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세상/정동찬]‘겨레과학’의 유전자를 찾아서

  • 입력 2005년 3월 4일 18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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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0년 전의 종소리가 우리 고유기술인 밀랍주조기법으로 되살아났다. 통일신라시대 애장왕(804년) 때 만들어졌으나 1950년 6·25전쟁 때 부서진 선림원종이 제 모습을 찾았다. 국립중앙과학관 과학기술사연구실에서 수년간 조사연구를 거듭하고, 중요인간문화재 112호인 주종장 원광식 씨가 거푸집을 만들고 쇳물을 녹여 부어냈으며, 문화재 복원 전문가인 윤광주 씨가 경북 경주의 감포 대종천가에서 문양을 새기거나 미려한 거푸집을 만들기에 좋은 뻘돌(이암·泥巖)을 찾아 시험제작에 성공한 것이다.

밀랍주조기법에 쓰이는 밀랍은 벌꿀찌꺼기로 성형이 잘 되고 잘 녹는 성질이 있어 정교한 문양과 거푸집을 만들기에 좋은 소재이다. 이 기법으로 작은 방울이나 향로 등은 만들 수 있었으나 높이 1m 이상이나 되는 큰 종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겨져 이제까지 한번도 시도된 적이 없었다. 이 선림원종의 복원으로 하나밖에 없어 타종이 금지된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의 복제품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도 열렸다.

지금까지 종에 대한 연구는 단순히 크기와 무게, 문양, 성분분석, 맥놀이 현상(음파의 두 파장이 겹쳐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현상) 등에 대한 기계적인 분석에 머물러 왔다. 그러나 필자는 10여 년 전부터 ‘겨레과학’이라는 기치 아래 우리의 물질 문화유산은 누가 무엇으로 어떻게 왜 만들고 고안해 냈는지, 각 제작공정과 소재 속에 담긴 선조들의 과학 슬기를 풀어내는 일에 열중해 왔다. 이번 선림원종의 복원연구에서도 지금까지 행해온 기계적인 분석을 뛰어넘어 장인의 손끝에서 우리 겨레과학기술의 ‘역사유전자’를 찾아 밝히고자 노력하였다. 그 결과 밀랍주조기술을 되살려 우리 종만이 갖고 있는 맥놀이를 띠는 완벽한 종을 복원해냈다.

이 과정에서 안과 밖의 거푸집 만들기, 합금제작, 공기와 불순물 제거하기, 기름 밀랍 송진 숯 새끼줄 등의 천연소재 활용, 도가니와 거푸집의 고른 열의 유지, 울음잡기 등 장인의 경험에서 우러난 과학슬기가 무궁무진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실 이 작업을 통해 연구진은 한 분야에서 수십 년간 선조들의 경험을 배워 갈고 닦으면서 ‘신의 경지’에 이른 두 분의 장인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왠지 모르게 선조들의 기술을 간직하고 진정한 물질문화유산의 정수를 탄생시킨 장인들을 과학기술자로 인식하는 데 인색하기 짝이 없다. 단지 오래된 유산쯤의 하나로 치부해 버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첨단기술의 빛에 가려진 우리 고유의 소재나 기술, 산업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한지 옻칠 잿물 조개가루 숯 등 가장 경험이 많은 기술일수록 복원에 실패할 확률이 가장 적고, 주변에서 가장 많이 써온 소재나 물질일수록 가장 부작용이 적다는 점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또 그 경험으로 응축된 기술이 한순간 되살아나면 그 어느 것과도 견줄 수 없는 최첨단 신기술과 신소재가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지금이라도 과학과 산업, 기술을 총체적으로 인식하여 겨레과학의 진수를 몸에 담고 있는 장인과 모든 물질문화유산을 과학기술로 인식하는 폭넓은 역사인식을 갖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겨레과학기술에 대한 인식의 폭과 첨단의 깊이는 비례한다.

정동찬 국립중앙과학관 과학기술사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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