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889년 佛시인 장 콕토 출생

  • 입력 2005년 7월 5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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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귀는 소라껍질/바다 소리를 그리워한다….”(‘칸’ 연작5)

20세기 최후의 딜레탕트, 장 콕토. 그는 마술적 재능의 시인이었다. 새로운 충격을 좇는 초현실주의 극작가였다.

소설가이자 문학비평가였고 영화배우이자 감독, 제작자였다. 화가이자 조각가였다. 초상화가요 삽화가였고 도예가, 벽화 장식가, 포스터 디자이너, 장식용 융단 제조자였다. 여기에 더하여 재즈 연주가였다.

‘천의 얼굴’을 가진 콕토. 그는 참으로 다양한 예술의 장르에 손을 댔던 탐식가였다. 진정한 20세기의 르네상스인이었다.

그러나 ‘콕토적 우주’의 중심은 시였다. 시는 ‘희망 없는 종교이며 모럴’이라고 비관했으나 끝내 시인의 운명을 떨치지 못한다. “본질적으로 불구자이면서도 달리기를 꿈꾸었다!”

파리 근교의 상류층 가정에서 자란 콕토는 17세의 나이에 조숙한 몽상의 시인으로 등단한다. 피카소, 모딜리아니, 아폴리네르, 스트라빈스키와 교류하며 그들의 예술적 영역에 침투했고 초현실주의 미학을 섭취했다.

시인은 늘 미지의 것,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것에 이끌렸다. 생사의 갈림길, 시공간이 이지러지는 경계에서 서성거린다. “시는 꿈, 기적, 초자연, 죽음과 이웃한다….”

그의 성적 취향 또한 남달랐으니 청년시절부터 동성애 성향을 감추지 않았다. 첫사랑이었던 천재소년 라디게가 21세에 요절하자 아편에 빠져들었고 ‘제3의 성(性)을 가진 수탉’이라는 험담에 시달린다.

그런 그가 ‘꿈의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영화에 매료된 것은 당연했다. 영화는 몽환의 세계, 비합리의 세계를 그려내면서도 거기에 한껏 현실감을 불어넣는 완벽한 조형언어였으니.

그는 그토록 많은 장르에 개입했으나 실상 그 어디에서도 최고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혹자는 꼬집는다. “그는 겉으로만 화려한 사기꾼이었으며 기껏해야 코미디언, 잔재주꾼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는 모험(冒險)에 ‘생의 내기’를 걸었던 고독한 시 정신의 소유자였다.

펜으로, 붓으로, 그리고 카메라로 시를 표현하고자 했던 콕토. 그가 만든 첫 영화 ‘시인의 피’는 초현실주의의 새로운 장르를 열었다고 영화사는 적는다.

말년에 이르러 그는 영화에 모든 것을 쏟아 부었고, 스크린에 ‘빛의 잉크’로 시를 써나갔으며, 거기에서 마침내 예술의 절정을 맛보았다.

이기우 문화전문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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