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서 만난 삼국유사]양양군 절터에 가보면…

  • 입력 2003년 12월 4일 16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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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속초를 가자면 미시령을 넘는다. 영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가운데 눈이 오면 가장 먼저 끊기는 길. 눈만 아니라 뭔가가 우리를 미시령 쪽으로 끌어들인다.

속초에 이른 뒤 남쪽으로 좀더 내려가다 몸을 돌려 서쪽을 바라본다. 거기 설악산이 치마폭을 드리운 듯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 대청봉을 꼭짓점으로 완만하게 흘러 내려오는 능선을 한참 동안 응시하자면, 내가 바로 여기 주인이오, 속삭이는 듯한 산의 소리를 듣는다.

속초공항에서 그 산을 향해 한가롭게 뻗은 지방도로를 따라가다 보니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가 나타난다. 둔전(屯田)은 군대가 주둔할 수 있도록 식량을 대는 너른 논밭을 말한다. 대청봉에서 흘러 내려오는 계곡의 물은 이 마을 앞에서 맑게 넘치고, 그 물로 가꿔진 논밭은 기름지다. 둔전리라는 마을 이름은 그렇게 붙여졌으리라.

진전사 북쪽으로 40여㎞ 지점에 있는 건봉사 부도 밭에는 오래된 것부터 최근에 세운 것까지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부도가 즐비한데, 비가 오거나 눈 내리는 날 보는 것이 가장 아름답다.

아직 30여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이 마을 뒤편, 이제 드디어 산이 본격적으로 시작하려는 언저리에 작은 절터가 하나 있다.

진전사(陳田寺) 터. 천년 넘게 풍상을 견뎌온 작은 탑 하나가 오롯이 남아 우리를 부른다.

절이 선 때는 신라 말로 올라가고, 가지산문(迦智山門)이라 불리는 우리나라 최초의 선종(禪宗) 일문이 여기서 시작했다는 유서를 깊이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무려 30년 넘게 중국에서 선종을 배우고 귀국한 도의(道義)는 신라 말의 혼란스러운 사회에서 가진 뜻을 다 펼 수 없었다. 선종이라는 새로운 수행법도 낯설기만 한 것이었다. 마치 그것은 선종의 창시자 달마(達磨)가 처음 중국에 왔을 때와 같은 상황이었다. 훗날을 기약하며 제자를 기르겠다고 도의는 이곳으로 들어와 일생을 마쳤다.

진전사는 한때 웬만한 규모도 됐고, 가지산문에 속한 승려들은 성지순례하듯 여기를 거쳐가, 그런대로 자취가 분명한 곳이었다.

그러나 오늘 진전사 터를 찾아가는 까닭은 다른 데 있다. 바로 삼국유사를 쓴 일연(一然)에 얽힌 이야기 때문이다.

일연이 태어난 해는 1206년, 고향은 경상도 경산인데, 무슨 까닭인지 여덟 살 되던 해 전라도 광주의 무량사(無量寺)로 공부를 하러 간다. 그러나 그때는 승려가 되려 하기보다 순수한 공부 자체가 목적이었던 듯하다. 그런지 여섯 해가 지난 다음 일연은 출가를 결심하고 바로 이 진전사를 찾는다. 일연과 진전사의 만남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설악산의 품에 안긴 골짜기에서 서늘한 바람이 내려오고, 산을 등지고 멀리 바라보니 병풍을 친 듯 동해 검푸른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 옛날 이곳은 한번 들면 나가기 힘든 오지였다. 감당 못할 고요가 밀려든다. 굳이 들고 남을 염두에 두지 않는 수행자들이야 저 바람과 파도만으로도 번거롭다 했겠지만.

그때도 가을이 지나면 이 골짜기는, 아니 이 골짜기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쓸쓸했을까? 일연 또한 이 절의 어느 귀퉁이에서 먼 고향을 떠올리고, 차가운 물빛과 길을 떠난 이야기들을 생각했을까?

지금은 탑 하나뿐인 빈 절터이다. 그럼에도 그다지 외롭지 않다. 국보로 지정된 이 삼층석탑은 홀로 있되 홀로 있지 않은 기품을 보여주고, 기단과 1층에 돌아가며 새겨진 사천왕과 여러 보살상은 당대 예술의 극치를 우리에게 넌지시 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절에서 일연은 머리를 깎았다. 열네 살 때의 일이다. 그리고 스물두 살 때까지 여리디여린 감수성으로 해변의 흰 파도가 그리는 암호 같고 추상화 같은 생애를 곱씹고 있었다.

고운기 동국대 연구교수 poetko@hanmail.net

:촬영 노트: 유적지 가운데 가장 사진찍기 어려운 곳이 옛 절터이다. 대부분의 절터에는 진전사처럼 달랑 탑만 하나 남아 있는데, 좋은 사진을 만들려면 탑보다는 공간, 즉 주변을 보는 안목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 절터를 감싸는 산이나 나무의 모습에서 전체 느낌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진전사 터 주변에는 여름에는 칡덩굴을 배경으로 한 싱싱한 느낌의 사진을, 겨울이면 눈 덮인 설악산을 배경으로 기운찬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요즘 같은 초겨울에는 드문드문 남은 낙엽송 이파리들이 연출하는, 고즈넉한 분위기를 담아낼 수 있다.

양 진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tophoto@korea.com

▼'여행지서 만난 삼국유사' 진전사터 주변엔…▼

미시령 가는 길에서 고개를 넘기 전 다시 한번 왼쪽으로 꺾어지면 진부령을 타고, 거기서부터는 금강산에서 흘러내려오는 한 자락이다.

오랫동안 군사통제구역으로 묶여 있다가 문을 연 건봉사를 들러볼 수 있다.

건봉사는 백담사와 더불어 만해 한용운이 젊은 시절을 보낸 절로도 유명하다. 입구 왼편의 부도 밭도 꼭 한번 보고 내려올 만한 곳이다.

절에서 나와 바닷가에 이르면 7번 국도를 만나는데, 바로 그 어름에 관동팔경의 하나인 청간정이 있다. 현판 글씨는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쓴 것이다.

속초에서 가볼 만한 곳은 여러 군데이지만, 영랑호 주변을 한바퀴 돌며 산보를 하고, 청초호를 낀 부둣가의 잡어구이집에서 식사를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속초 외곽을 따라가는 길을 지나 대포항에 이를 때쯤, 우리는 어느새 흥청거리는 항구의 분위기를 느끼게 된다.

대포항은 이미 널리 알려진 관광지이다. 말린 오징어 한 축쯤 사서 챙긴 다음, 좌판에서 싱싱하고 싼 횟감을 골라, 비좁지만 비닐을 쳐놓아 따뜻한 방안으로 들어가 소주 한 잔 하자면, 어느새 동해 바다가 바짝 다가들어 같이 어울리자 한다.

대포항과 속초공항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설악산 국립공원으로 들어가, 신흥사나 여러 경승지를 구경하는 일은 따로 소개하지 않아도 좋으리라.

이진구기자 sys120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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