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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1998년 9월 1일 19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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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와 다른 인간일지도 모른다. 몇겹의 옷을 입은 사내, 뿔을 숨긴 짐승, 네 개의 다리로 걷는 사내, 혹은 날개를 숨긴 새…… 아무래도 그는 위험한 프로그램을 가진 자극적인 남자였다.
구름모자 벗기 게임은 서서히, 그러니까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내 가 모르는 순간순간 나에게 익숙해 져갔다. 그리고 마침내는 구름모자 벗기 게임이라는 것이 내가 뚫고 지나가야만 하는 운명적인 터널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로서 그 게임은 단순히 사랑한다고 말해서는 안되는 게임이 아니라, 누구도 모르는 암흑 속에 나를 내팽개치는 게임이었다.
내 입안에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그 외침이 화염처럼 터져 나올 때까지, 내 속에 그런 상상할 수 없는 힘이 차오를 때까지 나를 방임하고 그 힘에 순종하고 철저히 맹목적으로 나를 집중시키는 게임. 그 힘은 나를 가둔 항아리를 훼손시켜 금가게 하고 산산조각 내고 마침내 다른 곳으로 내 생을 흘러가게 할 것이었다. 그것은 자해에 가까운 꿈이지만, 삶이란 실은 그렇게해서 잠에서 깨어나 다시 출발하기 마련이었다.
장마가 시작되었다. 한결같은 빗줄기가 손님이 들지 않는 때묻은 중국집의 긴 주렴처럼 지겹도록 내렸다. 한결같은 소리로 한결같은 굵기로, 한결같은 속도로. 가끔은 거센 바람이 불고 한낮이 밤처럼 캄캄해지며 천둥과 번개가 지붕을 쪼듯이 무섭게 내려치는 날도 있었다. 하늘이 이제 막 뽑혀 나온 고목의 흰 뿌리처럼 새하얗게 갈라지고 어디선가 내달려 온 휘파람 소리가 소용돌이치며 집을 친친 휘감았다. 번개가 떨어질 때면 집안에서 젖은 종이에 불을 붙여 연기를 피웠다. 언젠가 할머니들에게서 그렇게 해야 한다고 들은 기억 때문이었다.
우기 동안 나는 차를 몰고 많이 돌아다녔다. 비가 오면 관절이 더욱 아픈 늙은이들만 남아서 사는 울적한 산촌과 탈의장과 튜브 대여점 민박집 따위가 비를 맞고 있는 텅빈 해수욕장 마을과 종업원들과 개들이 함께 낮잠에 빠져버린 바닷가의 횟집거리나 포장도 되지 않아 누런 흙물이 흘러내리는 좁고 경사가 심한 산림로를 따라 끝까지 올라가 보곤 했다. 차창엔 누가 매달려서 우는 듯이 끊임없이 빗물이 흘러내렸다.
규와는 두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계곡길에서 서로 비켜갈 때 그가 경적을 울렸다. 내가 주춤대며 속도를 늦추자 그가 차창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었다. 빗줄기가 거세게 내려쳐서 금새 얼굴이 빗물에 젖었다. 그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무언가를 묻는 눈으로 빤히 쳐다보더니 이내 비켜 지나갔다.
아침에 남편과 수가 떠난 뒤, 나는 커피를 뽑아 현관 앞 테라스에 내놓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숲에는 비가 오는데도 새들이 이 나뭇가지에서 저 나뭇가지로 튀어오르며 서글프게 울고 무덤가의 홍화밭엔 허리가 꺾어진 듯 굽은 노파가 파란색 우의를 입고 풀을 매고 있었다.
오렌지색 가장자리에 붉은 물을 들인 듯한 작고 단단한 홍화꽃이 드문드문 개화하기 시작했다. 초경을 맞는 소녀들의 작은 가슴을 연상시키는 꽃. 그 넓은 홍화밭에 홍화꽃이 다 피면 어쩐지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집 앞 무덤과 말꼬리처럼 긴 푸른 옥수수 잎들과 비를 맞으며 조금씩 흔들리는 숲과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아랫집 여자 애선이 한 손엔 접시와 비닐 봉지를 들고 한 손으론 우산을 받고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글:전경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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