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노년 지도가 바뀐다/“백발 청춘을 위하여”

  • 입력 2004년 3월 18일 16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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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 전반기인 ‘영 올드’는 거의 또 다른 중년기나 마찬가지. 노년의 비중이 늘어나고 생애주기가 달라지는 요즘, 노년은 더이상 대충 때워야 하는 ‘잉여 기간’이 아니다. 이종승기자 urisesang@donga.com

노년 전반기인 ‘영 올드’는 거의 또 다른 중년기나 마찬가지. 노년의 비중이 늘어나고 생애주기가 달라지는 요즘, 노년은 더이상 대충 때워야 하는 ‘잉여 기간’이 아니다. 이종승기자 urisesang@donga.com

《‘인생은 60부터.’

삶의 무대에서 사라지지 않으려는 노인의 마지막 외침으로 들리시는가?

세계에서 고령화 속도가 가장 빠른 한국에서, ‘인생은 60부터’는 지금 노년층뿐 아니라 현재 30, 40대의 당면과제이기도 하다.

통계청의 장래인구추계에 따르면 지금 30, 40대가 노인이 될 2040년에는 65세 이상 고령층이 인구의 30.1%가 되고, 현재 남 72.8세, 여 80세인 평균 수명은 남 79.2세, 여 85.5세로 늘어난다. 반면 은퇴 시기는 점점 앞당겨져 인생의 3분의 1가량을 노년기로 살게 된다.》

빠른 은퇴, 늘어난 수명으로 라이프사이클(생애주기)도 바뀌어 가고 있는 추세다. 이미 노인복지 현장에서는 고령층을 세분화해 은퇴 직후인 60세부터 74세 무렵까지를 ‘영 올드(Young Old)’, 75세 이후를 ‘올드 올드(Old Old)’로 부른다. 20세 청년과 40세 중년이 한 묶음으로 분류될 수 없듯 60세와 80세도 다 같은 ‘노인’이라고 보기엔 삶의 단계와 당면한 심리적 과제가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 달라지는 생애 주기

군대와 어학연수를 다녀온 뒤 올해 대학 졸업반이 된 김민수씨(28)와 그의 아버지(64)의 생애 주기를 비교해보면, 19세에 대학에 입학한 것까지는 같다. 그러나 아버지는 27세에 대학을 졸업하고 곧장 취업했으며 당시로서는 꽤 늦은 29세에 결혼해 첫 자녀를 출산한 반면, 김씨는 아직 결혼 생각이 없다. 그는 “친구들 중에도 결혼한 사람은 별로 없고, 서른 이전에 결혼했다고 하면 무척 빨리 했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20대에 인생의 반려자와 직업을 정했던 기성세대와는 달리 요즘에는 30대 초반까지를 탐색의 시기로 간주한다. 취업난까지 겹쳐 대졸자 평균 취업연령은 28.8세까지로 높아졌다. 결혼연령도 남자 29.8세, 여자 27세로 10년 전에 비해 2세 정도 늦어졌다.

취업이나 결혼이 늦어졌다고 해서 그만큼 은퇴가 늦어지는 것은 아니다. 정부는 정년을 65세까지 연장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지만 샐러리맨들이 체감하는 실질적인 퇴직연령은 더욱 빨라지고 있다.

이런 추세대로라면 초반 30년을 성장-탐색기로 보낸 뒤, 중반 30년도 못되는 기간에만 일을 하다가 마지막 30년 가까이를 노년기로 맞아야 한다.

연세대 인간행동연구소 김애순 전문연구원(성인발달전공)은 “남자의 평균 수명이 67세였던 82년 무렵에는 한국인의 생애를 대략 유아기∼청년후기 25년, 성인기 35년, 노년기 7년가량으로 구분했지만 현재는 노년기가 길어지고 성인기의 불안정성이 확대됐다”고 말했다. 생애주기의 변화에 따라 사회적 시계, 연령규범, 개인의 인생설계에도 변화가 불가피해졌다는 것.

이에 따라 암 특약과 같은 건강관련 보험의 보장 기한도 65세에서 80세로 연장됐다. 요즘은 노후를 대비하여 가계소득의 10%가량을 보장성 보험으로 가입하는 추세다. 김 연구원은 “성인기 발달의 핵심은 일인데 직업 경험을 늦게 시작하고 일찍 끝내는 추세가 지속될 경우 그만큼 길어지는 노년기에 삶의 질을 어떻게 유지할 것이냐가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 ‘젊은 노인’ 영 올드 (Young Old)

서울 영등포 노인종합복지관에서 여가생활을 즐기는 노인들. 노인복지관은 착 가라앉아있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활기가 넘쳤다. 이종승기자

60∼74세인 ‘영 올드’에게는 활동적인 삶을 은퇴 이후에도 어떻게 지속할 것이냐의 문제와 부부관계의 재정립 등이 주요 과제다. 요즘의 ‘영 올드’는 이전과 달리 자녀에 대한 의존도가 낮고 자기 생활을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 70세 이전에 은퇴하는 것은 너무 빠르다는 데에 대체로 동의한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돈 되는 소일거리를 갖는 것. 시간활용은 물론 부부관계나 경제적 자립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지만 이는 아주 운 좋은 경우다. 결국 넘쳐나는 시간을 때우려 각종 강좌에 나가거나 봉사활동에도 참가하지만 얼마나 지속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일부에서는 아예 필리핀 등 생활비가 적게 들고 자연환경이 좋은 해외에서 노년을 보내려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무리 살기 좋은 곳이라도 마냥 놀면서 지내긴 힘들다. 무엇보다 일상을 어떻게 유지하느냐가 초반 노년의 최대 관심사다.

엄기인씨(67·인천 부평구)는 퇴직 후에도 ‘출퇴근’의 일상을 유지하는 것을 최대의 목표로 삼고 있는 케이스. “제약회사 이사로 일하다가 2년 전 퇴직하면서 내가 비로소 ‘노인’이라는 것을 실감했고, 50대 후반에 은퇴하는 사람들의 스트레스가 얼마나 클지 짐작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은퇴 후 한 달 뒤부터 노인종합복지관에 매일 오전 10시에 출근해 오후 4시반까지 헬스 영어회화 컴퓨터 포크댄스 등의 강좌를 듣는다. 예전에는 노인복지관을 좀 칙칙하게 생각했지만 실제로 가 보니 젊은이들 공간 못지않게 활기가 넘치는 공간이라고 느낀다.

프리랜서 광고모델인 박형순씨(61)는 ‘영 올드’에 접어들어 되레 이전보다 수입이 많아진 드문 경우다. 서울남부지원에 근무하다 정년퇴직한 그는 젊은 시절의 꿈이었던 배우에 도전해 영화 조연, CF모델 등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많은 ‘영 올드’들이 새로운 도전을 꿈꿔 보지만 청년실업이 심각한 상황에서는 이조차 여의치 않다.

이 시기에서 관계의 핵심은 부부관계다. 강호달씨(67·서울 영등포구 신길3동)는 동갑내기 아내와 자원봉사의 방법을 의논한 끝에 2년 전 함께 이발, 미용 기술을 배웠다. 부부가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고 공동의 관심사를 갖고 있는 ‘모범’사례다. 그는 “복지관의 취미활동 강좌 수강, 백화점 아이쇼핑, 친척들 대소사 등 어떤 경우든 늘 둘이서 함께 달려간다”고 한다. 반면 전직 학원강사 이훈기씨(64·가명)는 은퇴 후 경제적 상황이 나빠진 데다 늘 붙어 지내게 된 아내와 다툼이 잦아지자 아예 혼자 고향에 내려가 학생들 과외를 하고 있다.

노인부부 관계 향상 프로그램인 ‘그대 그리고 나’를 운영하는 영등포 노인종합복지관 원성원 과장은 “노부부만 사는 경우가 3분의 1이나 되는데 부부관계에 어려움을 겪는 ‘영 올드’가 많다”고 한다.

이 복지관의 프로그램은 역할극, 부부만족도 그래프 그려 보기, 집단상담 등을 통해 가부장적 권위구조가 이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데 주안점을 둔다. 또 부부간 의사소통 훈련뿐 아니라 지나온 삶을 돌이켜보면서 서로를 이해하도록 한다는 것.

원 과장은 “평생 서로 잘 모르고 살던 부부가 노년기에 접어들면 갑자기 서로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로 부각된다”며 “이 시기에는 감정을 적절하게 표현하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한다.

○ ‘진짜 노인’ 올드 올드 (Old Old)

75세 이후인 ‘올드 올드’는 건강에 따라 삶의 질에 큰 차이를 보인다. 대개의 ‘올드 올드’는 생활의 영역이 가까운 친척으로 좁아지며 자신의 신체적 욕구, 안락함이 주요 관심사다. 물론 건강관리에 성공한 사람들은 ‘영 올드’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이어간다.

김진영씨(85·여·서울 노원구 상계동)는 6년 전 남편과 사별한 직후부터 지금까지 거의 매일 오전 11시반 한국 노인의 전화가 운영하는 신촌의 노후복지센터에 ‘출근’하며 오후 5시까지 서예, 스포츠댄스, 생활체조 등을 배운다.

과거의 고통스러운 감정의 근원들과 화해하는 것도 이 시기의 중요 과제다. 신봉원씨(75·서울 동작구 신대방동)는 “대학 2학년 때 6·25전쟁이 터졌고, 그때 입대한 뒤 군인으로 평생을 살았다”면서 “몸이 많이 아팠고, 이루지 못한 청년 시절의 꿈 때문에 중년기 이후까지도 고통스러웠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손녀가 대학 졸업하는 것까지 지켜봤으니 지금 돌이켜보면 회한보다는 할 일을 다 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올드 올드’는 성인 발달의 마지막 단계다. 미국의 심리학자 대니얼 레빈슨은 이 시기의 과제에 대해 “인생 주기의 맨 마지막에 서서 삶과 죽음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자신을 사랑하며, 그리고 자신을 포기할 준비를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죽음은 이들에게도 쉽지 않은 과제다. 박묘산씨(78·여·서울 강남구 개포동)는 “죽음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중풍이나 치매에 걸려 남은 사람들을 고생시키다 갈지도 모른다는 것이 가장 큰 걱정”이라고 했다.

김희경기자 susanna@donga.com

김재영기자 jaykim@donga.com

<모델=박형순씨(62), 김계자씨(58), 장소=레이크사이드CC, 의상협조=엘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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