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美-유럽 재계 ‘만년필세대’ 속속 컴백

  • 입력 2003년 1월 2일 17시 23분


지난해 미국 텍사스유틸리티(TXU)의 최고경영자(CEO)에 복귀한 얼 나이의 당시 나이는 65세.

그가 사회 생활을 갓 시작한 1960년은 ‘플라스틱’이라는 단어에서 ‘신용카드’가 연상되지 않는 시대였다. 당시 ‘플라스틱’에서 떠올릴 수 있었던 최고의 신개념은 ‘가볍고 단단한 자동차용 신소재’였다. 또한 당시 ‘PC’는 ‘옛 지휘자(Past Commander)’의 이니셜이었을 뿐 ‘개인용 컴퓨터(Personal Computer)’라는 개념은 생기기도 전이었다.

한 마디로 그가 ‘구세대’라는 뜻이다. 그런 그가 컴퓨터와 신용카드가 없으면 경제 행위의 상당 부분이 어려워진 요즘 시대에 다시 한 회사의 최고 사령탑에 올랐다. 그것도 2006년까지 임기를 보장받으면서.

2001년 봄 미국 최대 설탕 제조업체 임페리얼슈거의 CEO로 발탁된 로버트 맥로린의 나이는 당시 70세. 회사는 매일 12시간씩 일을 해야 하고 일요일에도 출장을 다녀야 하는 자리에 고령의 맥로린씨를 모시기 위해 그가 플레이를 하고 있던 골프장까지 직접 찾아갔다.

최근 몇 년 새 미국과 유럽의 대기업 경영진에 ‘실버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 ‘만년필 세대’가 돌아온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는 지난해 말 발간한 ‘2003년 세계 전망’에서 올해 예상되는 세계경제계의 트렌드로 노장 CEO들의 일선 복귀를 꼽았다. 이 책자에 ‘만년필의 복귀(The return of the fountain pen)’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한 파이낸셜타임스(FT)의 칼럼니스트 루시 켈러웨이는 “4년 전 인터넷붐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쓸쓸하게 퇴장했던 만년필 세대들은 자신들의 시절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느끼고 있다”고 최근 분위기를 소개했다.

그는 “기업들이 그동안 카리스마가 있는 스타 플레이어형의 CEO를 찾아 헤맸지만 이제는 평범하지만 세심하고 경험 많은 경영자를 원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미국과 유럽의 대기업에는 이미 이 같은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지난해 주가가 큰 폭으로 떨어지는 등 총체적 경영 위기를 맞았던 프랑스의 비방디는 CEO이던 장 마리 메시에(46)를 해임하고 장 르네 푸르투(64)에게 경영권을 맡겼다. 메시에씨는 주가 하락에 대한 대책은 뒷전으로 한 채 거액의 임원 월급 안을 올렸다가 주주들에게 된서리를 맞았다. 사업 확장에 열을 올렸던 독일 베텔스만의 CEO 토마스 미델호프(49)도 지난해 정년 퇴임을 앞두고 있던 군터 티에렌(61)에게 자리를 내줬다.

미국에서는 닷컴붐이 빠지기 시작한 2000년부터 일찌감치 과거 경영자들을 다시 복귀시키는 움직임이 두드러졌다. 제록스, 루슨트테크놀로지, 허큘리스, 하니웰, 코닝 등 쟁쟁한 기업들이 이 같은 움직임에 동참했다.

기존의 노장 CEO들의 꾸준한 활약도 눈에 띈다. ‘투자의 귀재’로 불리는 버크셔 해서웨이의 CEO 워런 버핏(72)이 대표적 인물. 미국 증시에서 그의 영향력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 커지고 있다. 그는 10년 전에는 15개 회사의 경영에 관여했다. 지금 현재 그의 영향 아래 놓여 있는 기업은 50개로 늘어났다.

뉴욕타임스는 노장 CEO가 복귀하는 경향이 계속 될 것으로 내다봤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최근 15년 동안 미국 CEO의 평균 연령은 계속 낮아져 왔다. 1980년 포천 100대 기업 가운데 CEO의 나이가 60세 이상인 기업은 절반을 차지했다. 그 숫자는 1997년까지 줄곧 떨어졌고 1997년에는 25%로 줄어들었다. 그런 뒤로는 내림세가 주춤한 상황. 2001년까지 숫자에 변동이 없었으며 전문가들은 평균 연령이 다시 높아질 것으로 보고 있다고 신문은 지적했다.

켈러웨이씨는 “기업들은 이제 세심한 주의력과 업무 완성 능력을 높이 살 것”이라면서 “CEO의 가치가 ‘전략’보다는 ‘실행 능력’으로 기울고 있다”고 전했다.

● 위기 때는 노장이 필요하다

젊은 경영진의 퇴진과 노장 경영진의 복귀는 정보기술(IT) 업계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IT업계의 촉망받던 젊은이들이 파격 인사로 일찌감치 최고경영자 자리에 올랐으나 기업 부풀리기에만 몰두하다 회사를 위기로 내모는 사례가 많았기 때문. 젊은 경영자들은 단기성과를 중시하는 ‘결과 지상주의’에 매달린 탓에 자기 제어를 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같은 상황에서 업계는 위기 상황을 헤쳐갈 수 있는 노련한 ‘구원 투수’를 원했다.

임페리얼슈거의 맥로린씨는 25개 채권자들과 협상을 벌이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노련한 기술로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파산 직전에 내몰린 회사를 구해냈다. 임무를 완수한 그는 지난해 초 새로운 CEO를 선임하는 작업까지 마친 뒤 회장 자리로 물러났다. 그에게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다른 회사들로부터 러브콜이 잇따르고 있다.

비방디의 푸르투씨는 CEO로 임명된 뒤 자금 조달과 자산 매각 등 재무상의 어려움을 해소하는 데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잇따른 대기업의 회계 부정 사건으로 ‘아메리카 주식회사’의 위기감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지난해 여름 경제계에서 원로들에게 ‘SOS’를 타전했다.

민간 경제연구기관인 콘퍼런스보드가 주축이 돼 기업의 신뢰 회복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구성한 태스크포스팀에는 전 상무부 장관 피터 피터슨(76),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 폴 볼커(75), 전 증권거래위원회 위원장 아서 레빗(71), 전 뱅가드 그룹 회장 존 보글(73) 등 70대 인사가 대거 포함됐다.

지난해 12월에는 월스트리트를 감독하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 위원장 자리에 윌리엄 도널드슨(72)이 임명됐다. 투자 회사를 직접 설립해 보고 보험사도 경영해 봤기 때문에 투자자들에게 악영향을 미치는 금융제도의 허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는 배경에서 선택된 것. 월가에서는 구석 구석을 잘 알고 있는 도널드슨이 임명되자 그의 행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노장 CEO들의 복귀에 대해 한편에서는 “새로운 트렌드로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지적도 있다. 노장들의 복귀는 기업의 미래를 맡길 만한 인재를 시장이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히 생기는 현상일 뿐이라는 것. 또한 급변하는 경제 환경에서 경제 시스템을 살리고 기업을 구해내기엔 너무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의구심도 적지 않다.

한 전문가는 노장 CEO들에 대해 첨단 기술에 대한 반발이 강하고, 변화를 추구하는데 소극적이라고 지적했다.

미국의 최장수 여성 CEO인 골든웨스트파이낸셜의 메리언 샌들러(72)는 이같은 지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나는 휴대전화를 사용한다. 그리고 집에서는 노트북 컴퓨터를 쓴다. 다른 회사의 사이트를 검색하며 인터넷을 항해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금동근기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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