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기자의 현장칼럼]대선이 끝난후 열린 어느 송년회

  • 입력 2002년 12월 26일 17시 12분


대통령선거가 끝난 며칠 뒤 서울의 한 한식집에서 송년회가 열렸다. 교수1, 교수2, 대학강사, 판사, 공무원1, 공무원2, 공무원3, 공무원4, 공무원5, 대기업 사원, 박사과정 대학원생1, 대학원생2 등 12명이 모였다. 낯설고도 철학적인 송년회였다.

교수1〓이회창은 참 불운해. 지난번엔 이인제 때문에 안 되더니 이번엔 정몽준 때문에…. 이번 선거에서 스타덤에 오른 건 노무현이 아니고 퍼스트레이디가 되는 권양숙이야.

공무원2〓이번 선거를 관권선거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어. DJ가 취임 초기부터 정권재창출을 위해 초고속통신망을 마구 깔기 시작했다나? (웃음)

강사〓대비해 그런 건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인터넷 덕을 본 건 사실이지.

대학원생1〓초등학생인 조카도 선거 전 “노무현 뽑자, 삼촌도 노무현 찍어라”고 하더라. 인터넷 채팅을 하더니. 인터넷은 쌍방향이라 TV보다 효과가 훨씬 커. 더 맹목적이고.

공무원1〓난 ‘50세주’는 성에 안 차. 오리지널 ‘백세주’로 하자고. 자,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건배!

공무원3〓○○○(공무원2)는 이회창이 압도적 지지를 얻을 때에도 오로지 노무현을 지지했지. 대단해.

공무원2〓인생이 그런 거 아니야? 모 아니면 도지. 미지근한 게 더 나빠.

대학원생1〓인터넷도 문제가 많아. 조카가 인터넷 아바타에 빠지면서 이번 달에 60만원이 청구됐어. 부모가 혼내니까 가출했다가 경찰에서 배회하는 놈을 찾아왔어.

교수1이 ‘50세주’를 맥주 잔에 가득 따라 교수2와 관료3과 대기업 사원에게 주었다. 모두 “감사합니다”하면서 단숨에 들이켰다.

공무원2〓이회창이 퇴임의 변으로 “법과 원칙이 있고 인간중심인 세상을 만들고자 했는데 실패했다”고 말한 건 잘못이야. 그는 제1당의 당수였어. 꼭 대통령이 돼야만 법과 원칙이 서나? 다수당으로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공무원3〓하지만 가부장적인 정서와 연공서열이 강한 우리 문화에서는 당연한 것 아닐까?

공무원2〓출구조사를 보면 오전에는 이회창이 이기다가 오후에 역전됐어. 오후 1∼2시 휴대전화 통화량이 폭증했다는 건 20, 30대가 서로에게 투표를 독려하고 투표 내용을 확인하는 행동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지. 이번엔 특히 젊은층만 투표율이 낮았던 게 아니거든.

대기업사원〓그러나 얼마 전 MBC뉴스를 보니까 기자가 투표 당일 스키장을 찾아가 ‘스키스쿨’을 온 대학 강사와 학생들에게 마이크를 들이대고 “왜 투표 안 했느냐”며 죄인 취급하더라고. 투표할 권리도 있지만 투표 안 할 권리도 있는 거 아닌가?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난 그런 전체주의적인 분위기가 싫어. 날 좀 자유롭게 살도록 놔뒀으면 좋겠어. 아파트 한 개 동 전체 주민이 일시에 전등을 껐다 켜야 소원을 들어주는 프로그램도 있던데. 이건 무슨 사회주의 국가도 아니고….

교수2〓나도 테니스 하느라 투표 못 했는데.

공무원4〓테니스는 정욕을 누르는 좋은 운동! 가정을 유지시키는 운동이지. 그러나 골프는 정욕을 북돋우는 가정 파괴적 운동!

공무원3〓노무현이 그런 전체주의를 경계하는 우려를 불식시키지 못하면 꽤 사회가 혼란스러울 거야. 노무현 브랜드는 장점이 뚜렷하지만 단점도 그렇거든.

교수2〓그래서 순수한 리버럴(liberal)을 지향하는 정당이 나와야 해. 나의 테니스할 자유를 보장해 주는. 롤랑 바르트처럼 이 사회의 모든 신화의 껍질을 벗겨내야 해. 보편적인 질서를 다 의심해 봐. 투표권부터 강남 아파트에 살려고 발버둥치는 것까지. 그렇게 과외 시켜서 결국 원하는 게 뭘까? 기껏해야 아버지처럼 강남 아파트에 사는 거 아니야? 노무현이여, 진정 나를 자유롭게 해주길….

대기업사원〓강남에 사니까 그런 말하는 거지.

교수2〓난 처가살이하는 건데….

강사〓그런 신화의 단물을 먹고 사는 게 입시학원 강사야. 서울대 박사를 딴 후배는 강남에서 논술과 구술을 가르치는데 두 달에 2000만원을 벌었대. 장차관집 애들을 많이 가르치는데 촌지를 그렇게 갖다 준대. 잘 봐달라고.

술잔이 어지럽게 돌았다. 사람들은 백세주를 가득 채운 맥주 글라스를 들고 꽃을 찾는 꿀벌처럼 이 자리 저 자리 옮겨다니기 시작했다. 연거푸 두 잔을 들이켠 교수2가 흥분했다.

교수2〓이회창이 이번에 진 이유가 뭔지 알아? 그는 유능하고 똑똑해. 그러나 꿈을 심어주지 못했어. 나 서울대 나와 강남에 살면서 대학교수하고 있어. 그러나 이회창 찍지 않았어. 그에겐 모험과 꿈이 없어. 악마와 싸우고 공주를 구해내고 정의를 구현하는…. 그러나 노무현에겐 스펙터클과 어드벤처가 있어. 환상이 있고. 행정수도 이전 문제도 그래. 실제 이전할 걸로 보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사람들은 여하튼 변화를 꿈꾸는 거야. 그런 의미에서 ‘반지의 제왕’(영화)을 만든 감독은 분명 뉴질랜드의 플라톤이야. 강남 아파트에 살아서는 절대로 그런 꿈을 만들 수 없어.

대기업사원〓등산 좋아하는 사람 중에도 밴댕이 속이 많던데?

교수2〓등산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 사람 좋아. 등산하다 중단한 놈들은 다 저질이야. 진짜 안 마실 거야? 북한산에 터널 뚫는 것도 중단해야 해. 다람쥐를 자유롭게 하라!

공무원2〓터널 뚫으면 상계동 주민들이 도심에 곧바로 진입할 수 있어. 상계동 주민의 편의냐, 다람쥐의 자유냐?

교수2〓인간 말고 오후 6시 지나서도 안 자는 동물 봤어? 네가 뭔데 다람쥐의 수면을 방해해. 야, 너 정말 안 마실 거야?

일행은 오후 10시반이 되자 노래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대학강사가 ‘카스바의 여인’을, 공무원3이 ‘전선야곡’을 불렀다. 판사는 캔맥주 위에 웰치스(포도맛 캔음료)의 껍데기를 쓱쓱 씌우고 있는 노래방 주인의 능수능란함에 놀라며 “세상에 이렇게 해도 되는 거야”하면서 ‘불법천지’를 개탄했다. 대학강사는 브라운관 6개가 합쳐진 멀티비전 꼭대기로 올라가 춤을 췄다.

자정이 되자 노래방에서 나와 강남역 인근의 와인바로 옮겼다. 일행은 6명으로 줄었다.

강사〓서울대 없애자고 하는데, 정말 없앨 수 있을까?

공무원2〓경영대나 공대는 없애도 돼. 그러나 인문학은 절대 없애면 안 돼. 고시 공부하는 놈들은 왜 서울대에 가나?

강사〓파리 1, 2…대학처럼 아예 서울대를 해체하고 서울 1대학, 서울 2대학… 식으로 가는 건 어때?

교수1〓어떤 놈들은 “인문학의 미래가 불안하다”고 경계하는데 한심한 지적이야. 인문학은 미래가 불안해야 하는 게 당연하다니까. 그런 불안 속에서 뭔가 만들어 내거나 망하거나 한다니까. 난 니들 잘되는 것 보면 불안해서 잠이 안 온다니까. 어차피 인문학이 배고픈 거라면 나는 깨끗하게나 살기로 했어. 아아, 이 노래 죽인다. 무슨 노래냐? 인생을 통째 던지고 싶다.

대기업사원〓JK김동욱의 ‘미련한 사랑’.

교수1〓나 이번에 이회창 찍었어. ‘조금 천천히 가자’는 뜻에서. 라이프니츠에서 칸트까지 가는데 100년이 걸렸다니까. 세상이 바뀌는 게 그렇게 쉽지 않다니까. 그런데 이회창의 문제는 비전이 없다는 거였어. 법관 시절부터 비전이 있었다면 어떻게든 아들 군대 보내지 않았겠나? 이젠 비전이 중요하다니까. 그 비전을 만드는 게 뭐냐?바로 사유라니까. 그런데 노무현도 사유는 없더라. 자신의 앰비션(ambition·야망)과 유권자의 기대치는 분명 다르다니까. 요즘 대학 들어오는 놈들 보면 한심해. “교수님, 아이디어가 없는데요” 하는데, 지들이 무슨 니체나 비트겐슈타인이라고 아이디어를 논하냐? 책 안 읽은 거지. 우리는 시대의 징검다리야. 다 밟고 지나가도록 조용히 자신을 채워야지.

공무원5〓이제 공무원 사회도 한 번 요동을 치겠네.

교수1〓야, 겁먹을 것 없어. 인간관계는 세 가지 중 하나야. 내가 너한테 배울 게 있든지, 네가 나한테 배울 게 있든지, 교통딱지를 해결해 줄 수 있든지…. 이 세 가지 중 어느 것도 아니면 절대 신경 쓸 것 없다니까. That depends on him. 모든 문제는 자신이 해결하는 거라니까.

송년회는 오전 1시반에 끝났다. 와인바 여종업원이 11만원인 술값을 20만원으로 잘못 청구해 소란이 일었다. 대학강사는 “술 취했다고 속여도 되는 거야? 내가 얼마나 자주 오는데 이럴 수 있어”라며 강하게 항의했고 종업원은 눈물을 흘렸다. 일행은 여인의 눈물에 대해 “참회다” “연극이다”며 의견이 엇갈렸다. 술집을 나서며 교수1은 “그 정도는 프로테스트(protest·이의제기)할 줄 알아야 진정한 술꾼이다”면서 강사를 칭찬했다. 일행 중 한 명이 “이제부턴 인생 자체가 프로테스트다”면서 알쏭달쏭하게 말했다.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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