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마이너 리그(1)

  • 입력 1998년 10월 20일 18시 52분


의형제 ①

어느 남자 고등학교 2학년 교실이다. 학생들은 모두 선 채로 앉은 채로 돌아다니는 채로 왁자지껄 떠들고 있다. 쉬는 시간인 모양이다.

교실 한가운데의 책상에서 한 학생이 하얗게 얼굴이 질린다. 그는 다급한 목소리로 옆자리 짝에게 묻는다. 야, 너 물리숙제 했냐? 짝이 대꾸한다. 아니.

둘은 함께 앞자리 친구의 등을 쿡쿡 찌른다. 야, 야, 물리숙제 해왔어? 어? 참, 안 했다.

오른쪽 대각선에 있는 친구의 등도 찔러본다. 너, 물리숙제 했어, 안 했어? 안 했는데.

그들 넷은 다들 안도하는 표정이 된다.

수업시작을 알리는 차임벨이 울리고 물리선생이 교실로 들어선다. 똑바로 내려놓으면 곤장 같고 옆으로 세우면 도리깨 같은 모양의 다목적 티(T)자를 옆구리에 끼고서. 경례를 받는 둥 마는 둥 물리선생은 흘러내릴 리도 없는 고수머리를 쓰윽 쓸어올린다. 옥니 사이로 새어나오는 그의 목소리는 먹구름처럼 음산하고 천둥처럼 쉬어 있다. 숙제 안 한 놈 일어나. 순간 디디티라도 뿌려놓았는지 교실 안은 벼룩 움직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바다 같다.

그때 교실 한가운데가 마치 바다에 엎드려 있던 거북이등처럼 조금 꿈틀거린다 싶다.

이윽고 그들 네 명이 소리없이 일어나 선다. 평면에서 솟아오른 이질적인 입방체이다.

반 전체는 침을 꼴깍 삼킨다. 더이상 일어나는 사람은 없다. 아무도. 믿을 수 없게도 숙제를 안 한 것은 62명 중 단 네 명뿐이다.

―나는 왜 이렇게 늘 재수가 없을까.

넷 중 하나가 생각한다.

―자신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자!

또 하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나머지 둘은 ‘표본조사를 믿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야. 통계나 확률이란 모두 우연한 수치일 뿐이라니까. 이런 한심한 놈들하고 같이 서 있다니 일문(一門)의 수치다’라거나

―내가 지금 왜 서 있는 거지? 다리 아프게’라고 생각하는 중이다.

물리선생은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간다. 슬리퍼 소리와 티자를 이용하여, 목발을 짚은 상이군인 같은 무시무시한 효과음을 내면서. 그들은 물리선생의 지시에 따라 우선 대바구니를 짜거나 딱지를 접는 방법으로 네모나게 엮인다. 그런 다음 모두가 예상했던 일이 시작된다.

교무실로 끌려간 그들이 물리선생의 ‘편달’(鞭撻)에서 벗어난 것은 해가 뉘엿뉘엿 기울 무렵이다.

하강식이 끝나 국기봉은 비어 있고, 농구 골대 옆에서 놀고 있는 조무래기 몇 명뿐 학교는 서럽게 조용하다. 서쪽 하늘에는 붉게 물든 구름이 점점 회색으로 변해가는 중이다. 자갈길을 따라 심어진 백양나무 잎들이 저물녘 바람에 흔들린다. 딴 세상 같다. 담장 밖의 자동차 소리 또한 아득하게 들린다. 그들은 문득 인생의 덧없음에 대해 생각한다.

<글:은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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