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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1년(명종 6년) 1월 경북 성주군 선석산 아래 태봉(胎峰). 조선 중기 문신 이문건은 남몰래 손자 이수봉의 탯줄을 태봉에 묻었다. 이곳에는 조선왕조 왕자들의 태를 묻는 태실(胎室)이 있었다. 왕실이 택한 곳인 만큼 풍수지리 명당이었다. 왕족이 아닌 사람이 감히 태실을 범했다간 귀향 등 중벌을 각오해야 했지만 사화에 휘말려 유배를 당하고 외아들까지 잃은 이문건에게 하나뿐인 손자는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소중한 존재였다. 이문건은 후손의 번성을 간절히 기원하며 태를 묻었다. 조선왕조 태실의 역사적 연원과 가치를 조명한 ‘태실’(책읽는사람들)이 최근 출간됐다. 향토사학자이자 서삼릉태실연구소장인 김득환 씨가 지었다. 태실은 왕실에서 자손을 출산하면 그 태를 봉안하는 곳으로, 왕세자나 왕세손의 태는 특별히 석실에 보관했다. 예로부터 태는 사람의 생명력이 담긴 것으로 보아 귀중히 여겼고 왕실의 태는 국운과 관련된 것으로 여겼다. 이에 따라 왕실 차원에서 태실이 들어설 명당을 물색했고, 이를 관장하는 국가기관인 ‘태실도감’을 따로 두었다. 태조 이성계부터 27대 임금 순종까지 조선 왕 대부분의 태실이 조성됐다. 이 책은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태항아리의 문화재적 가치도 소개한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이 책을 보면서 영화 ‘워터월드’(1995년)의 역설이 떠올랐다. 영화에서 세상은 기후변화로 빙하가 녹아내려 온통 물바다가 된다. 사람들은 인공섬을 지어 간신히 생존을 유지하며 흙 한 줌, 물 한 컵을 얻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 자원을 낭비하며 소비 자본주의의 온갖 쾌락을 즐기던 인류에게 남은 것은 극단적인 빈곤뿐이다. 캐나다 출신의 대표적인 환경론자인 저자는 세상이 워터월드와 같은 비극으로 치닫기 전에 기후변화에 적극 대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의 주장은 단순히 신재생에너지를 늘리자는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이른바 역성장(de-growth)을 해서라도 소비를 줄이고 경제 규모를 축소해야 한다는 과감한 접근법을 제시하고 있다. 상황이 그리 한가하지 않다는 얘기다. 저자는 “기후변화를 다루는 정부 간 협의체가 1990년대부터 90회가 넘는 공식 회의를 열며 20년 넘게 활동했지만 아무런 진전을 보지 못했다”고 일침을 놓는다. 말잔치가 계속될 동안 1990∼2013년 사이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무려 61%나 급증했다. ‘그렇다고 역성장이라니 너무 극단적인 게 아닌가?’라는 의문이 드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경제성장을 해야 그 돈으로 환경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거나, 친환경 과학기술에 기대를 걸어보자는 주장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저자는 많은 사람들이 해결책으로 제시한 이런 주장들이 헛된 꿈이자, ‘주술’적인 사고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예컨대 영국 버진그룹 최고경영자(CEO) 리처드 브랜슨은 10년간 항공과 철도사업 부문에서 벌어들이는 수익(30억 달러) 전부를 화석연료 대체 기술 개발에 투자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약속한 10년이 끝날 동안 브랜슨이 투자한 금액은 10%에도 미치지 못했다. 더구나 버진그룹은 화석연료 산업과 연계된 사업으로 돈을 벌고 있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저자는 언제 끝날지 모를 친환경 과학기술 개발에 목매지 말고 당장 실천할 수 있는 소비 감축에 나설 것을 주문한다. 사치품에 대한 중과세로 불필요한 소비를 막고, 석유 시추 등 각종 채취산업을 억제하며, 에너지의 과잉소비를 부르는 세계화를 규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아예 노골적으로 “우리는 소비 수준이 폭등했던 1980년대 이전 즉 1970년대 생활수준으로 복귀해야 한다”고 썼다. 세계화가 기후변화를 가져온다? 언뜻 이해가 안 갈 수도 있지만 엄연한 진실이다. 수많은 물류와 여객을 선박과 비행기로 수송하는 과정에서 이산화탄소가 대거 배출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2002∼2008년 중국의 이산화탄소 배출량 중 45%가 수출용 상품 생산에서 비롯됐다. 세계화의 첨병인 국제무역협정이 보호무역 규정을 적용해 각국의 신재생에너지 정책을 가로막는 현실도 간과할 수 없다. 예를 들어 2010년 미국은 중국의 풍력발전 지원 정책에 대해 “자국 산업을 지원하는 보호무역주의 성격이 짙다”며 공식 비판했다. 이에 따라 저자는 현지 생산이 불가능하거나, 현지에서 만들 때 훨씬 많은 이산화탄소가 배출되는 상품에 대해서만 장거리 무역을 허용하는 방안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른바 ‘저녁이 있는 삶’으로 상징되는 노동시간 감축도 저자의 대안 중 하나다. 정원 가꾸기나 요리 등 에너지 저소비 활동은 여가시간이 있는 사람이 참여할 수 있다는 논리다. 결국 저자가 책 제목에 언급한 ‘이것’은 자본주의 기본 원칙에 반하는 탈성장주의, 탈소비주의가 삶을 바꾸고 기후변화에 시달리고 있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뜻 아닐는지.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신라시대 지방 관직인 촌주(村主)의 이름이 새겨진 청동그릇이 경북 경주 황룡사지에서 발견됐다. 문화재청은 “신라문화유산연구원이 황룡사 남쪽 담장 외곽 발굴 현장에서 통일신라 말기에 폐기된 것으로 추정되는 우물을 발견했다”며 “우물 안에서 ‘달온심촌주(達溫心村主)’라고 적힌 청동접시와 토기, 중국 백자 조각, 평기와, 청동 칼, 씨앗껍질 등을 출토했다”고 16일 밝혔다. 전문가들은 달온심에 대해 인물 이름이나 지명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촌주의 이름이 적힌 유물이 발견된 것은 처음이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삼국사기 등 사서에서 비슷한 명칭의 지명이나 인명이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황룡사는 553년(진흥왕 14년) 창건된 신라시대 최대 규모의 국가 사찰. 이와 관련해 이번에 발견된 우물과 청동그릇의 성격이 무엇인지가 관심이다. 발굴팀은 우물이 담장 밖에서 발견돼 황룡사 경내에 있었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사찰 부대시설 중 하나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아이고 망측시러버라. 뭐 이래 생긴 게 여깄노….” 1986년 7월 18일 경북 경주시 용강동 고분 발굴 현장. 한 대학원생이 흙이 잔뜩 묻은 조각상 하나를 조유전 당시 경주고적발굴조사단장(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74)에게 가져오자 이를 본 인부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조유전과 발굴단원들의 표정에도 당혹감이 떠올랐다. 누가 봐도 전형적인 남근(男根) 형상이었다. 신성한 무덤에 남근상이라니 무슨 조화란 말인가…. 호기심에 서둘러 흙을 닦아 낸 단원들은 조각상의 실체를 접하고 더 놀랐다. 남근이 아니라 얼굴 없는 여인의 전신상이었다. 진흙에 뒤덮이는 바람에 여인상을 남근상으로 오인하는 촌극을 빚은 것. 한국 고고 발굴 역사에서 최초로 발견된 토용(土俑·인물이나 동물을 흙으로 구워 만든 것)이었다.○ 꺼진 불도 다시 보자 지난달 25일 30년 만에 용강동 고분을 다시 찾은 조유전은 “여기가 발굴했던 그곳이 맞나 싶을 정도로 많이 변했다”고 말했다. 국가사적 제328호로 지정돼 깔끔하게 복원 정비된 고분 주변은 온통 아파트 숲이었다. “예전에 논밭투성이였어요. 집은 고작해야 두세 채 있었을까. (고분을 가리키며) 여기는 그야말로 쓰레기장이었지.” 조유전은 1986년 6월 16일 이원홍 문화공보부 장관의 지시로 용강동 고분 발굴을 시작했다. 앞서 경주 지역 향토사학자들의 모임인 신라문화동인회의 요청을 계기로 정양모 당시 국립경주박물관장이 발굴을 건의했다. 그는 고분을 보자마자 한숨부터 내쉬었다. 주민들이 버린 쓰레기 더미가 쌓인 봉분 위로 오래전 심은 소나무 한 그루가 덩그러니 자라고 있었다. 봉토는 여기저기 파였고, 외곽 둘레돌(호석)은 상당수가 뽑혀 나가 집 정원 장식용 등에 쓰였다. 무엇보다 봉분 표면에 여러 개의 도굴 흔적이 뚜렷했다. 높이가 10m가 넘는 데다 거대한 돌무지가 쌓여 있는 적석목곽분과 달리 용강동 고분과 같은 돌방무덤(석실분)은 약 3m 높이로 규모가 작아 도굴 피해가 극심했다. 이미 수차례 도굴을 당한 폐고분이 분명해 보였다. ‘과연 여기서 유물이 나올까….’ 신라 왕경 유적 발굴로 시간에 쫓기던 조유전은 내심 “빨리 끝내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꺼진 불도 다시 보자고 했던가. 발굴에 착수한 지 한 달 만에 발견된 토용으로 나른했던 현장에 느닷없이 비상이 걸렸다. 조유전은 단원들에게 “여인상의 머리를 반드시 찾아내라”는 특명을 내렸다. 시신이 안치된 현실(玄室)과 연도(羨道·고분 입구와 현실을 연결하는 통로)를 가득 채운 돌과 흙무더기를 일일이 채질하고, 시신 받침대(시상) 주변을 샅샅이 뒤졌다. 여인상의 머리는 끝내 나오지 않았지만, 그 대신 시상 앞 남측 방향에서 채색된 인형(人形) 토용 28점과 말 모양 토용 4점, 토기(土器) 15점 등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현실 벽면을 따라 청동으로 만든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 7점도 함께 출토됐다. 신라의 매장문화를 해석할 수 있는 획기적인 자료가 대거 발굴된 것이다.○ 실크로드 문명 교류의 흔적 고고학계는 용강동 고분을 신라의 대외 문화 교류사를 푸는 핵심 열쇠라고 본다. 토용의 외형과 복장에서 당나라와 실크로드 문화의 영향이 물씬 풍기기 때문이다. 조유전이 용강동 고분에서 최고로 꼽는 서역(아라비아)풍의 인물 토용도 그런 맥락에서 읽힌다. “턱수염이 수북한 이 토용은 언뜻 봐도 우리 조상이 아니에요. 여러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나는 이 사람이 신라 귀족의 호위무사가 된 외국 용병이 아닐까 상상합니다. 당시 순장(殉葬) 대신 인형으로 주인 곁을 지킨 게 아닐까….” 통통한 얼굴형의 여성을 선호한 당나라의 영향으로 용강동 고분에서 발견된 여인 토용은 한결같이 후덕한 인상이다. 복색도 당풍(唐風)이 뚜렷이 반영돼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는 진덕여왕 3년(649년) 중국의 의관을 받아들였고 문무왕 4년(664년) 부인들의 의복도 중국식으로 바꾼다. 이에 따라 고고학계는 이 무덤이 신라가 당나라 복식을 채용한 7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고고학)는 “중국식 의복을 받아들인 연대가 사서에 명확히 기록된 만큼 용강동 고분은 신라 후기 석실 고분과 토기의 연도를 추정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경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로다(Frailty, thy name is woman).” 누구든 한 번쯤 들어봄 직한 ‘햄릿’의 명대사다. 올해 셰익스피어 400주기를 맞아 ‘셰익스피어 4대 비극’(민음사)이 지난달 주간판매량 5위까지 올랐다. 400년 전 죽은 작가이지만 한국에서 그의 작품은 생명력을 잃지 않았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쓰인 ‘홍길동전’의 문장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는 게 현실이다. 우리 고전은 왜 잊혀졌을까. 이 책은 자칫 따분한 인상을 주는 고전문학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한문학자로 인문학계 파워라이터인 저자는, ‘서얼들의 비통하고 우울한 소리’라며 정조가 폄하한 패관소품을 재평가하고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허균 이용휴 박지원 등 7명의 문인은 상투적인 문체를 배격하고 자유로운 예술혼을 구가했다는 게 저자의 시각이다. 이를테면 이용휴가 제자에게 잠언으로 준 글이 그렇다. “수많은 성인은 지나가는 그림자니 나는 내게로 돌아가리라. 갓난아이와 대인은 그 마음이 본래 하나다. 하늘에 맹세하노라. 이 한 몸 다 마치도록 나 자신과 더불어 살겠노라.” 공자 왈 맹자 왈 하던 성리학 국가 조선에서 꽤나 혁명적인 발언이다. 성인들의 가르침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개성을 따르겠다는 파격 선언이다. 허균이 절친 이재영에게 준 척독(尺牘·짧은 편지)은 또 어떠한가. “밥상을 대할 때마다 얼굴에 땀이 흐르고 먹은 게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네. 서둘러 빨리 오게. 설령 이 일로 남들의 비방을 받을지라도, 나는 전혀 개의치 않을 것이네.” 작은 마을의 사또로 부임한 허균이 어려움에 처한 친구에게 보낸 글이다. 반역을 꿈꾼 허균의 호탕함과 겹쳐 요즘 식으로 “사회규범? 남들 시선? 그딴 거 아몰랑” 같은 태도가 느껴져 흥미롭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조선 성리학계의 이단아 화담(花潭) 서경덕(1489∼1546)의 사상을 조명하는 학술회의가 열린다. 한국고전번역원(원장 이명학)은 ‘화담 서경덕의 사상과 문학’ 학술대회를 28일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 600주년기념관에서 개최한다. 화담은 독특한 기(氣) 철학과 자연법칙 연구로 조선시대 사상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최일범 성균관대 교수가 ‘화담 서경덕의 성리학과 역학사상’ 주제발표를 통해 화담의 기일원론(氣一元論)의 철학적 의미를 고찰한다. 이어 전호근 경희대 교수가 화담의 격물(格物) 이론과 기 철학을 분석한다. 최유진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위원은 ‘후대 문학에 영향을 미친 화담의 시학적 코드’에서 화담에 대한 후대의 형상화와 시학적 의미를 다양한 차원에서 재조명한다. 권순긍 세명대 교수는 화담의 도술(道術) 일화가 당대에 어떤 함의를 갖고 있었는지 소개한다. 김형찬 고려대 교수가 좌장을 맡은 종합토론에는 김시천 인천대 교수와 김형술 서울대 교수, 장경남 숭실대 교수 등이 패널로 참여한다. 이명학 한국고전번역원장은 “화담은 독특한 사상체계를 완성했지만 그동안 상응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며 “이번 학술대회를 계기로 그의 사상이 학계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았으면 한다”고 밝혔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20일 서울 광진구 아차산 등산로. 가파른 산길을 지나 능선을 따라 1시간을 걷자 어른 키 높이의 성벽이 나타났다. 고구려 산성의 전형적인 방어 시설 ‘치(雉·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적의 접근을 관찰하거나 막기 위한 시설)’도 보인다. 남한 최대의 고구려 유적인 아차산 보루 중 4보루다. 명칭은 4보루이지만 1997년 아차산 보루 중 처음 발굴됐다. 성 위에서 내려다보는 경치는 장관이다. 삼국시대 군사 요충지답게 한강과 중랑천 주변은 물론이고 멀리 몽촌토성과 풍납토성까지 조망할 수 있다. 함께 산에 오른 최종택 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52)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보루 북쪽을 가리켰다. “저곳에 군용 헬기장이 있었습니다. ‘H’ 표시의 돌 가운데 고구려 온돌에 쓰인 뚜껑돌도 있었죠. 여기서 19년 전인 1997년 9월 23일 고유제(告由祭)를 올리고 바로 땅을 팠습니다.”○ 그토록 찾아 헤맨 ‘반쪽’을 찾다 1997년 10월 25일 아차산 4보루 중앙부에서 둥근 토기 접시 하나가 나왔다. 토기 조각은 여럿 나왔지만 이것은 차원이 달랐다. 최종택은 고고학자가 일생에 한 번도 만져 보기 힘든 ‘대박’임을 직감했다. 반으로 쪼개진 접시 한쪽에 세로로 새겨진 글자가 있었던 것. 흥분을 가까스로 가라앉히고 명문을 차근차근 해석했다. ‘후부도(後部都)’였다. 그런데 일부러 깬 듯한 그릇 단면에서 글자가 그만 끊어지고 말았다. 단면에 낀 이끼로 추정컨대 오래전에 깨진 게 분명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완전한 명문을 찾아내야만 했다. 이때부터 지난한 토기 색출 작업이 시작됐다. 발굴을 위해 판 흙을 모두 수거해 일일이 체로 걸러봤지만 허사였다. 산을 내려가 그동안 찾아낸 토기 조각들을 풀어 놓고 하나씩 다시 조사했다. 하지만 나머지 반쪽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최종택은 가슴을 치며 안타까움을 삭여야 했다. 지성이면 감천인가. 그토록 찾아 헤맨 반쪽은 이듬해 7월 30일 결국 발견됐다. 처음 반쪽을 찾아낸 곳에서 남쪽으로 불과 2, 3m 떨어진 지점이었다. 파낸 흙을 따로 쌓아 둘 공간이 없는 산성 발굴의 특수성이 빚은 해프닝이었다. 즉 1997년 발굴에서 ‘후부도’ 조각이 나온 지점을 경계로 남쪽 면에 흙을 쌓으면서 나머지 반쪽을 놓친 것이다. “9개월 동안 애를 태우다 반쪽을 찾아냈을 때의 환희를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그날 발굴단원들과 거나하게 한잔했지요.” 나머지 반쪽 그릇에는 ‘○兄(형)’이라는 명문이 적혀 있었다. 두 쪽을 모두 합치면 ‘後部都○兄’. 최종택은 후부(後部)를 고구려가 당시 한강 유역을 나눈 일부 행정구역으로, 도○형(都○兄)은 인명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했다. 여기서 형은 현대의 씨(氏)처럼 고구려 특유의 존칭어구로 보인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이는 고구려가 한강 이남에서 단순히 치고 빠지기 식의 군사 점령이 아닌 행정 지배를 시도한 사실과 더불어 고구려의 언어 습관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쇠솥 나온 ‘구의동 보루’ 기습에 전멸 당한 듯 아차산 보루는 출토 토기의 양식을 감안할 때 서기 500년경 축조돼 백제-신라 연합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고 고구려가 한강 유역에서 물러난 551년경 폐기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고구려의 남쪽 최전방 군사기지였다. 최종택은 장수왕이 한강을 빼앗고 남진을 본격화한 475년 이후부터 500년 직전까지 고구려는 보루 없이 몽촌토성에 군대를 주둔시킨 것으로 본다. 아차산 보루의 고고학 증거들은 551년 후퇴 당시의 정황을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다. 예컨대 한강변에 있는 데다 소규모(10명) 병력만 주둔해 백제군의 공격에 가장 취약했던 구의동 보루에서는 쇠솥과 무기류가 꽤 출토됐다. 반면 약 100명의 군사가 산 위에 자리 잡아 기습을 피할 수 있었던 아차산 4보루에서는 쇠솥이 발견되지 않았고 무기류도 별로 없었다. 다음은 최종택의 해석. “구의동 보루는 백제군의 기습으로 전멸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에 비해 시간을 벌 수 있었던 아차산 4보루 고구려군은 전황이 불리해지자 쇠솥과 무기를 챙겨 철수한 걸로 보입니다. 심지어 이곳 지휘관의 투구가 아궁이에서 발견됐습니다. 전의를 상실한 고구려 지휘관이 철수에 방해될까 봐 무거운 투구를 버렸을 가능성이 있죠.” 끝으로 20년 가까이 아차산 발굴에 몰두한 그에게 남은 학문적 과제를 물었다. “고구려 연구는 백제나 신라에 비해 출토 유물이 적어 부실한 편입니다. 특히 토기나 마구 등 유물을 통한 편년(연도를 설정하는 것) 연구에 집중할 생각입니다. 통일이 이뤄지기 전에 고구려 박물관을 세워 남북을 아우르는 고구려 연구, 교육의 허브를 만드는 꿈도 갖고 있어요.”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1999년 작고한 제정구 전 의원을 중심으로 청계천 판자촌의 시대상을 조명한 전시가 서울역사박물관 분관인 청계천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제정구의 청계천 1972-1976’ 사진전이다. 고인은 1972년 청계천 판자촌의 비참한 삶을 목격하고 도시 빈민 운동가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이번 전시는 그가 판자촌 주민들을 처음 만난 1972년부터 판자촌이 철거된 1976년까지의 이야기를 다뤘다. 근대화 추진 과정에서 소외됐던 도시 빈민들의 삶을 조명하는 데 초점을 뒀다. 그와 더불어 구호 활동을 벌였던 일본인 사회운동가 노무라 모토유키 목사의 기증 사진 90여 점도 선보인다. 다음 달 26일까지. 02-2286-3406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5월 2일 경기 용인시 죽전 새에덴교회(담임목사 소강석)에선 100여 명의 낯선 얼굴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한국 교회 주최로 열린 다문화가족 부모초청 행사에 참가한 사람들. 올해 두 번째로 열린 이 행사에는 몽골(18가족, 34명) 베트남(9가족, 16명) 중국(5가족, 10명) 캄보디아(3가족, 5명) 필리핀(3가족, 5명) 태국(1가족, 2명) 키르기스스탄(1가족, 1명) 등 7개국에서 초청됐다. 이 행사는 대한민국으로 시집 온 신부들이 본국에 계신 부모를 한국으로 초청해 즐거운 시간을 갖는 것으로 새에덴교회는 첫 환영 만찬을 마련해 이들을 따뜻하게 맞았다. 신부들은 이날 만찬에서 오랫동안 서로 만나지 못했던 부모에게 큰절을 하며 카네이션을 달아주었고 서로 진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식사하는 동안 테너 박주옥, 팝페라 가수 임지은, 가수 남진의 축하 공연이 이어졌다. 소강석 담임목사는 “성경에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라는 말씀처럼 지구촌은 한 몸 사회를 이루는 공동체”라며 “한국 교회가 다문화를 통해 세계 평화를 이루는 통로가 될 것이며 여러분을 끝까지 섬길 것”이라고 말했다. 베트남 출신 소유란 씨는 “오랫동안 부모님을 보지 못했는데 초청해주신 한국 교회에 감사드린다. 10박 11일 일정 내내 즐겁고 행복하고 소중한 추억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경기 용인에 있는 새에덴교회는 지역 교회의 나눔과 섬김의 독특한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지역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소외되고 어려운 이웃을 돕는 데 힘쓰고 있다. 2014년 말 새에덴교회는 경기도시각장애인연합회 소속 29개 시군 시각장애인에게 경기 명품 쌀 10kg짜리 1250포대를 전달했다. 그해 11월 경기도기독교총연합회(경기총) 대표회장으로 선출된 소 목사가 취임식을 생략해 절약한 비용과 성도들의 사랑 나눔 헌금으로 마련한 것이었다. 이어 용인시에 이웃돕기 성금 3000만 원을 별도로 기탁했다. 새에덴교회는 매년 성탄절과 새해를 맞이해 성도들의 자발적인 성금 모금과 장학구제위원회의 출연금으로 소년소녀 가장, 무의탁 노인 등과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차상위계층 등 1000여 명에게 쌀과 부식 등을 나누는 섬김을 실천하고 있다. 또 새에덴교회는 또 27일 장학구제위원회 주관으로 사랑 나눔 바자회를 개최한다. 이 바자회에서 모은 자금과 헌금을 합쳐 용인 지역 저소득층 청소년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한다. 지금까지 1000여 명이 넘는 청소년이 혜택을 봤다. 새에덴교회가 6·25전쟁 참전용사를 초청해 행사를 갖는 것도 독특한 나눔의 방식이다. 2006년 1월 소 목사가 마틴 루서 킹 국제평화상을 받기 위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한 흑인 노병을 만난 것을 계기로 매년 초청 행사를 갖고 있다. 지금까지 미국과 캐나다, 영국, 호주, 터키, 필리핀, 태국의 참전용사와 가족 2000여 명이 한국을 찾아 판문점 견학, 한국군 부대 견학, 환영 만찬 등의 행사를 치렀다. 또 매달 국내 미자립 교회 180여 곳을 지원하고 세계에 파견 나가 있는 선교사 70여 명을 후원하는 것도 새에덴교회가 빼놓지 않는 나눔 활동이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일한 양국의 팀플레이가 불가능해 보이던 일을 가능케 만들었어요.” 오하시 가쓰아키(大橋一章·74) 와세다대 명예교수(불교미술사)는 23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한일 반가사유상 특별전을 관람하며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나라 국보 제78호 반가사유상과 일본 국보인 주구지(中宮寺) 반가사유상이 처음으로 함께 전시되기까지 4년에 걸친 양국 관계자들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 이영훈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오하시 교수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고 했다. 2012년 5월 한국 금동불을 연구하기 위해 방한한 오하시 교수가 국립경주박물관을 찾았다. 이영훈 당시 경주박물관장은 이 자리에서 “3년 뒤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을 맞아 국보 83호 반가사유상과 일본 고류지(廣隆寺) 반가사유상을 함께 전시해 보는 게 꿈”이라고 했다. 한일 불교 문화재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오하시 교수는 이 말을 흘려듣지 않았다. 그는 박물관 문을 나서자마자 와세다대 총장 비서실에 전화를 걸었다. 그는 “당시 한일관계가 악화된 때여서 이 관장의 아이디어가 양국 간 화해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이때부터 일본 내 ‘와세다대 라인’이 총동원됐다. 섭외 1순위는 모리 요시로(森喜朗) 전 총리. 일본 정부와 사찰을 설득해 3년 안에 일을 빠르게 추진하려면 정치인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모리 전 총리가 와세다대 동문인 데다 대표적인 친한파 정치인이라는 점도 고려했다. 오하시 교수는 모리 전 총리와 친분이 두터운 오쿠시마 다카야스 전 와세다대 총장과 와라가이 도모키 학장 대리(부총장)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가마타 가오루 와세다대 현 총장도 지원사격에 나섰다. 2014년 5월 오하시 교수와 만난 모리 전 총리는 “영애 시절 박근혜 대통령을 만난 적이 있다. 전시 취지에 적극 공감한다”며 이후 적극적인 지원에 나섰다. 하지만 고류지의 불허로 특별전 개최가 위기를 맞았고, 일본 측 반가사유상이 주구지 소장품으로 변경됐다. 한국 측도 주구지 반가사유상과 어울리는 불상은 국보 83호보다는 78호라고 판단해 전시품을 바꾸기로 했다. 이제 남은 과제는 불상을 소유한 주구지를 설득하는 일. 주구지는 반가사유상이 본존불로 지금도 예배 대상이라는 이유를 들어 난색을 표시했다. 다시 와세다대 라인이 가동됐다. 주구지 주지가 전 와세다대 총장의 조카라는 점도 파고들었다. 결국 주구지는 학계와 정계 인사들의 거듭된 요청에 불상 반출을 허락했다. 전시 준비를 위한 각종 비용은 재일동포 3세로 모리 전 총리와 친분이 있는 한 사업가가 대기로 했다. 양국 국보의 해외 교차 전시를 위한 실무작업은 이영훈 관장과 오하시 교수, 이성시 와세다대 교수 등 10명의 한일 전문가로 구성된 실행위원회가 맡았다. 오하시 교수는 “각계 여러분의 도움이 없었다면 두 걸작을 한자리에서 보기는 힘들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어 “일본 불교미술의 ‘선생님’은 역시 백제”라며 “일본 장인들이 한반도 불상을 베끼는 수준에서 벗어나 창의성이 발휘되기 시작한 시점에 주구지 반가사유상이 만들어졌다”고 평가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국보 제285호 울산 반구대 암각화를 보존하기 위해 문화재청과 울산시가 추진한 ‘가변형 임시 물막이(카이네틱 댐)’ 설치가 사실상 실패했다. 3년이 걸린 물막이 댐 건설 방안이 실패함에 따라 암각화 보존대책을 원점에서 다시 검토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물막이 설계를 맡은 포스코 A&C는 기술검증평가단이 지켜본 가운데 24일 최종 모형실험을 실시했다. 실험 결과 암각화를 에워싸는 투명 물막이판의 연결 부위에서 물이 새는 현상이 발생했다. 앞서 지난해 12월 15일 실시한 1차 실험과 지난달 25∼26일 2차 실험에서도 누수 현상이 일어났다. 이날 실험은 투명판에 물을 분사했을 때 접합부에서 물이 새는지를 확인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실험을 지켜본 조홍제 울산대 교수는 “접합부에 수압을 가하기도 전에 물이 나온 것으로 봤을 때 실험은 실패한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당초 상당수 공학 전문가들 사이에선 암반 주변을 투명판으로 둘러싸는 카이네틱 댐 방식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견해가 적지 않았다. 문화재청은 “실험 결과에 대해 기술검증평가단이 보고서를 작성할 예정”이라며 “문화재위원회가 이 보고서를 바탕으로 물막이 모형실험의 실패 여부를 최종 판단할 것”이라고 밝혔다. 투명판 4개를 갖고 진행한 실험에서도 연이어 실패를 거듭한 만큼 총 160여 개의 투명판이 들어가는 실제 물막이 설치는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비가 와서 탁 소리가 났는디 번개가 나무를 쎄린 거여. 아차 이제 끝났구나 싶었어. 그러더니 곧 행정복합도시로 변한 거여.” 옛 충남 연기군 남면 월산리 황골(현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세종리) 토박이인 임헌교 씨(78)는 2000년대 초반 마을에서 일종의 신목(神木)으로 신성시한 팽나무가 번개를 맞은 사건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오랫동안 마을을 지켜준 고목이 반으로 갈라지자 주민들은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오래지 않아 황골이 행정중심복합도시에 편입된다는 발표가 뒤따랐다. 결국 이 마을의 집들은 모두 철거됐고 주민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국립민속박물관이 세종시를 둘러싼 주민 삶의 변화와 식생(植生)의 관계를 밝힌 연구서를 최근 발간했다. ‘세종시·식물·사람’이란 제목의 이 연구서는 박물관 학예연구사들이 지난해 2월부터 8개월간 실시한 현지조사를 토대로 작성됐다. 사람과 자연은 공생할 수밖에 없으며, 사회의 커다란 변화는 이 두 가지에 모두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연구서에 따르면 2007년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공사가 본격화되면서 촌락마다 조성돼 있던 12개의 ‘마을 숲’ 가운데 3개만이 남았다. 원주민들에게 주로 ‘수살’이나 ‘숲거리’ 등으로 불린 마을 숲은 결혼식이나 마을잔치가 열리는 대표적인 공동체 공간이었다. 연구서는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 이전 이 지역 경제생활의 변화도 담고 있다. 예컨대 옛 연기군 전의면 일대에서는 서울 용산역에서 통근열차를 타고 온 서울 상인들에게 곡식, 나물을 파는 시장이 1990년대 초반까지 활발했다. 하지만 연기군행 기차의 운행횟수가 줄면서 시장 활동은 급격히 위축됐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한국과 일본 불교서적의 교류사를 조명하는 국제학술회의가 열린다. 동국대 박물관(관장 정우택)은 ‘한일의 불교전적’ 국제학술대회를 20일 서울 중구 동국대 덕암세미나실에서 연다. 개교 110주년 특별전 ‘여시아문(如是我聞)-깨달음의 길’과 연계된 학술행사다. 특별전은 일본 오타니 대학이 소장하고 있는 고려 대장경의 일부 판본을 전시하고 있다.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최연식 동국대 교수 등 5명의 한일 역사학자, 불교학자들이 주제발표에 나선다. 최 교수는 원효대사가 저술한 이장의(二障義)의 사상사적 의미를 조명한 논문을 발표한다. 이장의는 성불을 방해하는 번뇌를 끊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다. 이어 미야자키 겐지(宮崎健司) 일본 오타니대 교수가 일본의 대장경 역사를 다룬 연구를 소개한다. 고영섭 동국대 교수는 ‘분황 원효의 ’십문화쟁론‘과 ’판비량론‘의 내용과 사상적 의의’, 미키 아키마루(三木彰圓) 오타니대 교수는 ‘친란의 ’현정토진실교행증문류(顯淨土眞實敎行證文類)에 있어 불전의 수용‘ 논문을 발표한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경복궁 내 전각 현판의 잘못된 글자가 10년 동안이나 방치된 사실이 드러났다. 연세대 국학연구원이 2006년 문화재청에 제출한 ‘고궁현판 학술조사 연구용역’ 보고서에 따르면 경복궁 내 보선당과 자선당, 융화당 현판에서 오자(誤字)가 발견됐다. 이는 19세기 말 왕실에 의해 작성된 경복궁 평면배치도 북궐도형(北闕圖形)과 문헌기록인 궁궐지(宮闕志) 일성록(日省錄) 등을 참조한 결과다. 보고서에 따르면 경복궁 교태전 권역에 있는 보선당(輔宣堂) 현판은 본래 ‘보의당(輔宜堂)’이 맞다. 중간 글자를 쓰면서 비슷한 한자와 헷갈린 것으로 보인다. 보의는 ‘천지의 마땅함을 보상하다’는 뜻으로 주역에서 따온 말이다. 경복궁 함원전 권역의 자선당(資善堂)과 융화당(隆化堂) 현판은 각각 ‘자안당(資安堂)’과 ‘융화당(隆和堂)’이 올바른 글자로 조사됐다. 자안당이 자선당으로 잘못 복원되면서 경복궁에는 한자가 똑같은 자선당 현판 두 개가 걸린 상황이다. 조선시대 당시 500개에 이르는 경복궁 전각에 각각 다른 한자를 쓴 관례와 어긋나는 것이다. 특히 자선당의 복원 위치도 잘못된 것으로 드러났다. 자선당은 현재처럼 함원전의 행각이 아니라 세자와 세자빈이 머물던 동궁의 부속건물이었다. 문화재계에서는 이미 10년 전에 경복궁 전각 현판의 오자가 드러났음에도 그대로 방치한 것은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문화재청은 18일 “차후 추가 고증을 거쳐 오류가 확실히 확인되면 현판 변경을 위한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치겠다”고 밝혔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경복궁 내 전각 현판의 잘못된 글자가 10년 동안이나 방치된 사실이 드러났다. 연세대 국학연구원이 2006년 문화재청에 제출한 ‘고궁현판 학술조사 연구용역’ 보고서에 따르면 경복궁 내 보선당과 자선당, 융화당 현판에서 오자(誤字)가 발견됐다. 이는 19세기 말 왕실에 의해 작성된 경복궁 평면배치도 북궐도형(北闕圖形)과 문헌기록인 궁궐지(宮闕志) 일성록(日省錄) 등을 참조한 결과다. 보고서에 따르면 경복궁 교태전 권역에 있는 현 보선당(輔宣堂) 현판은 본래 ‘보의당(輔宜堂)’이 맞다. 중간 글자를 쓰면서 비슷한 한자와 헷갈린 것으로 보인다. 보의는 ‘천지의 마땅함을 보상하다’는 뜻으로 주역의 문장에서 따온 것이다. 경복궁 함원전 권역의 자선당(資善堂)과 융화당(隆化堂) 현판은 각각 ‘자안당(資安堂)’과 ‘융화당(隆和堂)’이 올바른 글자로 조사됐다. 자안당이 자선당으로 잘못 복원되면서 경복궁에는 한자가 똑같은 자선당 현판 두 개가 걸린 상황이다. 조선시대 당시 500개에 이르는 경복궁 전각에 각각 다른 한자를 쓴 관례와 어긋나는 것이다. 특히 자선당의 복원 위치도 잘못된 것으로 드러났다. 자선당은 현재처럼 함원전의 행각이 아니라 세자와 세자빈이 머물던 동궁의 부속건물이었다. 문화재계에서는 이미 10년 전에 경복궁 전각 현판의 오자가 드러났음에도 그대로 방치한 것은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문화재청은 18일 “차후 추가 고증조사를 거쳐 오류가 확실히 확인되면 현판 변경을 위한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치겠다”고 밝혔다.김상운 기자sukim@donga.com}

한국 패션 1세대인 두 거장의 작품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전시가 열렸다. 서울역사박물관은 ‘서울패션, 꽃과 함께한 두 디자이너’ 특별전에서 최경자(1911∼2010)와 앙드레 김(1935∼2010)의 의상 20벌 등 기증 유물을 선보이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두 디자이너가 제작한 의상을 시대별로 소개하고 유품과 사진자료를 함께 전시해 한국 패션의 흐름을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최경자는 일제강점기 때 여성양장점 은좌옥, 1961년 국제복장학원을 설립하고 패션쇼를 개최해 한국의 미를 재해석했다. 앙드레 김은 1962년 서울 소공동에 ‘살롱 앙드레’ 의상실을 열고 유명 배우들의 의상을 디자인했다. 그는 당시로선 이례적으로 국제 패션쇼를 개최했고, 한국 전통과 현대미를 결합한 개성적인 디자인을 창조했다. 이번 특별전은 꽃을 주제로 이들의 작품을 재해석했다. 작품들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꽃이 한국적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데 적절하게 쓰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예컨대 최경자의 ‘시폰 롱 드레스’ 두 벌은 한국 정서가 담긴 무꽃과 배추꽃을 소재로 삼은 것이다. 앙드레 김의 ‘연보라 타페타 이브닝 코트’는 2002년 호주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에서 열린 패션쇼에서 배우 배용준과 최지우가 입어 유명해진 작품이다. 02-724-0160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서양에서 예수 다음으로 평전을 통해 많이 다뤄진 인물 중 한 명은 나폴레옹일 것이다. 그만큼 흥미로운 동시에 해석하기 난해한 인물이기 때문이리라. 그중에서도 특히 ‘나폴레옹은 영웅인가, 독재자인가’라는 주제는 한국의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과 논란처럼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네버엔딩 스토리’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나폴레옹의 숙적 영국의 후손이 썼다. 역사가이자 유명 전기 작가인 저자도 서문 첫머리에 “이 책은 감히 나폴레옹 전기의 최종판임을 주장하지 않는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저자의 겸양과 달리 책의 내용은 분량만큼이나 심층성을 띠고 있다. 이 중 나폴레옹의 모순적인 심리 상태와 사생활을 정신분석학 관점에서 해석한 내용이 인상적이다. 예를 들어 나폴레옹이 그를 사랑한 순결한 처녀를 버리고, 소문난 남성 편력에 자신보다 여섯 살 많았던 이혼녀 조제핀을 선택한 이유를 ‘어머니 콤플렉스’에서 찾는다. 어렸을 적 어머니의 부정을 본 나폴레옹이 조제핀을 통해 모친에 대한 양가적 감정(사랑과 미움)을 해소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나폴레옹의 모순은 프랑스 혁명의 계승자를 자처하면서도 사실상 독재자로 군림한 데에서도 나타난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지 불과 10년 만에 투표에서 그를 압도적으로 지지한 프랑스 국민들의 심리도 모순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저자는 그가 군사적 모험에 사로잡혀 유럽 각국과 전투를 벌이는 과정에서 최소 400만 명이 희생된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그가 히틀러나 스탈린 같은 냉혹한 전체주의자는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대량 학살을 벌이는 만행을 저지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 대신 그는 자유주의 기본권을 보장한 이른바 ‘나폴레옹 법전’(1804년)을 편찬하는 등 문명사적 업적을 남겼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옛 왕실 관복의 원형을 복원해 입는 방식까지 시연하는 행사가 펼쳐진다.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관장 박경식)은 석주선 박사의 20주기를 맞아 ‘왕 복식 착장 시연회’를 13일 개최한다. 왕의 초상화인 어진(御眞)을 통해 복원한 왕실 관복의 착장 예법을 재현하는 행사는 처음이다. 박성실 전 단국대 교수(전통의상학)는 2006년부터 올해까지 어진을 바탕으로 태조, 영조, 익종, 철종, 고종의 관복 등 어의 총 100여 점을 복원했다. 예컨대 태조는 집무를 보기 위해 최소 12종의 관복을 걸쳤다. 받침옷으로 답호, 철릭을 입고 익선관과 오조룡포, 옥대, 버선, 흑피화를 착용했다. 속옷으로는 겹저고리, 겹바지, 홑한삼, 개당고, 합당고 홑바지 등을 입었다. 이번 시연회에서는 태조부터 고종까지 5명의 왕이 한삼 바지와 저고리에 이어 관복을 순서대로 입는 착장 예법의 전 과정을 보여준다. 이어 내관과 궁녀의 착장도 함께 진행된다. 031-8005-2392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4일 경기 연천군 전곡리 구석기 유적지. 곳곳에 화려한 전시물과 행사용 텐트가 들어서 보통의 유적지와는 색다른 분위기였다. 다음 날 열릴 연천군의 ‘전곡리 구석기 축제’ 준비가 한창이었다. 올해로 24년째를 맞는 이 축제는 발굴로 불편을 겪는 전곡리 주민들의 이해를 구하기 위해 배기동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64)가 처음 만들었다. 올해는 나흘 동안 관람객 60만 명이 행사장을 찾았다. 이 지역의 대표적인 관광 상품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날 행사장을 둘러보던 배기동은 “한때 개발제한 때문에 주민들에게 욕도 많이 먹었지만 구석기 축제를 통해 조금이나마 마음의 부담을 덜어 다행”이라고 말했다. 잠시 뒤 그는 나무로 둘러싸인 외진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 한국 고고학의 대부 삼불 김원룡 전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1922∼1993)의 추모비가 있다. 내년 정년퇴임을 앞둔 반백의 노(老) 교수는 비석을 어루만지며 조용히 입을 뗐다. “삼불 선생님 덕분에 제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대학원에서 삼국시대 마구(馬具)를 전공하려고 한 그에게 삼불은 구석기 연구를 권했다. 이를 계기로 배기동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선사 유적을 25년에 걸쳐 발굴하게 됐다. 1981년 11월 1일 오전 10시 전곡리 발굴현장. 한탄강변의 질퍽한 모래흙을 2m가량 파내려갔을 때 서울대 화학과 학부생 한 명이 “무언가 나온 것 같다”며 배기동을 찾았다. 타원형의 돌이 흙 사이에서 살짝 모습을 드러냈다. 꽃삽과 붓으로 조심스레 돌을 노출시키던 배기동의 눈이 점점 커졌다. 간 흔적이 뚜렷한 옆면이 나타난 것. “처음에는 자연석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파보니 전형적인 ‘아슐리안형 주먹도끼’였어요. 그때까지 발견된 주먹도끼들 가운데 가장 얇고 정교하게 다듬어진 것이어서 무척 놀랐습니다.” 아슐리안 주먹도끼는 양쪽 면을 갈아 타원형 모양인 전기 구석기의 대표적인 석기다. 프랑스의 생아슐 지방에서 처음 발견됐는데, 약 140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생겨나 10만 년 전까지 사용됐다. 고고학계가 아슐리안 주먹도끼에 특히 주목하는 것은 찍개 등에 비해 복잡한 가공작업을 거쳐야 해 고(古)인류의 진화 과정을 풀 열쇠로 보기 때문이다. 학계는 아슐리안 주먹도끼의 쓰임새가 많다는 이유로 ‘구석기의 맥가이버 칼’이라고도 부른다. 세계 고고학계에서는 오랫동안 아슐리안 주먹도끼는 아프리카와 유럽에만 존재할 뿐 아시아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는 ‘모비우스의 학설’이 정설로 굳어졌다. 그러나 1978년 전곡리에서 동아시아 최초로 아슐리안 주먹도끼가 미군 병사 그레그 보웬에 의해 발견됐다. 모비우스의 학설이 무너지고 고고학 교과서를 다시 써야 하는 획기적인 발견이었다. 보웬이 삼불에게 주먹도끼를 보여준 이듬해부터 시작된 전곡리 발굴에 참여할 당시 배기동은 27세 청년이었다. 그때 발굴단에서 함께 땀을 흘린 후배들은 현재 고고학계 중진이 됐다. 최성락(목포대 교수) 임영진(전남대 교수) 이영훈(국립중앙박물관장) 박순발(충남대 교수) 김승옥(전북대 교수) 등은 주말마다 현장을 찾아와 작업을 거들었다. 당시 배기동은 박정희 대통령의 금일봉으로 현장에 지은 유물전시관에서 아내와 기거하며 발굴을 이어갔다. 그는 “버스를 타고 오지까지 와서 주말을 희생한 후배들이 정말 고마웠다”고 했다. 기억에 남는 발굴 뒷이야기를 묻자 그는 1983년에 서울 용산의 우물업자들을 찾아간 이야기를 꺼냈다. 토층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려면 2m 높이의 흙을 한꺼번에 퍼내야 했는데, 당시엔 마땅한 기술이 없었다. 숱한 시행착오 끝에 우물 파는 기술을 응용해 긴 관으로 토층 샘플을 담는 데 겨우 성공했다. 1986년 발굴 땐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굴착기로 땅을 파면서 6·25전쟁 때 매설된 지뢰들이 드러난 것. 만약 삽으로 건드리기라도 했으면 참사가 벌어질 뻔했다. 고고학계는 전곡리 유적의 연대를 둘러싼 논란은 여전하지만 전곡리가 한국 선사고고학의 개척지였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특히 지질학 등 자연과학자들이 발굴에 참여한 첫 사례로 학제 간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뤄졌다는 의미도 있다. 그는 “4만∼5만 년 전과 30만∼40만 년 전으로 엇갈린 연대 논란을 끝낼 수 있는 연구방법을 지금도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연천=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세계 고인돌 연구 성과를 총망라한 전시가 열리고 있다. 국립광주박물관에서 열리는 ‘세계유산 고인돌, 큰 돌로 무덤을 만들다’ 기획특별전이다. 한반도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인 고인돌은 유럽과 인도, 중국 등에서도 발견되는데 우리나라에만 4만여 기가 분포해 있다. 고창과 화순, 강화의 고인돌 유적이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기도 했다. 이번 전시는 ‘프롤로그―세계 거석문화 속 고인돌’에서 세계의 다양한 거석문화에서 우리나라 고인돌 문화가 갖는 특징을 담았다. 이어 ‘1부―고인돌 알아보기’는 고인돌의 정의와 형태, 구조, 분포 양상 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고인돌 축조 과정에서 적용된 과학적 원리와 당시의 공동체 의식도 조명했다. ‘2부―고인돌에서 나온 유물들’에서는 비파형동검과 간돌검, 붉은간토기 등 고인돌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전시한다. 암각화와 인골을 통해 고인돌에 담긴 장례의 의미를 알아본다. ‘3부―옛사람들이 바라본 고인돌’은 청동기 이후 고인돌이 사람들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를 다뤘다. 7월 31일까지. 062-570-7052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