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 흐르는 한자]遠 交 近 攻(원교근공)

  • 입력 2003년 1월 21일 17시 16분


코멘트
遠-멀 원 近-가까울 근 攻-칠 공

聘-부를 빙 說-달랠 세 幹-줄기 간

秦始皇(진시황)이 천하를 차지하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역대 君主(군주)들이 인재를 알아보았던 慧眼(혜안) 또한 看過(간과)할 수 없는 대목이다. 본디 秦은 서방에 위치한 미개국이어서 인재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秦은 적극적으로 국외 인사를 招聘(초빙)하여 강국의 기틀을 잡아 나갔다. 당시 초빙된 대표적인 인물에 商앙(상앙)과 張儀(장의), 范Q(범수), 李斯(이사)가 있다. 이 중 商앙과 李斯가 內政(내정)에 힘을 기울였다면 張儀와 范Q는 外交(외교)에 공헌했던 인물이다. 또 張儀가 連橫策(연횡책)을 주장했다면 范Q는 遠交近攻策(원교근공책)을 건의했다.

范Q는 본디 魏(위)의 達辯家(달변가)였다. 大夫(대부) 須賈(수가)의 식객으로 齊(제)에 사신으로 갔다가 齊王의 회유를 받았지만 단호하게 거절했다. 하지만 귀국 후 須賈는 宰相(재상) 魏齊(위제)에게 그가 내통했다고 거짓 고자질했다. 이 때문에 그는 억울하게 첩자의 누명을 뒤집어쓰고 초주검이 되도록 맞은 뒤 거적에 둘둘 말려 사람들의 오줌을 뒤집어 써야 했다. 후에 천신만고 끝에 秦(진)으로 도망쳐 昭王(소왕)을 만나 예의 그 뛰어난 ‘세 치 혀’를 휘두를 기회를 갖게 되었다.

당시 秦은 昭王의 외삼촌 穰侯(양후)가 재상으로 있으면서 無所不爲(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가 齊를 쳐서 영토를 확장하려 한다는 사실을 안 范Q는 이를 기회로 昭王을 만나 遊說(유세)의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范Q가 말했다.

“韓(한)과 魏 두 나라를 거쳐 그것도 강국인 齊를 친다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닙니다. 또 얼마 되지 않는 군사로 쳐 보았자 齊나라는 꿈쩍도 하지 않을 것이며 그렇다고 대군을 출동시키는 것은 秦의 安危(안위)에도 좋을 것이 없습니다…. 지금 왕께서 취할 수 있는 최상의 방책은 먼저 먼 나라와 친교를 맺고 가까운 나라부터 치는, 이른바 遠交近攻이라 하겠습니다. 한 치의 땅을 얻어도 왕의 寸土(촌토)요, 한 자의 땅을 얻어도 왕의 尺地(척지)가 아니겠습니까. 利害得失(이해득실)이 이처럼 분명한데 먼 나라를 치다니요.”

결국 昭王은 齊를 치는 것을 단념하였으며 이 일로 해서 范Q는 宰相(재상)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이 때부터 遠交近攻은 秦의 대외정책의 骨幹(골간)이 되었으며 張儀의 連橫策(연횡책)과 결합되어 마침내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룩할 수 있었다.

鄭 錫 元 한양대 안산캠퍼스 교수·중국문화

sw478@yahoo.co.kr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