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卷一. 四海는 하나가…(3)

  • 입력 2002년 5월 9일 15시 42분


黃帝의 세계③

은족(殷族)의 시조인 설(설)은 제곡의 아들이요, 황제의 현손이다. 설은 당요(唐堯)에게 등용되었으며 우순(虞舜)에게서 상(商)땅을 봉지로 받았다. 설이 땅을 받을 때 자씨(子氏)라는 성을 따로 받았으나, 황제의 현손인 만큼 그의 후손 탕(湯)이 세운 나라 또한 황제(黃帝)의 세계라 할 수 있다.

설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소명(昭明)이 상(商)땅을 이어받았고, 다시 그 아들 상토(相土)로부터 열두 대(代)를 내려가 천을(天乙)이 임금자리에 오르니 그가 바로 성탕(成湯)이다.

탕은 도읍을 박(박)으로 옮겨 나라를 정비하고 어진 재상 이윤(伊尹)을 얻어 힘을 길렀다.

이윤의 이름은 지(摯)또는 아형(阿衡)인데, 일찍이 탕임금을 만나 큰 뜻을 펴보고자 하였으나 길이 없었다. 마침 유신씨(有莘氏)의 딸이 탕임금의 왕비가 되어 왕궁으로 들어갈 때 잉신(잉臣·귀족집안의 딸이 시집 갈 때 데려가는 노복)을 자청하여 솥과 도마를 메고 따라갔다. 그리고 왕궁의 조리사로 일하면서 음식의 맛에 비유하여 다스림을 일깨워 탕임금으로 하여금 왕도(王道)를 지키게 했다.

어떤 이는 탕임금이 사람을 시켜 숨어사는 이윤을 찾았고, 이윤은 오히려 다섯 번이나 마다하다가 겨우 그 뜻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또 이윤은 탕임금에게 등용되고 난 뒤에도 하나라 걸왕에게 불리어 간 적이 있으나, 걸왕이 포악하고 하나라가 썩었음을 보고 박으로 되돌아왔다고도 한다.

이윤의 보좌로 슬기와 힘을 갖추게 된 탕은 이웃 갈족의 우두머리[갈백]가 하늘에 제사를 올리지 않음을 보고 군사를 내어 정벌하며 말했다.

  <이문열 신작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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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물을 내려다보면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듯이, 백성을 보면 그 나라가 제대로 다스려지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소.”

그러자 이윤이 말했다.

“현명하십니다. 남의 훌륭한 말을 귀담아듣고 따른다면 도덕이 발전할 것입니다. 백성을 자식처럼 여긴다면 훌륭한 인재들이 모두 왕궁으로 몰려들 것입니다. 더욱 노력하십시오.”

한번은 탕임금이 교외로 나갔다가 사방에 그물을 치고 비는 사람을 만났다.

“천하의 모든 것이 내 그물로 들어오게 하소서!”

“어허, 한꺼번에 모든 걸 다 잡으려 하다니!”

탕임금이 그렇게 말하고는 삼면의 그물을 거두게 한 다음에 다시 이렇게 축원하게 하였다.

“왼쪽으로 가고 싶은 것은 왼쪽으로 가게 하고, 오른쪽으로 가고 싶은 것은 오른쪽으로 가게 하소서. 오직 이 말을 따르지 않는 것들만 내 그물로 들어오게 하소서!”

그 소문을 들은 제후들은 저마다 감탄해 마지않았다.

“탕임금의 덕이 지극하시구나! 금수(禽獸)에까지 미쳤도다.”

그런데도 하나라 걸왕은 포악한 짓을 그치지 않고, 술과 여자에 빠져 지냈다. 견디다 못한 곤오씨(昆吾氏)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탕은 이윤과 함께 제후들을 이끌고 곤오씨를 정벌한 뒤에 다시 제후들과 백성을 보고 외쳤다.

“하나라 걸왕은 백성을 쥐어짜고 나라의 재물을 함부로 퍼내어서, 백성이 맥빠지고 게으르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서로 화목할 수 없게 만들었소. 그리하여 마침내는 해를 보며 ‘저 해가 언제 지려는가? 내 차라리 너와 함께 없어지리라!’라고 탄식하는 지경에 이르렀소. 하왕조의 덕이 이같이 쇠했으니 내가 정벌하지 않을 수가 없소. 내가 하늘을 대신해 징벌하도록 도와준다면 그대들에게 큰 상을 내릴 것이오!”

그리고는 크게 군사를 일으켜 걸왕을 내쫓았다.

그 뒤 탕은 하(夏)나라의 정령을 폐지하고 걸왕을 대신해 천자의 자리에 올랐다. ‘탕고(湯誥)’를 지어 제후들을 경계하였고, 역법(曆法)을 개정하였으며, 관복의 색깔을 바꾸어 흰 빛을 숭상하게 하였다.

탕임금이 죽자 외병제(外丙帝) 중임제(中壬帝)에 이어 태갑(太甲)이 제위에 올랐다. 태갑제가 포악하여 탕임금의 법령을 지키지 않고 국정을 문란케 하자 재상 이윤이 그를 내쫓고 3년이나 섭정하며 제후들의 조회를 받았다. 그러다가 태갑제가 뉘우치고 스스로 사람이 달라지자 다시 천자로 모셨는데, 이후 이윤이 남긴 그 같은 전례는 많은 찬탈자와 야심가들에게 악용된다.

태갑제 때 크게 흥성했던 은(殷)나라는 그 스물한 번째 임금인 소을제(小乙帝) 때에 이르러 쇠약해졌다. 그 아들 무정제(武丁帝)가 즉위해 나라를 부흥시키고자 하였으나 곁에서 도와줄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부험(傅險)에서 길을 닦고 있던 죄수들 중에서 열(說)이란 사람을 찾아내 그의 보좌로 일시 나라를 바로 세웠다. 뒷날 부열(傅說)로 알려진 은(殷)중흥의 공신이었다.

하지만 무정제가 죽은 뒤 은나라는 다시 내리막길을 걸었다. 다섯 대(代) 뒤 무을제(武乙帝)는 귀신을 놀리고 천신(天神)을 모욕하다가 천둥소리에 놀라 죽고, 태정제(太丁帝) 을제(乙帝)가 뒤를 이었으나 은나라의 운세를 돌려놓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을제의 아들 신(辛)이 제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주왕(紂王)이라 불리는 신제(辛帝)이다.

시호를 짓는 법[諡法]에는 ‘의로움과 선함을 해치는 것을 주(紂)라 한다[殘義捐善曰紂]’고 되어 있다. 하지만 기록에 따르면 주왕은 여러 가지로뛰어난 인물이었던 듯싶다. 그는 타고난 바탕이 총명하여 남의 충고가 필요하지 않았고 말솜씨가 좋아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꾸며대고 감출 수 있었다. 또 일 처리에 날렵해 아랫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되었고, 힘이 세어 맨손으로 사나운 짐승을 때려잡을 만했다.

그렇지만 제위에 올라 천하를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자 그 같은 뛰어남은 오히려 그에게 해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재주를 믿어 신하들을 얕보게 되었으며, 되잖은 허영으로 명성을 홀로 천하에 드높이려 했다. 남의 말을 듣지 않아 두려워할 줄 모르고, 스스로 변명할 줄 알다보니 못할 짓이 없었다.

먼저 주색에 빠져 나라를 어지럽혔는데, 달기(달己)란 미녀를 총애하여 그의 말이면 무엇이든 들어주었고, 음란한 노래를 짓게 하고 추잡한 춤을 추게 해 풍속을 더럽혔다. 백성을 쥐어짜 녹대(鹿臺)란 큰 단을 돈으로 쌓았으며, 거교(鉅橋)란 큰 창고를 곡식으로 채웠다. 또 별궁(別宮) 정원에 술로 연못을 만들고 고기를 매단 나무를 빽빽이 세워 ‘주지육림(酒池肉林)’이란 말을 뒷세상에 남겨주었다.

주가 그런 궁궐 안에다 악공들과 광대들을 불러 흥을 돋우게 하고, 벌거벗은 남자와 여자들로 하여금 밤낮으로 시시덕거리게 하니 나라에 정사란 게 제대로 펴질 리 없었다. 백성들의 원망이 높아지고, 거역하는 제후들이 늘어나자 주는 형벌을 모질게 해서 겁을 주려 했다. 기름을 칠한 구리기둥 아래 불을 피워놓고 죄수로 하여금 그 기둥 위를 걷게 해 떨어지면 타 죽게 하던 포락(포烙)이란 형벌이나 죄인의 살을 한 점 한 점 발라 죽이던 과(과)라는 형벌이 나온 게 그때였다고 한다.

그때 은나라의 삼공(三公)은 뒷날 서백(西伯)이 된 주후(周侯) 창(昌)과 구후(九侯), 악후(악侯)였다. 구후가 아름다운 딸을 주왕에게 바쳤으나 그 딸은 주왕의 음탕함을 싫어했다. 성난 주왕은 그녀를 죽이고, 아비인 구후까지 죽인 다음 포를 떠 소금에 절였다. 말리다 못한 악후가 성난 소리로 꾸짖자 주왕은 그도 죽여 포를 떴다.

두 사람이 참혹하게 죽은 일을 들은 주후 창은 탄식해 마지않았는데, 그걸 다시 누가 주왕에게 일러바쳤다. 주왕은 화를 내며 주후마저 잡아다가 유리(유里)란 곳에 가두어 버렸다.

다행히도 주후 창에게는 굉요(굉夭)와 산의생(散宜生) 같은 현명한 신하들이 여럿 있었다. 주왕이 좋아할 미녀와 좋은 말, 보배로운 구슬 따위를 구하여 바치고 저희 주군을 용서해 주기를 빌었다. 이에 마음이 풀어진 주왕은 창을 놓아주었다.

풀려난 주후 창은 다시 낙수(洛水) 서쪽의 땅을 주왕에게 바치며 포락의 형을 없이 해 줄 것을 빌었다. 그 충성을 갸륵히 여긴 주왕은 주후의 청을 들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궁시(弓矢)와 부월(斧鉞)을 내리며 주변 제후들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서방 제후들의 우두머리란 뜻의 ‘서백(西伯)’이란 호칭은 그때 생겨났다.

몸을 굽히고 재물을 바쳐 믿음을 산 서백 창이 드러나지 않게 덕을 베풀고 힘을 길러가는 동안에도 주왕은 실정을 거듭했다. 아첨 잘 하고 제 뱃속 채우기에만 바쁜 비중(費中)이란 간신을 등용하여 백성들의 원망을 사고, 다른 사람을 헐뜯기 잘하는 오래(惡來)만 믿고 총애해 다른 제후들과 멀어졌다. 상용(商容)이란 어진 이가 있었으나 써주지 않았고, 왕자 비간(比干)이 간절한 충언을 올렸지만 들어주지 않았다.

그 사이에도 서백은 한편으로는 덕으로 이끌고 다른 한편으로는 힘으로 아울러 자신을 따르는 제후들을 늘여나갔다. 그 뒤 서백이 세상을 떠나고 무왕(武王)이 왕위에 오르자 민심은 한층 주(周)로 쏠렸다. 무왕이 동쪽을 정벌하여 맹진(盟津)에 이르렀을 때 부르지도 않은 제후들이 800명이나 몰려와 권했다.

“지금 주왕의 악은 하늘에 닿았습니다. 그를 정벌하십시오”

그러나 무왕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대들은 천명을 모르고 있소. 아직은 때가 아니오.”

그런데도 주왕은 갈수록 음란하고 포악해졌다. 은나라 말기의 세 어진 이[殷末三仁] 가운데 미자(微子)가 먼저 말려도 듣지 않는 주왕을 버리고 떠났다. 그러나 비간은 남아 거듭 주왕을 말리다가 마침내 그 분노를 샀다.

“내가 들으니 성인의 염통에는 구멍이 일곱 개나 있다고 한다. 네가 홀로 어진 척 떠드는데 어디 네 염통에도 구멍이 일곱인가 보자.”

그러고는 비간을 죽여 염통을 꺼내 보았다. 나머지 한사람 기자(箕子)는 두려운 나머지 미친 척하며 남의 종살이를 하려 했지만 주왕은 그를 잡아 옥에 가두어 버렸다. 그러자 이미 나라꼴이 글렀다고 본 태사(太師)와 소사(小師)는 은나라의 제기(祭器)와 악기(樂器)를 싸들고 주나라로 달아나 버렸다.

마침내 때가 무르익었다고 본 무왕은 제후들을 거느리고 주왕을 치러 나섰다. 주왕도 군사를 일으켜 목야(牧野)에서 크게 싸웠으나 천명(天命)은 이미 은나라를 떠난 뒤였다. 갑자일(甲子日) 한 싸움에 여지없이 지고 성안으로 쫓겨 들어가 타는 불 속에 뛰어들어 죽었다. 무왕은 주왕의 목을 베어 큰 백기[大白旗]에 매달고, 달기도 찾아 처형했다.

-이렇게 황제(黃帝)의 자손이 세운 또하나의 제국 은나라는 처음 왕조를 연 성탕(成湯)으로부터 서른 대(代) 만에 주나라 무왕에게 천하를 내주고 막을 내렸다.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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