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곡학술문화상 받는 김용섭 前연세대 교수

  • 입력 2002년 7월 11일 18시 59분


사진=김형찬기자
사진=김형찬기자
《한국농업사 연구에 독보적인 업적을 쌓아 온 김용섭(金容燮·71) 전 연세대 교수가 12일 오전 11시 서울 롯데호텔 크리스털 볼룸에서 성곡학술문화상을 받는다. 성곡상 선정위에서는 성곡학술재단 이사인 연세대 김우식(金雨植)총장에게 “총장께서 수상을 거부하시지 않도록 각별히 애써 달라”는 당부와 함께 상을 드리기로 했다는 후문이다. 연구 이외의 대외활동과 각종 상을 한사코 거부해온 그를 어렵게 만나 학문과 인생, 앞으로의 연구과제 등을 잠시나마 듣게된 것은 큰 행운이자 보람이었다.》

“학자가 공부해서 책을 내는 거야 당연한 일이지 그게 왜 신문에 날 일입니까? 찾아오지 마세요.”

약 2년 전 김 교수가 ‘한국중세농업사 연구’(지식산업사)를 냈을 때 전화를 걸어 인터뷰를 요청하자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었다.

기자가 대학시절부터 그의 조선후기 및 한국근현대 농업사 관련 연구서를 보며 공부해 왔음을 밝히며 후학으로서 뵙고 싶다고 간곡히 청하자, ‘취재 목적이 아니라는 조건으로 나중에 찾아오라’고 허락을 했다.

1년여가 지난 후에야 서울 마포구 연남동에 있는 그의 연구실로 찾아간 기자를 김 교수는 오랜만에 찾아온 제자처럼 반가이 맞이했다. 온통 책으로 뒤덮여 발 딛을 데가 마땅치 않을 정도인 작은 연구실에서 한국사학계의 ‘기념비적’ 업적은 지금도 계속 쌓여가고 있었다.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처럼 영원토록 읽히는 고전이 될 책을 쓰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공부해 왔어요. 아직 그런 책도 쓰지 못했는데 상을 받고 신문에 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요.”

하지만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해 주고 싶어하는 사회 각계의 마음 씀씀이는 결코 과분한 것이 아니다. 그는 농민봉기와 동학농민전쟁 등 한국사에서 중세사회로부터 근대사회로 전환되는 사회변동의 핵심적 원인을 농업구조의 변화에서 찾아냈다. 섣불리 가설을 세워 주장을 펼치기보다는 치밀한 사료분석의 축적을 통해 한발한발 결론에 다가가는 그의 치밀한 연구는 동료 학자들의 경외의 대상이다. 그의 이런 성과는 일제시대의 식민사관을 뿐 아니라 서구 중심의 역사관도 극복하며 한국사의 독자성과 내재적 발전론을 형성하는 탄탄한 기반이 됐다.

“1984년에 1년 동안 유럽에 가 있을 기회가 있었어요. 프랑스, 영국,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을 돌아봤지요. 그러면서 더 확신을 가지게 됐어요. 과거에는 그들이 우리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굳이 그들의 역사관에 맞춰 한국사를 연구할 필요가 없잖아요.”

동학농민전쟁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조선후기 농업사에서 시작한 그의 연구는 근현대 한국사회의 농업구조와 사회변혁사상 연구로 확대됐고, 최근 몇 년 사이에는 고려시대 및 그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농업사를 공부하다 보니 점점 더 앞의 시대로 올라가게 돼요. 요즘은 문학작품도 보면서 거기서 농업에 관한 흔적을 찾기도 하지요. 농업사 전체를 총괄하는 ‘한국농업사’를 쓰는 것이 목표인데 죽기 전에 쓸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지금까지 해 온 것은 ‘한국농업사’를 쓰기 위해 드문드문 주요한 맥을 짚어 온 것이지요.”

그가 떠난 ‘큰’ 자리를 메우기 위해 연세대 사학과는 그의 제자 세 사람을 사학과 교수로 임명했다. 조선후기사는 김준석, 근대사는 김도형, 현대사는 방기중 교수가 맡았다. 불행히도 제자들 중 맏형 격인 김준석 교수는 지난 5월 말 먼저 타계했다.

김 교수의 하루는 일흔이 넘은 지금도 한치의 변함이 없다. 7시쯤 집을 나와 30분쯤 운동 삼아 걸어서 연구실로 오고 하루종일 연구를 하다가 저녁 무렵 다시 걸어서 집으로 돌아간다.

“어느 날 연구실에 있는데 전화가 왔어요. 저녁에 돌아올 때는 아침에 나온 집이 아닌 다른 집으로 오라고 하더군요. 나도 모르게 이사를 했다는 거예요∼허허. 집에서는 내놓은 사람이지요.”

평생 공부만 하고 살아 온 학자의 인생이라 가족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도 그를 가족에게 돌려보내기에는 그에 대한 학계의 기대가 너무 크다.

가끔 찾아뵙겠다며 인사를 드리고 떠나는 기자에게 김 교수는 점심식사로 사주었던 연남동 잡곡밥이 생각나면 찾아오라고 했다. 떠날 때까지 그에 관한 내용이 기사화되는 것을 사절했던 김 교수는 그 후 수 차례에 걸친 기자의 간청 끝에 기사화를 허락했다.

“학자가 언론에 자꾸 비치면 ‘매명(賣名)’한다고 비웃어요. 학자야 그냥 공부하고 글을 쓰면 되는 거지요. 그래도 김 선생 생각이 정 그렇다면 알아서 해요.”

후학은 그처럼 세파에 흔들림 없이 평생 학문에 몰두하는 학자가 세상에 널리 알려져 뭇 학자들의 본보기가 돼야 한다고 확신해 눈 딱 감고 선생의 심기를 거스리기로 했다.

김형찬기자·철학박사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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