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0억의혹 권력 핵심부 비화

  • 입력 2002년 10월 4일 23시 08분


엄낙용(嚴洛鎔) 전 산업은행 총재가 현대상선에 대한 4000억원 대출이 한광옥(韓光玉) 전 대통령비서실장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는 ‘메가톤급’ 증언을 함에 따라 ‘대북 비밀지원’의혹의 불똥이 권력 핵심부로 비화됐다.

▽한 전 실장 개입 배경〓엄 전 총재의 증언대로 이근영(李瑾榮) 금융감독위원장이 “한 실장의 전화가 와서 (현대상선 대출을) 나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고 토로했다면 이는 결국 현대상선 대출금이 정치적인 목적과 판단에 따라 쓰여졌을 것임을 강력히 시사하는 대목이다.

그의 증언이 주목되는 것은 현대상선 대출이 경제논리에 의한 산업은행의 자체 판단에 따른 것이 아니라 권력 핵심부가 정치적 목적에서 재정경제부와 금감위 산업은행 등을 동원했다는 점 때문이다.

또 엄 전 총재가 청와대에서 열린 경제장관회의에서 이 문제를 제기했을 때 이기호(李起浩) 전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이 “알았다. 걱정하지 말라.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대답한 대목이나 김보현(金保鉉) 국가정보원 3차장이 “알았다. 우리가 처리하겠다”고 말한 것은 현대상선의 정상적인 대출금이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얘기란 점에서 의혹이 증폭되고 있다.

당시 청와대에서 열린 경제장관 회의에서 이 문제가 은밀하게 논의됐다는 점도 적어도 대통령비서실장과 수석비서관들간에는 무언의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다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청와대와 민주당측은 엄 전 총재 증언을 “인사 불만에 따른 돌출적인 과잉행동”이라고 의미를 애써 축소하고 있지만 그의 증언이 상당히 구체성을 띠고 있어 그동안 ‘민간기업 일’이라며 논평조차 꺼렸던 청와대도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됐다. 엄 전 총재는 더욱이 “현대아산은 수시로 북한으로 돈을 보내지만 너무 무질서하게 이뤄지고 있어 깨끗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해 4000억원이 북한으로 넘어갔을 가능성을 거듭 시사했다.

▽남는 의문점〓한 전 실장이 거론된 만큼 현 정권이 어디까지 개입됐는지 여부가 밝혀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당 주장대로 박지원(朴智元) 전 문화관광부 장관이 당시 대북 사업을 주도하며 산업은행 자금을 동원했는지가 관심사다. 실제로 정가에서는 경제문제에 밝지 않은 한 전 실장보다는 이 전 경제수석과 박 전 문화부 장관이 개입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아무튼 대북 송금설의 핵심은 과연 산은 대출금 4000억원이 북한으로 갔는지의 여부지만 현대상선이 스스로 대출금 사용처를 공개하거나 당국에서 계좌추적을 하지 않을 경우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한편 이 금감위원장은 9월말 금감위 국정감사 때 “2000년 8월 청와대 회의 때 엄 전 총재의 현대상선 보고를 처음 들었고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4일 국감에서는 “엄 전 총재가 ‘김충식(金忠植) 사장이 4000억원은 우리가 쓴 돈이 아니니 갚을 수 없다’는 말을 해 함께 걱정하고 위로해줬다”며 1주일 만에 말을 바꿔 위증 논란이 일고 있다.

최영해기자 yhchoi65@donga.com

김두영기자 nirvana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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