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만년필세대의 디지털 경쟁력

  • 입력 2003년 1월 2일 17시 23분


“우리가 벤처의 주역” TIS의 노장들이 새해를 맞아 벤처의 요람 테헤란밸리에서 희망찬 미래를 다짐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재철 상무, 이종수 부사장, 이응환 상무, 조상휘 전무, 유철진 회장.신석교기자
“우리가 벤처의 주역” TIS의 노장들이 새해를 맞아 벤처의 요람 테헤란밸리에서 희망찬 미래를 다짐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재철 상무, 이종수 부사장, 이응환 상무, 조상휘 전무, 유철진 회장.신석교기자
● 영업뛰는 나이든 중역들

주차 유도 관리 시스템을 개발, 판매하는 벤처기업 ㈜TIS. 직원 총 30명인 이 회사의 조직도를 보면 다른 벤처에서 보기 힘든 점이 눈에 띈다.

유철진 회장(61) 강경호 사장(57) 이종수 부사장(59) 이응환 상무(57) 김재철 상무(55) 등 노장이 대거 포진하고 있어 ‘위’가 무거워 보인다. TIS의 속사정을 모르는 외부인들은 “조그만 벤처에 웬 ‘얼굴 마담’이 저렇게 많나” 하고 기업 내실에 의구심을 갖기도 한다.

돌아온 만년필 세대들 . 왼쪽 부터 군터 티에렌 , 폴볼커 , 피터 피터슨 , 얼나이 , 아서 레빗 .동아일보 자료사진

하지만 중역들의 일과를 들여다 보면 그런 의심은 사라진다. 유 회장은 사내에서 가장 영업 실적이 뛰어난 ‘사원’이다. 대구 파티마병원, 코엑스 등 굵직굵직한 거래처와의 계약은 모두 그가 성사시켰다. 유 회장의 탁상 캘린더에는 외부 손님과의 점심 저녁 약속이 빽빽하게 적혀 있다. 다른 중역들도 말이 중역이지 책상머리를 지키고 앉아 있는 시간보다는 영업을 위해 외부로 돌아다니는 시간이 더 많다. 유 회장을 비롯해 나이든 중역들이 추운 날씨에 지하철과 택시를 갈아타고 다니며 영업을 위해 뛰는 동안 자식 뻘인 기술직 막내사원 이용숙씨(26·여)는 연구소에서 컴퓨터와 씨름한다.

● ‘만년필’과 ‘키보드’의 조화

2001년 말 TIS는 코엑스에 주차 유도 관리 시스템을 납품하기 위해 협상을 진행했다. 젊은 영업 사원들이 우선 코엑스의 젊은 실무진을 만나 기술에 대해 설명했다. 코엑스의 실무진은 기술의 우수성에 동감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결정권을 가진 최고 경영진은 만날수조차 없었다.TIS의 노신혜씨(30·여·영업)는 “현실적으로 최고경영진을 직접 만날 수 없는 데다 만난다 하더라도 최고경영진을 설득할 만큼의 논리를 제시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유 회장을 비롯한 노장들이 나섰다. 현대그룹에서 여러 계열사 대표를 지낸 유 회장이 코엑스 최고경영진을 만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유 회장은 직접 파워포인트를 돌려 가며 코엑스 최고경영진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그는 기술의 우수성보다는 새로운 설비가 가져 올 부가가치에 대한 설명에 집중했다. 시스템을 갖추면 40대를 추가로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 주차장 관리 인력을 줄여 인건비를 절감할 수 있다, 주차 유도 시설물의 뒷면에 광고를 유치할 수 있어 새로운 소득원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대기업 대표를 지낸 유 회장은 최고 경영자의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훤히 꿰뚫고 있었다. 따라서 상대가 필요로 하는 핵심만을 조목조목 설명할 수 있었던 것. 코엑스 최고경영진은 꼼꼼한 부분까지 따진 유 회장의 프레젠테이션에 만족했고 즉시 계약을 체결했다.

2001년 대구 파티마병원과 협상을 진행할 때는 시스템 설치로 생기는 유휴 인력에 신경을 썼다. 유 회장은 새 시스템 도입 이후 감원을 하면 노사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미리 지적했고, 남는 인력을 다른 업무에 어떻게 배치하는 게 좋을지 조언을 곁들였다. 종합컨설팅을 한 셈이다.

TIS의 기술 담당 임원인 조상휘 전무(42)는 “경영 경험이 없는 젊은 사람들은 그런 부분까지 계산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노장 임원들은 기술이라는 ‘나무’ 뿐만 아니라 기술이 만들어내는 부가가치의 ‘숲’을 동시에 보는 능력이 있다는 것.

50, 60대의 ‘만년필 세대’가 영업을 책임져 줌으로써 TIS의 20, 30대 ‘키보드 세대’는 기술 개발에만 전념할 수 있다. 이종수 부사장은 ‘젊은 애들이 끈기없다’는 편견을 버렸다고 말한다. “‘사무실에서 밤샘작업을 해야겠으니 야전침대를 사 달라’고 요구하는 젊은 직원들의 모습을 보면 일에 관한 한 우리 젊을 때 만큼이나 열정적이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 아이디어를 제품으로 만들어내는 기술력은 ‘키보드 세대’의 장점. 외곬로 기술만 바라보면서 그 기술이 완전한 모습을 갖추지 않으면 성에 차지 않아하는 집요함도 ‘키보드 세대’가 갖고 있는 경쟁력이다. 밤샘 연구에도 버틸 수 있는 체력, 원천 기술을 이용해 다양한 변주로 응용 기술을 빚어내는 사고의 유연성에서도 ‘만년필 세대’가 ‘키보드 세대’를 따라갈 수 없다.

유 회장은 “신세대와 구세대의 이같은 협업은 고령화 시대의 고민인 고령 노동 인구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하나의 시사점”이라고 말했다. “세계 시장에 통할 만한 기술을 개발해 놓고도 영업력이 없어 기술을 사장시키는 벤처기업이 적지 않다. 그런 면에서 수출경제시대에 몸으로 부딪치며 활로를 개척하는 데 이골이 난 50, 60대 ‘만년필 세대’의 영업력이 가장 필요한 곳이 벤처가 아니겠는가.”

● 노웨어(Know-where)

TIS 제작진이 시스템에 필요한 무선 센서를 개발할 때의 일이다. 기술진은 무선 센서를 만들려면 그에 맞는 배터리가 필요한데 기성 제품 가운데 딱 맞는 배터리가 없어 고민이라고 유 회장에게 보고했다.

유 회장은 인터넷으로 이곳 저곳을 탐색해 보다가 한 업체를 골라 그 곳에 문의하라고 지시했다. “그 회사 완제품을 보니 제조 과정에 우리가 필요로 하는 배터리를 만들 수 있는 공정이 있는 것 같다”고 예측한 것. 실무진의 확인 결과 유 회장의 예측은 맞아 떨어졌다.

이런 식으로 문제점을 해결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유 회장과 다른 중역들은 중장비, 공작기계 같은 업계에서 오랫동안 일을 해왔기 때문에 기계와 관련된 제조 공정을 머릿속에 고스란히 담고 있다. 유 회장은 과거 현대정공 대표 시절 거래했던 이탈리아의 한 부품 업체를 기억해내 필요한 부품을 조달하기도 했다.

조상휘 전무는 만년필 세대의 이런 능력을 ‘노웨어(Know-where)’라는 단어로 풀어 해석했다. 젊은 기술진이 어떤 문제에 봉착했을 때 만년필 세대 임원들이 해결책 자체(Know-how)는 모른다 하더라도 어디에서 해결 방법을 구할 수 있는지를 짚어내는 것을 보며 연륜의 힘을 느낀다는 것. 조 전무는 “젊은 사람들에게 구체적인 ‘지식’이 있다면 노장에게는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지혜’가 있다는 사실을 자주 깨닫는다”고 말했다.

티스인크라는 회사의 출범 자체가 이 ‘지혜’에서 비롯됐다. 1998년 유 회장은 시카고 오헤어공항에서 주차 공간을 찾아 헤매느라 비행기를 놓쳤다. ‘쉽게 빈자리를 찾을 수 있는 장치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구상한 것이 주차유도관리시스템. 주차장 입구와 각 층에 설치된 계기판을 통해 몇 층의 몇 번째 줄에 빈 자리가 있는지 알려주는 장치다.

생활 속의 아이디어를 제품화, 사업화시키는 것은 키보드 세대 벤처가 더 강할 수 있다. 그러나 만년필 세대의 경쟁력은 실제 시장의 수요가 얼마나 될지 냉정하게 계산한다는 것. 유 회장이 주차유도관리시스템의 사업화를 고려할 때도 그의 머릿속에는 어떻게 기술화할까보다 ‘세계 어디어디에 팔 수 있겠다’는 시장이 먼저 그려졌다.

‘만년필’ 임원들의 진가가 더욱 빛을 발하는 부문은 해외 영업이다. 한라중공업 부회장을 지낸 강경호 사장은 인천조선 해외사업부장을, 현대정공 상무를 했던 이종수 부사장은 현대정공 런던, 샌프란시스코 지사장 등 해외관련 업무만 20여년 동안이나 했다.

이 부사장은 “임원진이 모두 해외 근무 경험이 풍부해 어디를 뚫어야 할지를 안다”고 말했다. ‘무(無)’에서 ‘유(有)’를 이끌어낸 산업화 세대이기 때문에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일도 막막하다거나 어렵다고 느끼지 않는다고 그는 덧붙였다. 현재 수출 협상 중인 곳은 미국 시카고 오헤어국제공항과 로스앤젤레스국제공항, 시카고 시영주차장 등 10여곳. 해외에서 협상할 때는 현지 지인들이 발벗고 나서서 도와준다. 유 회장이 박사과정(경영대)을 수료한 미국 앨라배마주립대의 한 교수는 시스템 구현에 필요한 기술 자문을 맡아주었다.

수십년 쌓은 인맥과 신용은 때때로 기대 이상의 결과를 가져다 준다. 몇몇 병원에선 나이 지긋한 임원진이 있다는 점을 높이 사 신생 벤처인 TIS에 의료정보시스템 개발 사업을 맡겼다. ‘그만한 사람들이 일을 불성실하게 해서 평생 쌓아온 신용을 무너뜨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에서였다. 창업을 결심한 유 회장에게 친구들이 각각 수천만원씩 선뜻 투자해준 것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

노장의 파워는 젊은 직원들에게 바람막이 역할을 해준다. 다른 벤처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한 직원은 “예전 직장의 모습과 비교해 보면 티스인크 임원진의 존재 가치를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30대 엔지니어 출신들이 주축이 됐던 회사였는데 현실을 너무 몰랐다. 돈이 되는 쪽으로 기술을 발전시키는 게 아니라 기술 자체의 완결성만을 따졌다. 투자를 유치할 때도 시장 분위기에 어두워 다툼이 잦았다. 이 기술이 1000원짜리라고 자평하더라도 경기가 좋지 않으면 500원만 받는 유연성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유연성을 기대하기엔 경험도 연륜도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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