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여가는 자본주의의 족쇄 '포스트모더니즘과 여가'

  • 입력 2002년 4월 5일 17시 38분


◇포스트모더니즘과 여가/크리스 로젝 지음/최석호·이진형 옮김/380쪽/ 1만6000원/일신사

“나가 놀아라.”

어릴 때 가장 많이 듣던 소리였다. 좁은 집이 아이들 장난에 더 좁게 느껴졌던 어머니들이 어쩔 수 없이 허락하던 자유였다.

대학시절 학습했던 마르크스의 소외론을 피부로 느끼는 사무직 노동자가 됐다. 주말에 주어지는 남는 시간(여가)은 나만의 시간이고, 어릴 적 어머니의 “나가 놀아라”와 같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정신 없이 돌아다니며 놀고 난 후 몸이 파김치가 돼도, 어릴 적 그 충만했던 해방의 느낌을 가질 수 없는 이 불만족과 공허함의 기원은 어디일까?

저자인 영국 노팅엄 트렌트대 크리스 로젝 교수(사회학)는 이 책에서 그런 느낌이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여가 연구에서 여가 경험의 핵심으로 설명되는 자유, 자기 선택, 삶의 질, 만족감 등은 모더니티(근대성)의 사기(詐欺)일 뿐이라는 것이다.

책의 서두에서 이미 결론이 난 모더니티 사기극의 대안을 기대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더 읽을 필요 없다. 로젝 교수의 책은 그리 자상하지 않다. 노동을 이성의 실현과정, 즉 진보의 개념과 연관시키는 유럽의 합리주의 철학에서 모더니티의 핵심을 이끌어 내는 저자는 노동의 자투리 시간인 여가가 자기실현이나 자유로움의 환상과 어떻게 동일시될 수 있었는가를 다양한 종류의 이론들과 종횡무진 연결시키고 있다.

그는 여가의 포스트모더니즘적 대안과 관련해서는 하버마스식 절충주의로 결론을 내린다. 즉, 자연을 지배하게 했던 노동은 도구적 합리성을 대표하는 ‘호모 파베르’(공작인)의 특징이며, 진보의 이념아래 희생되었던 ‘호모 루덴스’(놀이인)의 회복을 통해 상실된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되찾자는 주장이다.

이 책의 원제목은 ‘여가의 탈중심화:여가론을 다시 생각하며’다. 이렇게 소박한 제목이라면 로젝의 대안이 성에 차지 않는다고 화 낼 이유가 전혀 없다. 오히려 천편일률적인 기존의 여가론에 대한 자세한 반박서라고 본다면 이 책은 매우 가치 있고 독보적이다.

또한 교과서적 학문분류 틀에 잘 들어맞지 않는 짐멜, 엘리아스, 바우만, 고프만, 부르디외 등의 문화이론을 여가 이론의 틀에서 새롭게 소화해내는 저자의 발상은 감탄을 자아낸다. 확실한 결론을 기대하는 모더니스트적 책 읽기를 포기한다면 네크로피버(necro-fever, 죽은 스타의 이미지와 놀기)와 같은 포스트모던적 놀이에 대한 그의 해석은 매우 상쾌하게 느껴질 것이다. 1980∼90년대의 문화연구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하는 의문의 실마리를 제공해주는 알짜배기 책이다.

노동과 여가의 이분법을 고수하는 한 주 5일 근무제가 새로운 삶을 가능케 해 주리라는 환상은 미리 깨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대신 “일하듯이 놀고, 놀듯이 일할 수 있는 삶”을 기획할 수 있다면 로젝 교수의 막연한 포스트모더니즘적 여가는 산업사회의 왜곡된 노동과 여가의 관계를 대체하는 구체적 기회가 될 것이다.

김정운 명지대 여가정보학과 교수·문화심리학

cwkim@mju.ac.kr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