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새해특집]김추기경 “盧당선자, 불안해하는 마음 읽어야”

  • 입력 2002년 12월 31일 17시 04분


김수환 추기경(오른쪽)은 80세가 넘은 고령에도 시국에 대한 깊은 통찰과 예언자적 안목으로 우리 사회의 현실과 문제점을 짚어내며 새해와 대통령당선자 및 신구 세대에 거는 기대를 피력했다. -이종승기자
김수환 추기경(오른쪽)은 80세가 넘은 고령에도 시국에 대한 깊은 통찰과 예언자적 안목으로 우리 사회의 현실과 문제점을 짚어내며 새해와 대통령당선자 및 신구 세대에 거는 기대를 피력했다. -이종승기자
집안에 아버지가 계시다는 것은 마음 편한 일이다. 비록 아버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디딤돌 위에 아버지의 고무신이 놓여 있다는 것만으로도, 멀리서 아버지의 기침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하여도 집안은 평화롭다. 김수환 추기경은 우리 집의 어른, 우리 시대의 아버지다.

‘25시’의 작가 게오르규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기억에 새겨진 최초 인간의 모습은 요람 곁에 서 계신 아버지였다. 그때부터 아버지를 바라볼 때마다 나는 그 성상(聖像)과 같은 인품에 경의와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늘 성화를 보는 기분으로 아버지를 우러러보곤 했다.”

게오르규의 표현처럼 나는 김수환 추기경을 언제나 어디서나 성화를 보는 기분으로 우러러보곤 했었다.

김수환 추기경.

한 종교의 지도자일 뿐 아니라 우리 민족의 고통과 아픔이 있을 때마다 그 한복판에 뛰어들어 시대의 상처를 어루만졌던 우리의 아버지. 특히 나는 개인적으로 이 아버지가 박정희가 죽었을 때 장례식장에서 들려준 말 한마디를 영원히 잊을 수가 없다.

“아버지 이 죄 많은 박정희를 용서해주십시오.”

나는 그때에 눈물을 흘리며 감동했었다. 저 사람이 외치는 아버지는 도대체 누구인가. 내가 평소에 아버지로 생각해왔던 그가 간절히 소망하는, 아버지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세모에 김수환 추기경을 만나기 위해서 혜화동 주교관으로 가는 내 마음은 신년대담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죄 많은 죄인으로서 모든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받는 고해성사를 하기 위해 찾아가는 느낌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이 나를 대신해서 이렇게 기도를 해주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버지, 이 죄 많은 최인호를 용서해주십시오.”

―추기경님 안녕하세요.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머리가 텅 비었어요. 기억력도 예전 같지 않고, 그런데 머리가 텅 빈 사람에게 무슨 말을 들으려고 이렇게들 찾아오셨나요.”

―머리가 텅 비셨다면 모든 수도자가 바라는 것이 아닙니까.

“아니지요. 수도자가 바라는 것은 머리가 텅 비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텅 비우는 것이지요.”(웃음)

―어쨌든 추기경님께서 새해를 맞아 거는 기대와 소망의 말씀을 한마디 해주시지요.

“먼저 새해에는 이 나라와 온 국민에게 만복이 깃들기를 바랍니다. 또한 새해에는 21세기 첫 대통령의 영도 아래 낡은 정치를 버리고, 새 나라를 건설하는 큰 희망과 포부가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의 남북관계를 비롯하여 정치 경제 사회의 여러 문제, 특히 지역간 세대간 계층간의 갈등과 분열현상을 생각할 때 가장 필요한 것은 화해와 협력정신이라고 봅니다. 특히 새해에는 북한 핵문제로 전쟁이냐 평화냐 하는 절박함을 느낍니다. 이 문제로 경우에 따라서는 최악의 상황으로 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대화로 문제를 풀어나가도록 우리 정치지도자들, 특히 노무현 대통령당선자에게 하느님께서 필요한 지혜를 주시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1965년 교황 바오로 6세는 유엔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형제가 되고자 한다면 손에서 무기를 버리십시오. 손에 무기를 들고 있으면서 서로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미국도 북한도 세계의 어떤 나라도 이 말씀에 귀기울이는 한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지난 대선결과에 따른 견해와 새 대통령에 대한 바람을 말씀해 주시지요.

“선거 자체는 비록 양편 다 사활을 건 것이었던 만큼 좀 혼탁한 면이 없지 않았고, 여러 가지 갈등과 분열상이 여전히 나타났지만 비교적 무사히 치렀다고 봅니다. 특히 이번 대선에서는 안정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이회창 후보를 지지했고, 변화와 개혁을 바라는 사람들은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여기서 세대간의 차이가 크게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안정과 변화, 이것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개혁 없는 안정은 고인 물과 같아서 썩게 되어 있지요. 그러나 안정 없는 개혁은 위험하기까지 합니다. 그러기에 안정과 개혁이 모두 함께 손잡고 가야 한다는 것을 국민 모두가 깨달아야 하고, 새 대통령께서도 이런 정신으로 개혁을 추진하되 안정을 바라면서 새 대통령을 아직도 불안하게 느끼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물러가는 김대중 대통령과 이번 대선에서 낙선한 이회창 후보에 대해서도 당부의 말씀을 들려주시지요.

“김대중 대통령께서 처음 취임했을 때 취임식장에 들어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대변인이 참고 되는 말을 해달라고 했을 때 저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부디 전철을 밟지 마십시오.’

전임 김영삼 대통령도 처음에는 인기가 좋았지요. 안가를 해체하고, 청와대를 개방하고, 그러나 경제위기로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를 초래하고, 아들 문제로 곤욕을 치르고 있을 때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였는데, 이상하게도 똑같이 아들 문제로 인해 전철을 밟게 되었어요 (웃음).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 초 IMF 문제해결에 큰 공이 있기 때문에 국민들의 높은 지지를 받았고, 또 햇볕정책을 일관되게 밀고 나감으로써 남북정상회담을 갖게 되고, 대화의 길도 열어 우리 역사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받는 영예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두 아들이 수뢰혐의로 구속되고 유죄판결을 받는 시련도 있었다고 봅니다. 이렇게 그분에게는 영욕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런 미련 없이 떠나 조용히 이 나라의 원로 정치인으로 남으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이회창 후보에게는 낙선의 아쉬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두 하느님의 뜻으로 잘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제가 먼저 전화를 걸어 부인에게 위로를 했지요. 그랬더니 그분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그때 저는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이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십시오. 여생을 봉사하는 마음으로 사시고, 깨끗하게 마음을 비우는 자세는 정치인들을 비롯하여 모든 국민들에게 큰 교훈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문입니다만, 흔히 대통령과 같은 인물은 하늘이 내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노무현 후보의 대통령 당선도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노무현 대통령당선자께서 후보 시절 한번 찾아왔었지요. 개인적으로 가톨릭 영세를 받았지만 성당에는 나오지 않는다고 고백하더군요. 신앙은 없지만요, 대통령은 하늘이 섭리한 자리처럼 느껴진다고 말하기에 저도 동의했습니다 (웃음).

어찌 대통령뿐이겠습니까. 이 세상의 모든 만물, 그 중에서도 사람은 특히 하느님께서 친히 창조한 고귀한 생명입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은 하늘이 내린 사람들이지요.”

―지난해는 월드컵으로 온 나라가 축제의 붉은 물결에 휩싸였습니다. 월드컵을 즐겨보셨습니까.

물론 즐겨 보았고, 지금도 기뻐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의 젊은이들이 자랑스럽지요. 수십만이 넘는 젊은이들이 모두 하나가 되어 기쁨으로 우리나라에 태어났다는 자랑스러운 자부심을 가지고 축제를 벌리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민족의 미래가 밝다는 희망을 느꼈습니다.

―최근에 일어난 촛불시위는도 그러한 시민들의 자발적인 힘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또한 미국과의 문제도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추기경님의 의견을 들려주시지요.

“여중생치사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촛불시위가 지금도 번져 나가고 있습니다. 사람은 분명히 죽었으나 그것을 책임지는 사람이 없으니, 시민들의 분노는 당연할 것입니다. 미국인도 자신들이 늘 자부하듯 민주주의와 인권존중은 자국민들만의 것이 아니고, 민족과 국경을 초월하여 실천할 때 존경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또한 우리 자신도 이것을 계기로 우리나라에 와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대할 때 우리 민족과 같은 인권존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난 크리스마스 때 우리나라에 와 있는 필리핀 노동자들을 위해 성탄미사를 드렸는데,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지 못해서 가슴이 아팠어요. 고용주가 이들의 인권을 무시하고, 강제로 노동을 시켰기 때문이지요.”

―간디는 일찍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예수를 좋아한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좋아하지 않는다’라고요. 특히 간디는 국가가 망할 때의 징조를 ‘원칙 없는 정치, 도덕 없는 경제, 인간성 없는 과학, 양심을 잃은 쾌락, 희생 없는 종교’라 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전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종교왕국이고, 기독교 국가입니다. 과연 저희 기독교인들의 신앙이 어떻게 내적 성장을 이뤄야 할 것입니까.

“이봐요, 최 선생. 내가 질문 하나 할까요.”

―하십시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도 긴 여행이 무엇인지 아세요.”

―모르겠습니다.

(추기경은 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와 가슴을 가리키면서 말하였다.)

“바로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여행이지요. 나 역시 평생 이 짧은 것처럼 보이는 여행을 떠났지만 아직도 도착하기엔 멀었소이다. 기독교인들은 항상 자기반성과 회개를 통해 조금씩 조금씩 우리 마음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 하느님께 나아가고 예수를 닮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과오가 있다 하더라도 그나마 종교인들이 소금 역할을 해줌으로써 이 나라가 굳건히 지탱될 수 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꿈을 자주 꾸십니까.

별로 안 꿔요. 꿈을 안 꾸는 것도 아닌데, 생각이 잘 떠오르지 않아요.

―추억은 자주 떠올리십니까.

“추억이야 낡은 옷과 같아서 떠올릴 필요가 없지요. 그보다도 내 삶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모르지만 그 남은 생 동안 하느님께 얼마나 더 가까이 갈 수 있을까 그것이 걱정이에요. 이 죄 많은 죄인을 하느님께서 어떻게 받아 주실까. 물론 하느님께서는 무엇이든 용서해주시는 분이지만 그래도 하느님 앞에 나아갈 때 부끄럽지 않은 영혼으로 서고 싶은데 그것이 걱정이에요. 나같이 죄 많은 죄인을 하느님께서 용서해주실까. 그것이 요즘의 소망이에요.” 나이와 함께 오는 여러 가지 어려움 육체적 정신적 어려움도 잘 받아들일 만큼 하느님께 모든 것을 위탁하는 것, 그것이 요즘의 간절한 기도제목이지요.

더 이상 어두워지기 전에 죄 많은 죄인 김수환 추기경과 죄 많은 죄인인 나는 뜨락을 함께 거닐면서 사진을 찍기로 했다. 고해성사를 한 것은 내가 아니라 김수환 추기경이었으니. 아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죄 많은 우리 아버지 김수환 추기경을 용서하소서. 아버지를 우리 집에 오랫동안 머물게 하시어 디딤돌 위에 놓인 아버지의 고무신만 보아도 가슴이 따뜻해지고, 아버지의 기침소리만 들어도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게 하소서.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 우리는 인간 김·수·환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만난 사람 최인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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