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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1998년 10월 13일 19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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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비디오 테이프가 천천히 감기듯 느리고 비현실적인 순간이었다. 그것을 몇 초의 순간이었다고 재는 것은 무의미한 짓이다. 그것은 시간 바깥에서 일어난 일이었으니까. 생은 마치 영사막 위에 흘러간 빛처럼 창백하고 무가치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마주 보았고 한 순간 우리의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수긍했고 서로에 대해 완벽하게 공감했고 일치했다.
우리는 눈을 한번 깜박인 뒤 둘이 동시에 얼굴을 앞으로 돌렸다. 그리고 다시 한번 충돌…. 이것이 내 욕망이 선택한 죽음의 모습이었는가. 나는 두 눈을 활짝 뜬 채 보라빛 회오리속으로 빠져들어갔다. 마지막 순간엔 수의 웃는 얼굴이 보자기처럼 커다랗게 커다랗게 나를 덮었다.
나는 다리가 끼이기는 했지만 다친 부분은 거의 없어 보였다. 그러나 핸들에 얹힌 규의 머리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피투성이었다. 우리는 잠시 뒤 요란한 신호음을 울리며 도착한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갔다.
놀랍게도 병원 응급실에는 이미 호경과 규의 가족들이 와 있었다. 호경은 쇳조각같은 눈으로 여전히 살아 있는 나를 노려보고는 나가버렸고 규의 아내와 아이들은 계속해서 내 얼굴을 노려보았다. 나는 여러 가지 검사를 받고 5일 뒤에 퇴원했다. 간호원에게 들으니 규는 오른쪽 다리가 부러졌고 뇌 손상이 우려되기는 하지만 크게 우려할 바는 아니라고 했다. 한 달 정도의 입원 치료를 받아야 할 거라고 했다.
퇴원하던 날 호경은 병원으로 와 집까지 나를 태워다 주었다. 그리고 난 후 며칠이 지나도록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확인해보니 수는 할머니 집에 가 있었다. 나는 텅빈 집에 낮과 밤의 좁다란 틈속의 중간지대에 누워 하루하루를 보냈다. 잠들 수도 없었고,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고 슬프거나 괴롭지도 않았다.한달쯤이 지난 어느날 차를 가지러 택시를 타고 휴게소로 갔다.
아주 맑은 날이었다. 한겨울의 휴게소는 유난히 고적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캐시밀론 외투를 입은 할아버지 한 사람만 있을 뿐이었다. 용경은 어디 갔느냐고 물으니, 그 여자는 지나다니던 트럭 기사와 눈이 맞아 어느 날 걸레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살림살이와 가게 물건을 싹 걷어싣고 날랐다고 전해주었다. 어디서 장사를 하려고 했는지 과자봉지는 물론이고, 국수 그릇까지 다 싣고 가버렸다고….
나는 커피를 뽑아들고 바깥에 놓인 플라스틱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람 한점 없는 따뜻한 겨울 한낮이었다. 주스 병을 산처럼 높이 쌓아올려 실은 8톤 트럭이 고갯마루 국도를 위태롭게 지나간 뒤 휴게소집에서 할아버지가 나와 바깥 수돗가에서 물을 받고, 커피 자동판매기를 활짝 열어 커피와 물과 종이잔을 보충했다. 전에 없었던 검은 개 두 마리가 잔디 위를 어슬렁거렸다. 그리고 한 여자가 왔다.
여자는 흰색 소형차를 타고 왔는데 머리에는 녹색 펠트 모자를 쓰고 있었다. 검은 천이 둘러진 평범한 형태의 겨울 모자. 모자는 조금 낡았지만 거의 손상된 곳은 없었다. 모자를 본 나는 아, 하며 종이잔을 잔디 위에 툭 떨어뜨렸다. 여자는 차를 휴게소 집 벽의 그늘에 붙여 세우고 잠시 그대로 앉아 있더니 갑자기 차에서 내려 종이 커피를 한잔 뽑았다. 종이 커피를 기다리는 동안 여자는 하늘색 격자 창문으로 이루어진 공중전화 부스를 둘러보았다.
<글:전경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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