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이 몰려온다…「설악」연지…「한라」 곤지…

  • 입력 1997년 9월 25일 07시 26분


놀라워라. 붉디 붉은 단풍떼가 우우우 남하하고 있다. 하루에 약 25∼40㎞씩, 산마루에서 산자락쪽으로는 하루에 약 40∼60m씩. 백두산에서부터 줄달음쳐온 단풍떼는 한반도 등뼈인 백두대간을 타고 개마고원 묘향산 금강산을 거쳐 마침내 설악산 대청봉에 불을 붙였다. 마치 활활 타오르는 봉홧불처럼.하나의 불씨가 광야를 태우듯 설악의 붉은 단풍은 서서히 남녘의 산하를 태우기 위해 불꽃 심지를 돋우고 있다. 설악의 단풍은 화려하다. 신새벽의 안개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붉은 단풍은 너무 붉어 아득하다. 기상청은 내달 13일경이 피크라고 예보한다. 우뚝 우뚝 하늘로 치솟은 푸른 침엽수와 어우러진 오대산의 단풍은 수십년 친구처럼 소박하고 담백하다. 지리산은 어떤가. 핏빛으로 타오르는 피아골의 단풍을 빼놓을 수 없다. 산을 불지르고(산홍) 계곡의 물을 온통 붉게 물들이고(수홍)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마저 발그스레 달아오르게 한다는(인홍) 피아골 삼홍소부근의 단풍은 빨갛게 익은 숯불처럼 손을 대면 금방이라도 델 것 같다. 내장산의 단풍은 바라만 봐도 그저 숨이 막힌다. 눈이 아슴아슴하다. 그너머 백양사의 아기단풍(당단풍)은 단아하고 깜찍하다. 까르르 아기 웃는 소리가 들린다. 문득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 보이는 날, 배낭하나 짊어지고 백양사에서 내장산으로 넘어오는 안개낀 새벽산길을 한번 걸어보라. 왜 사는지. 나는 도대체 뭔지. 아둥바둥 이렇게 꼭 살아야만 되는 것인지…. 회한의 상념들이 다발로 피어오른다. 나무도 가을이 되면 가슴앓이를 한다. 잎들은 뿌리로 돌아가기 위해 「붉은 수의」로 옷을 갈아 입는다. 담담하다. 울고 불고 앙앙불락하지 않는다. 죽음속에 삶이 있고 잎속에 뿌리가 있다. 가을산하는 수채화 같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앞에 선 내 누님같은 가을 꽃들. 붉은 단풍잎들. 꽃은 피우기는 어려워도 시드는 것은 금방이다. 잎은 붉게 물들기는 힘들어도 지는 것은 눈깜짝할 새. 붉디 붉은 단풍잎은 「눈물속에 핀 꽃」이다. 결국 아름다움도 사랑도 꿈도 모든게 고행이다. 「저기저기 저 가을…초록이 지쳐 단풍드는 날」. 붉게 물든 숲속길을 한번 걸어 보면 어떤가. 길이 보이는가. 도대체 우리네 삶의 끝은 어디인가. 해는 지고 어두운데 갈 길은 멀다. 〈김화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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