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중훈의 續세상스크린]고무줄 나이 까발렸더니 시원합디다

  • 입력 2004년 7월 21일 18시 09분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저는 비교적 바쁜 편입니다. 영화 개봉 때면 10개 정도의 각각 다른 약속에 나가야 할 때도 있고, 약속 중에도 다른 일정을 생각하곤 합니다.

때로 배우인지라 앞의 인터뷰에 빠져들어 뒤에 있는 인터뷰 시간에 맞추지 못하기도 합니다.

2000년 제가 일본 후쿠오카 영화제에 초청됐을 때의 일입니다. 저녁에 일본으로 출국해야 하는데 그날 오전 여권이 만기된 것을 알았습니다.

오전 11시경 KBS의 한 오락프로에 출연할 예정이었는데 어림잡아 여권을 갱신한 뒤 서두르면 예정시간보다 30분 정도 늦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방송사로 연락해 “차가 막혀 30분쯤 늦겠다”고 말했지만 결과적으로 제가 녹화장에 도착한 것은 오후 2시경이었습니다. 점심도 거른 그 많은 방청객들은 “출연자가 조금 늦어서”라는 말을 얼마나 여러 번 들었겠습니까. 그 출연자가 저였고, 마침내 그 ‘잘 난’ 얼굴을 들이미는 순간 방청객은 박수를 치고 싶었을까요?

차라리 둘러대지 않고 여권 때문에 늦어져 정확하게 얼마나 늦겠다고 얘기했다면 그 많은 스태프와 방청객들을 황당하게 한 상황은 막을 수 있었을 겁니다.

언젠가 칼럼에서도 쓴 적이 있지만, 나이 때문에 시작된 거짓말도 저를 괴롭혔습니다. 선후배 관계가 엄격한 영화계에서는 호칭 때문에 심각한 상황이 자주 벌어지기도 합니다.

저는 1966년생이지만 초등학교를 한해 일찍 입학하는 바람에 1965년생과 학교를 같이 다녔습니다. 또 대학 1학년 때 영화배우가 되면서 좀 노숙해 보이려고 별 생각 없이 1964년생이라고 말했던 것이 영화사 자료가 되면서 영화계에서는 한동안 1964년생으로 통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세 개의 나이를 갖고 몇 년을 살았습니다.

1987년 이규형 감독의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를 찍다 만난 (김)세준 형은 제 거짓말의 대표적 ‘희생자’였습니다. 63년생인 세준 형은 정말 넉넉한 마음으로 64년생으로 알려진 제게 친구로 지내자고 말했습니다. 실제로는 나이 차가 세 살이나 나는데 내심 뜨끔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거짓말로 나이를 올려놓은 상태여서 차마 입을 열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저는 남들은 생각지도 않은 일로 끙끙 앓았고, 촬영이 끝난 뒤 세준 형을 찾아가 이실직고를 했습니다. 속이 후련했습니다.

어쨌든 저는 1991년경 영화계 선후배분들께 나이에 관한 미스터리를 털어놨습니다. 다행히 많은 분들이 대수롭지 않게 받아줬지만, 가짜 나이로 친구가 됐던 분들 가운데 어떤 분들은 선뜻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분들껜 아직도 미안한 마음이 남아 있습니다.

제가 사소하다면 사소할 수도 있는 이 작은 거짓말들에서 얻은 교훈은 시쳇말로 ‘쪽팔림’은 순간이지만 진실이 주는 편안함은 오래도록 지속된다는 겁니다.

moviejh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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