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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1년 7월 8일 18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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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에 창간된 동아일보의 구 사옥도 키다리 빌딩 숲 속에 낮기는 하지만 옹골차게 터를 잡아 오래된 건물을 부수고 현대식 건물 짓는 일을 뚝딱뚝딱 잘도 해치우는 한국인에게 역사가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있다.
광화문의 의미에 대해 우리는 무심하지 않다. 6월 항쟁의 피날레라 할 수 있는 87년 7월9일. 경찰이 발사한 최루탄에 맞아 절명한 연세대생 이한열씨의 노제에 참석했던 수십만명 가운데 10만여명의 학생과 시민이 독재타도와 민주화를 절규하며 광화문 거리에 드러누웠었다. 2000년 1월1일 새벽, 새 천년을 맞는 축제도 광화문에서 열렸다.
일반적으로 프랑스 파리의 샹젤리제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로 통한다. 엄청난 인파가 유유히 걸을 수 있는 넓은 보도에, 영화관 식당 상점이 즐비한 샹젤리제는 광화문에 비하면 훨씬 사람 사는 거리답다. 샹젤리제를 닮고 싶어서인지 서울시는 몇 년 전 광화문 네거리에 마로니에를 심기도 했다.
다행스럽게도 최근 샹젤리제에 없는 모습이 광화문에 등장했다. 축구를 사랑하는 ‘붉은 악마들’의 출현이다.
상상해 보라. 한국인들 사이에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점점 식어가고 있는 요즘 젊은이들이 동아일보 사옥에 걸린 전광판으로 TV중계를 보며 불편한 길바닥에 앉아 목이 터져라 한국팀을 응원하는 모습을. 붉은 악마 회장인 한홍구씨는 축구를 좋아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젊은이들이 자발적으로 광화문에 나와 힘껏 응원하다 경기가 끝나면 귀가할 뿐이라고 담담하게 설명했다. 그렇지만 젊은이들이 모여 국가를 대표해 외국팀과 싸우는 한국팀을 응원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담담할 수가 없다. 기자는 그들을 볼 때마다 이 나라의 장래가 밝다는 뿌듯함과 함께 광화문이 살아 숨쉰다는 생동감을 느꼈다.
그런데 붉은 악마를 위해 물 한 잔, 편한 자리 하나 제공하지 못한 정부가 이들의 나라사랑을 막으려 하고 있다. 6월21일 발표된 공정거래위원회 조사결과에 따르면 동아일보사의 계열사인 동아닷컴이 운영하는 전광판이 처벌대상이 됐다. 공정위는 동아닷컴이 값을 치르지 않고 동아일보가 제공한 기사정보 콘텐츠를 전광판에 게재해 매출을 올렸다며 과징금을 부과했다. 이에 대해 동아일보가 동아닷컴으로부터 전광판에 게재된 기사의 사용료를 받아야 한다면 동아닷컴은 정부가 정한 공공단체의 공익캠페인을 게재할 때도 해당 관청에 사용료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냐며 부당성을 지적했다.
공정위 조사가 그대로 굳어지면 동아닷컴은 전광판을 꺼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붉은 악마들은 광화문에서 떠나야 한다. 젊은이들의 가슴속에서 꿈틀꿈틀 용틀임하던 애국심도 잦아들 것이다. 광화문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비극적인 에필로그가 아닐 수 없다. 정부는 이 같은 상황을 헤아리고나 있는지 묻고 싶다.
hnb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