텔라(34) 씨 형제. 이탈리아 남부 해안의 작은 도시 카스텔라네타에서 태어난 두 형제에게는 한국이 고향이나 다름없다. 두 형제는 각각 한국 여성과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있다.

루돌프 씨는 18세 때인 1989년 한국의 유니버설발레단에 입단하면서 낯선 나라, 한국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안토니오 씨는 1997년 동생을 만나러 왔다가 아예 정착했다. 형은 3년의 연애 끝에 2002년 채진아(36·영어강사) 씨와, 동생은 이듬해 동료 단원인 발레리나 전선영(34·서울발레시어터 부지도위원) 씨와 결혼했다. 동서 사이인 채진아 전선영 씨는 자매처럼 가깝게 지낸다.

추석을 앞둔 파텔라 형제의 가족 이야기를 들었다.

○‘루 서방’과 ‘안 서방’

피아니스트이자 이탈리아 레스토랑 지배인인 안토니오 파텔라 씨(왼쪽)와 부인 채진아 씨.

이탈리아에는 추석 명절이 없지만 크리스마스나 부활절에 가족이 모여 축제를 벌인다. 파텔라 형제에게 추석은 낯설지 않은 가족 축제다.

루돌프 씨의 처가는 서울 송파구 문정동. 그는 처가에서 ‘루 서방’으로 불린다.

“루 서방, 송편 먹어봐.”(장모)

“엄마, 송편도 맛있지만 삼계탕은 없어요?”(루돌프 씨)

루 서방은 셋째딸 선영 씨를 훔쳐간 ‘이탈리아 도둑’이다. 하지만 훤칠한 미남에 타고난 사교성, 우리말도 자연스럽게 하는 루 서방은 이내 처가 식구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한국에서는 사위에게 씨암탉 잡아준다는데 ‘우리 엄마’의 삼계탕이 그런 거죠. 사위 사랑은 장모 사랑이라는데 정말 맞아요.”(루돌프 씨)

부인 전 씨는 루돌프 씨가 가족으로 합류한 뒤 4남매가 모이는 추석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말한다.

“요새 형님(동서)들의 ‘질투’가 느껴져요. 엄마, 아빠가 루 서방만 찾지, 술도 고개 돌리지 말고 그냥 마시라고 하지. 형님들이 차별 대우를 받는다며 웃어요. 대신 저 보고 막내사위니까 ‘재롱’ 많이 피워야 한다고 압력을 넣어요.”(루돌프 씨)

한국 생활 17년째인 그는 우리말 유머도 구사하지만 고스톱이 어렵다고 한다. 외워야 하는 게 많고 잘못 치다가 핀잔도 들을 때도 있다고 한다.

전 씨는 “추석 때마다 가족들이 고스톱을 함께 치는데 루돌프는 잘 못해요. 6개 국어를 하는데도 고스톱은 어려운가 봐요. 그래서 윷놀이를 자주 한다”고 말했다.

안토니오 씨의 경우 이번 추석에는 인천에 사는 장모와 처제가 서울 방배동 자택으로 오기로 했다. 안토니오 씨는 “벌써부터 교통 체증이 걱정된다”며 “교통 체증도 추석 분위기의 하나라고 들었지만 막상 당해보니 너무 괴롭다”고 말했다.

그는 이탈리아 볼로냐대 음대 박사 출신으로 음반도 낸 피아니스트다. 특히 그는 가족 모임이 있을 때마다 피아노 연주 등으로 가족에게 함박 웃음을 선사한다.

“안토니오가 우리 말이 서툴지만 이탈리아 스파게티에 달콤한 피아노 반주, ‘엄마, 커피 마실래’라는 한마디만 하면 금세 축제 분위기가 됩니다.”(채 씨)

○“혼자 추석 지낼땐 외로웠어요.”

루돌프 파텔라 씨(왼쪽)가 공연을 마친 부인 전선영 씨를 무대에서 안고 있다.

파텔라 형제는 결혼 전에는 추석이 싫었다.

“추석만 되면 식당이 문을 닫아 ‘쫄쫄’ 굶었어요. 한국인들은 예쁜 한복 입고 즐거워하는데 우리들은 우울했어요. 오늘은 어디 가서 밥 먹나 하면서 고민했어요.”

안토니오 씨는 특히 동생이 미국 애틀랜타 발레단에서 활동하느라 한국에서 홀로 지낼 때 겪은 추석이 가장 힘들었다고 했다.

“너무 외로웠어요. 그런데 한국인 동료가 이상하게 생긴 떡(송편)과 소주를 잔뜩 가지고 와서 실컷 먹었어요. 한동안 추석은 떡 먹고 소주 많이 먹는 명절로만 알고 있었어요.”

이들은 결혼한 뒤에야 비로소 추석의 ‘맛’과 ‘멋’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추석은 바로 지중해 바다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고향의 분위기였다. 이들의 고향에는 대가족이 많으며 축제가 열리면 동네 사람들이 모여 며칠씩 즐긴다.

루돌프 씨는 “열정적인 이탈리아 남부 사람과 한국인의 기질이 꽤 비슷하다”며 “가족이 생기면서 왜 한국 사람들이 추석 때 환하게 웃는지 알게 됐다”고 말했다.

○사랑이 있는 곳에 눈이 간다

눈은 사랑하는 사람 쪽을 보기 때문에 그 시선을 따라가면 사랑하는 사람을 알 수 있다는 이탈리아 속담이 있다.

이탈리아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두 형제는 예술과 가족, 연인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왔다.

9세 때 발레를 시작한 루돌프 씨는 춤을 추기 위해 18세 때 고국을 떠난 뒤 줄곧 외국 생활을 했다.

전 씨는 ‘남남’이었던 시절의 루돌프를 ‘이탈리아 날라리’로 기억한다.

“둘이 발레단에서 유일하게 인사하지 않는 사이였습니다. 지독한 향수 냄새에 주변에는 여자 친구들이 ‘바글바글’ 한 바람둥이였어요. 하지만 춤 솜씨와 열정은 대단했어요. 그래서 이렇게 부부까지 됐나요.(웃음)”

이에 루돌프 씨도 “선영이는 키도 별로, 얼굴도 별로, 춤도 별로였다”고 응수한 뒤 “하지만 ‘기(氣)’가 장난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안토니오 씨를 한국으로 이끈 것은 동생을 보고 싶다는 핏줄의 끌림, 그 하나였다. 그는 동생을 만난 뒤 서울발레시어터의 음악 감독과 피아니스트로 활동했다.

“한국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한 셈이죠. 이곳에서 소중한 가족과 친구들, 예술적인 영감을 얻었습니다. 부모님을 자주 못 보는 게 안타깝지만 로마나 밀라노에 살아도 어차피 1년에 한두 번 보기 어려워요. 나는 다만 서울에서 열 몇 시간 비행기 타고 간다는 것뿐이죠.”

○사랑도 삶이고, 싸움도 삶이다

채진아, 전선영 씨는 파텔라 형제가 자상하지만 ‘욱’ 하는 성질도 만만치 않다고 했다. 부부 싸움 얘기가 나왔다.

아들 안젤로(11·한국명 유호현), 18개월 된 딸 유리를 두고 있는 안토니오 씨 부부는 교육 문제로 가끔 다툰다. 호현 군은 채 씨가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다.

“예술은 항상 인생과 함께해야 하는 거야. 우리 아버지도 그렇게 말씀하셨어. 아버지가 내게 음악이라는 엄청난 행운을 준 것처럼 나도 아들에게 그렇게 하고 싶어. 아빠가 피아니스트인데 아이도 악기 하나는 다뤄야지.”(안토니오 씨)

“맞는 말이야. 하지만 한국 아이들이 얼마나 바쁜지 알아. 중학교에 가려면 준비해야 할 게 많아.”(채 씨)

아들에 대한 안토니오 씨의 사랑은 각별하다. 이탈리아 친구들이 오면 ‘아들이 태권도 3단’이라며 자랑하기 바쁘다. 아내의 만류로 아들이 태권도를 계속하지 않는 것도 불만이다.

문화적 차이 때문에 예기치 않은 부부 싸움이 벌어지기도 한다.

전 씨는 “루돌프가 술을 너무 많이 먹는다. 와인도 분명 술인데 루돌프는 끝내 술이 아니라고 우긴다”고 말했다.

채 씨도 거들었다.

“한국 밖에 나가면 다 애국자라는데 이탈리아 남자와 살다보니 제가 그래요. 불친절한 택시 운전사를 보거나 교통 체증에 시달리다 보면 양국의 ‘대표 선수’가 돼 버려요. 서로 한국과 이탈리아는 어떠냐면서 다투는 거죠.”

두 형제는 한번 전화를 시작하면 30분도 좋고 1시간도 좋다. 그래도 만나면 무슨 얘기가 많은지 낄 틈이 없다.

“식성도 비슷해서 삼계탕을 너무 좋아해요. 몸에 좋다는 걸 알아서 인삼 대추 ‘귀신’이고요. 추석 때 어머니께 또 삼계탕 부탁해야 하나.”

아내들의 불평에도 형제는 딴청이다.

루돌프 씨의 한마디.

“추석이 너무 너무 기다려져요. ‘맛있게’ 보이려면 추석 전날 말끔하게 면도해야지.”(우리말이 유창한 루돌프 씨가 ‘멋있게’를 ‘맛있게’로 발음하는 실수를 했다.)

글=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사진=변영욱 기자 cu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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