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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FT)를 일본 닛케이에 매각한 영국 교육미디어회사 피어슨이 유력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지분도 팔기로 했다고 25일 외신이 보도했다. 피어슨은 이날 성명을 내고 “보유한 이코노미스트 지분 50%를 전량 매각하는 방안을 이사회와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FT에 따르면 이코노미스트 지분 50% 가치는 최대 4억 파운드(약 7240억 원)에 달한다. 인수 유력 후보는 닛케이의 FT 인수에 깊숙이 관여한 유대계 영국 재벌 로스차일드 가, 이탈리아 자동차회사 피아트의 대주주인 아녤리 가, 영국 자산운용사 슈로더, 영국 제과회사 캐드버리 등이다. 1843년 창간한 이코노미스트는 미국의 비즈니스위크와 함께 세계 경제주간지 시장을 양분하며 세계 최고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연간 발행부수는 약 160만 부로 북미(54%), 유럽(19%), 영국(14%)에서 집중적으로 팔린다. 지난해 이코노미스트의 매출은 3억2800만 파운드(약 5937억 원), 영업이익은 6000만 파운드(약 1086억 원)였다. 올해 1월 사상 최초로 여성 편집국장 재니 민턴 베도스(48)를 배출해 화제를 모았다. 피어슨은 이코노미스트의 최대 주주지만 편집권 독립 보장을 위한 여러 장치들 때문에 사실상 경영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이코노미스트 이사회 멤버 13명 중 6명만 피어슨 관련 인물이며 지분 매각 시에도 이코노미스트 측의 승인을 얻어야 하는 등 지배구조가 복잡하다. 앞서 피어슨은 미국의 블룸버그와 톰슨로이터, 독일의 악셀 슈프링거 등 거대 미디어회사에 먼저 이코노미스트 인수를 제안했지만 복잡한 지배구조 때문에 실패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매각도 순탄하게 진행될지 의문을 제기하는 관측도 있다. 한편 FT를 인수한 기타 쓰네오 닛케이 회장(69)은 24일 일본 도쿄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수년간 FT에 관심을 가져왔으며 5주 전 인수 제안을 받고 수차례 영국 런던을 방문해 협상을 매듭지었다”고 밝혔다. 게이오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1971년 닛케이에 입사한 그는 2008년 회장이 됐으며 온라인 뉴스 유료화 등 닛케이의 디지털 사업을 진두지휘해 왔다. 그는 “FT의 브랜드 가치를 훼손하지 않아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을 느낀다”며 “편집권도 충분히 보장하겠다”고 말했다.하정민 기자 dew@donga.com}
불륜을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는 세계 최대 이성교제 사이트 애슐리 매디슨이 해킹에 의한 회원정보 유출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고 미국 언론이 22일 보도했다. 21일 ‘임팩트 팀’이란 해커 집단이 애슐리 매디슨의 모기업 애비드 라이프 미디어를 해킹했다고 주장한 지 하루 만인 22일 회원 2명의 개인정보가 인터넷에 공개됐다. 미국인 1명과 캐나다인 1명인 이들의 이름, 주소, 우편번호, 이메일, 애슐리 매디슨 아이디 등이 완전히 노출됐다. 심지어 포옹, 키스, 천천히 하기, 역할극 등 이들의 성적 취향까지 담겼다. 미 언론은 해커들이 회원들의 개인정보를 실제 확보했음을 입증하고 회사 측을 협박하기 위해 ‘본보기 공개’를 감행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게시물 원본은 사라졌지만 이를 내려받은 게시물들은 전 세계 인터넷 커뮤니티에 퍼졌다. 해커들은 웹사이트 운영을 중단하지 않으면 더 많은 회원정보를 공개하겠다고 경고한 상태다. 한편 이날 캐나다 언론은 수도 오타와가 세계에서 애슐리 매디슨 가입 비율이 가장 높은 도시로 드러났다고 보도했다. 이번 해킹으로 89만 명인 오타와 시민 중 약 20%인 18만9810명이 이 사이트에 가입한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거주지 우편번호를 오타와 의회로 적은 가입자도 많아 권력과 불륜의 높은 상관관계를 입증했다고 덧붙였다. 노엘 비더먼 애비드 라이프 미디어 최고경영자(CEO)는 “오타와뿐 아니라 미국 워싱턴 등 각국 수도의 회원 가입 비율이 높다”며 “이들의 권력과 명성이 더 많은 불륜 기회를 가져온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이 사이트가 관심을 끌기 위해 가입자 통계 일부를 고의로 퍼뜨려 ‘노이즈 마케팅’을 벌인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하정민 기자 dew@donga.com}
불륜을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세계 최대 이성교제 사이트인 애슐리 매디슨이 해킹에 의한 회원정보 유출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고 미 언론이 22일 보도했다. 21일 ‘임팩트 팀’이라는 해커 집단이 애슐리 매디슨의 모기업 애비드 라이프 미디어를 해킹했다고 주장한 지 하루 뒤인 22일 회원 2명의 개인정보가 인터넷에 공개됐다. 각각 미국인 1명과 캐나다인 1명인 이들의 이름, 주소, 우편번호, 이메일, 애슐리 매디슨 아이디 등이 완전히 노출됐다. 심지어 포옹, 키스, 천천히 하기, 역할극 등 이들의 성적 취향까지 담겼다. 미 언론은 해커들이 회원들의 개인 정보를 실제 확보했음을 입증하고 회사 측을 협박하기 위해 ‘본보기 공개’를 감행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게시물 원본은 곧 사라졌지만 이를 다운받은 게시물들이 전 세계 인터넷 커뮤니티에 퍼져 또 다른 문제를 낳고 있다. 한편 이날 캐나다 언론은 행정수도 오타와가 세계에서 애슐리 매디슨 가입 비율이 가장 높은 도시로 드러났다고 보도했다. 이번 해킹으로 89만 명인 오타와 시민 중 약 20%인 18만9810명이 이 사이트에 가입한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거주지 우편번호를 오타와 의회로 적은 가입자도 많아 권력과 불륜의 높은 상관관계를 입증했다고 덧붙였다. 노엘 비더만 애비드 라이프 미디어 최고경영자(CEO)는 “오타와 뿐 아니라 미국 워싱턴 등 각국 수도의 회원 가입 비율이 높다”며 “권력자들이 위험을 즐기는 속성을 지닌 데다 이들의 권력과 명성이 더 많은 불륜 기회를 가져오는 것도 사실”이라고 평가했다. 일각에서는 이 사이트가 세계의 관심을 끌기 위해 가입자 통계 일부를 퍼뜨리며 ‘노이즈 마케팅’을 벌이고 있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하정민 기자 dew@donga.com}

오사카에 있는 아스카베(飛鳥戶)신사에서는 매년 새해가 되면 막걸리 사과 대추 등을 놓고 술을 한 잔씩 따른 뒤 큰절을 올리는 한국식 제사가 치러진다. 그런데 이들이 모시는 조상신은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 백제 곤지왕이다. 한국에서 그의 무덤은 확인할 길도 없고 사당조차 없어서 이름조차 낯선 인물이지만 일본인들은 곤지왕을 모신 신사를 짓고 무려 1500여 년 동안 제사를 이어오고 있다. 이렇게 한국의 조상신을 지극정성으로 모시는 또 다른 신사가 있으니 교토 근교 시가 현 가모 군에 있는 ‘귀실(鬼室·기시쓰)신사’이다. 우리에겐 잊혀진 백제 조상들을 기리는 두 신사야말로 한일 간의 깊은 인연을 상징하는 장소라 할 수 있다.○ 아스카베신사 아스카베신사가 있는 아스카 촌은 일본에서 유명한 와인 생산지이다. ‘아스카 와인’은 일본 와인경연대회에서 여러 차례 우승할 정도로 인기가 높다. 신사는 주택가 한가운데 있었다. 지금은 웅장한 모습을 찾기 어렵지만 이 신사는 한때 일본 왕실에서 직접 제사를 지냈으며 서기 890년에는 제사 비용을 충당하라고 3000평가량의 밭을 하사했을 정도로 특별관리를 받았다. 그만큼 왜(倭) 왕실이 각별히 대우했다는 뜻이 될 것이다. 신사를 설명하는 안내판에는 신사에서 모시는 조상신이 백제 곤지왕임을 명확히 밝히고 있었다. ‘유라쿠 일왕 시대에 도래한 백제계 아스카베노미야쓰코(飛鳥戶造) 일족의 조상신인 비조대신(飛鳥大神·백제의 곤지왕)에게 제를 드리는 신사’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아스카베노미야쓰코’는 왜에 뿌리를 내린 곤지왕 후손들의 씨족 이름이다. 문자 그대로 ‘아스카의 문을 만들었다’는 뜻이니 일본 고대국가 형성기에 곤지왕과 후손들의 역할이 매우 컸음을 짐작하게 한다. 곤지왕은 왜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무슨 일을 했을까. 잠시 5세기 무렵 백제로 가보자. 5세기 중반 정변을 통해 집권한 개로왕은 귀족 세력에 대한 대규모 숙청을 단행해 왕족 중심의 친위체제를 구축한다. 여기에 고구려의 남진정책으로 안보위협까지 받고 있던 상황이었다. ‘살아있는 백제사’의 저자 이도학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는 책에서 “곤지왕은 본래 왜에 군사를 청하는 청병사 자격으로 파견됐지만 당시만 해도 이미 왜에 경제적 기반을 갖춘 백제 귀족들이 있어서 이들을 관리하는 한편 왕권 강화 차원에서 왜와의 교역 독점 창구 역할도 했을 것”이라고 적고 있다. 461년 왜로 건너간 곤지왕은 한성이 함락(475년)될 때에도 귀국하지 않고 있다가 477년에야 백제로 돌아간다. 귀국 후 왕실 출납을 담당하는 내신좌평에 임용됐으나 4개월 만에 숨을 거두고 만다. 그를 조상신으로 모신 아스카베신사가 있는 아스카 일대는 곤지왕이 왜에 있을 때 머물던 곳으로 고대 사료를 분석한 한 통계조사에 따르면 이 일대 주민의 36%가 한국계였고 그중에서도 백제계가 64%나 되었다고 한다. 이곳 주민들은 한때 없어졌던 신사를 다시 만든 주역이다. 1908년 메이지 정부는 신사 통폐합을 한다며 이 신사를 다른 신사와 합쳐 버렸다. 주민들은 전쟁이 끝나고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던 1950년대 신사부활운동을 시작한다. 마침내 1952년 신사의 문을 다시 열게 되자 정부로부터 일체의 재정적 지원을 받지 않고 주민 헌금으로만 운영하기로 결정한다. 신사 관리도 순번을 정해 돌아가며 맡고 있었다. 운영 총괄책임을 맡고 있는 6인회의 멤버 중 한 명인 나카무라 요지(仲村要司·69) 씨는 기자에게 “내 부친은 내 이름을 신사부활운동을 주도했던 사람(일본인)의 이름을 그대로 따 지을 정도로 곤지왕에게 매료되어 있었다. 나 역시 곤지왕을 생각할수록 1500여 년 세월로 맺어진 한일 인연의 신비함을 느끼게 된다”며 “매년 10월 17, 18일 이곳 신사에서는 곤지왕을 추모하는 마쓰리(축제)를 열고 있는데 소식을 듣고 찾아온 한국인들이 ‘우리도 잊고 있던 백제 왕자를 이렇게 정성스럽게 모셔주고 있다니 정말 고맙다’고 눈물을 흘리며 말할 때 큰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귀실신사 교토에 있는 귀실신사도 마찬가지였다. 신사는 시내에서 차로 1시간 반 정도 떨어진 시가 현 가모 군에 있는 작은 마을 히노(日野) 정에 있다. 단청 무늬가 있는 팔각 기와지붕의 귀실신사 입구는 한눈에도 한국 정자(亭子)와 유사했다. 일본 신사의 지붕은 보통 나무껍질로 덮여 있다. 귀실신사 앞 안내판에는 ‘백제 도래인 귀실집사(鬼室集斯)를 모시는 신사’라는 설명이 일본어와 한국어로 적혀 있었다. 귀실집사의 묘 앞에는 ‘귀실집사지묘(鬼室集斯之墓)’라는 비석까지 서 있었다. 귀실집사의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일본서기는 귀실집사가 백제가 백강전투에서 패하기 1년 전인 662년 백제유민 700명을 데리고 이곳에 정착한 뒤 26년 동안 살다가 688년 세상을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왜왕 덴지(天智·재위 661∼671년)는 그에게 소금하(小錦下)라는 벼슬을 주었고 그와 함께 온 유민들을 이곳에 살게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때 정착한 백제 망명자는 모두 1000명을 넘어선 것으로 추정된다. 신사 뒤 스즈카 산맥 류오산 아래에는 아직도 후손들이 촌락을 이루고 살면서 신사를 관리한다고 한다. 귀실집사는 학식이 뛰어나 671년에는 교육부 장관 격인 ‘학식두(學識頭)’에까지 임명된다. 그의 부친은 백제 무왕의 조카이자 의자왕의 사촌 부여복신으로 알려져 있는데 부여복신은 나당연합군과의 전투에서 세운 공이 커 귀신을 놀라게 했을 정도라고 해서 ‘귀실’이라는 성을 받았다고 한다. 귀실신사도 아스카베신사처럼 일본인들의 헌신적인 봉사로 운영되고 있었다. 아스카베신사처럼 신관을 따로 두지 않고 주민들이 직접 신앙 의례까지 주관하고 있었으며 관리비는 주민들이 매달 내는 1500엔(약 1만3500원)의 회비로 운영되고 있었다. 중앙정부나 지자체의 지원은 일절 받지 않고 있었다. 마을에서 태어나 평생 살고 있다는 사이토 기요지(齊藤淸治·74) 씨는 2013년 임기 4년의 주민 대표가 됐다. “직접적인 조상도 아닌데 기리는 이유가 무엇이냐”라고 물었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일본에는 수많은 신사들이 있다. 하지만 신사 내 묘비에 특정인의 이름, 사망 연도, 생전 직책 등이 다 표시된 곳은 거의 없다. 귀실집사가 어느 나라 사람이냐는 것과는 관계없이 그런 기록이 남아 있는 것 자체가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1316년이나 되는 긴 역사를 가진 신사가 있는 곳에서 태어나 이렇게 신사를 위해 일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로 자부심을 느낀다.” 기자를 더 놀라게 만든 것이 있었으니 주민들의 철저하고 꼼꼼한 자료 정리 및 문서 보관이었다. 사이토 씨는 1940년에 처음 만들어 지금까지 내려오는 방명록 20권을 기자에게 보여줬다. 무려 75년간 매년 신사를 찾은 7만5000여 명의 이름과 소감이 기록되어 있었다. 유명 소설가 시바 료타로의 필체도 보였다. 주민들은 귀실집사의 부친 귀실복신을 추모하는 은산별신제를 주관하고 있는 충남 부여군 은산면과도 활발한 교류를 갖고 있었다. 은산별신제의 유래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660년 백제 멸망 직후 은산 지역에 원인 모를 괴질이 퍼져 사람들이 죽어나가자 이상하게 생각한 주민들이 점을 쳐 보았더니 백제 멸망 때 죽은 병사들의 원혼이 떠돌기 때문이라는 답이 나온 것. 마을 사람들이 백제군들의 유골을 수습하고 씻김굿을 지내주자 괴질이 사라졌다고 한다. 이후 은산 주민들은 백제군의 원혼을 달래고 마을 사람들의 무병장수와 풍요를 비는 별신제(국가 중요무형문화재 9호)를 매년 2월 지내고 있다. 주민 우에다 요시카즈 씨(65)는 “귀실신사는 한일교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곳”이라며 “백제 유민들이 일본 수도와 가까운 곳에 집단 군락을 이루고 살았으며 이들의 정착을 왜왕이 직접 주선하고 고위 관직에 임명했다는 점만 봐도 당시 한국과 일본이 얼마나 가까웠는지를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곤지왕 :: 이번 시리즈 6회 ‘왜(倭)에서 태어난 무령왕’ 편에서 언급됐던 인물. 백제 개로왕의 동생으로 무령왕을 임신하고 있었던 형수와 함께 왜에 가던 중 형수가 가카라시마에서 무령왕을 낳자 모자(母子)만 돌려보낸 뒤 자신은 왜에 남는다. 아스카=권재현 confetti@donga.com / 히노 정=하정민 기자※19회 ‘백제의 테크노크라트들’로 이어집니다.}
세계 최대 소프트웨어업체 마이크로소프트(MS)가 전 직원 12만 명의 6.5%인 7800명을 해고하기로 했다고 블룸버그 등 주요 외신이 8일 보도했다. MS는 2013년 9월 노키아의 휴대전화 부문을 인수했으나 이후 적자를 면치 못하자 대규모 해고를 결정했다. MS는 이날 발표한 성명을 통해 올해 휴대전화 사업에서 76억 달러(약 8조5880억 원)의 손실이 예상된다고 밝혔다. 이번 구조조정에 필요한 비용은 7억5000만~8억5000만 달러로 추산했다. 지난해 취임한 스티아 나델라 MS 최고경영자(CEO)는 휴대전화 사업 부문을 계속 축소하고 모바일 및 소프트웨어 회사를 인수하는데 힘쓰고 있다. 그는 이날 “휴대전화 사업을 키우는 대신 윈도 생태계를 만들어 발전시키려는 전략으로 이동할 것”이라고 말했다.하정민기자 dew@donga.com}
지난달 29일부터 이달 6일까지 은행 영업중단 및 주식시장 폐쇄를 단행했던 그리스가 7일 자본통제를 풀자마자 금융권의 현금 고갈 사태를 맞이할지도 모른다고 영국 BBC 등 주요 외신이 보도했다. 블룸버그가 그리스 중앙은행 자료를 인용해 보도한 바에 따르면 올해 1월 말 1299억 유로에 달했던 그리스 은행예금은 5월 말 300억 유로로 대폭 줄었다. 6월 말 수치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으나 루카 카첼리 그리스 은행연합회장은 3일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현재 그리스 은행권의 자금 여력이 고작 10억 유로”라고 밝힌 바 있다. 이는 그리스 국민 1100만 명에게 돌아갈 현금이 1인당 약 90유로(약 11만2050원)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공은 이제 유럽중앙은행(ECB)으로 넘어갔다. ECB는 그리스 금융위기가 가시화한 후 그리스 금융권에 890억 유로의 긴급유동성 지원(ELA)을 해왔다. 기존 한도 890억 유로는 사실상 소진된 상태이며 그리스 정부는 그간 ELA 한도 증액을 요구해왔다. ECB는 6일 회의를 열고 한도 증액 여부를 논의했다. 하지만 국제 채권단과 그리스 정부 간 구제금융 협상이 재개되지 않은 상황에서 ECB가 그리스 금융권에 섣불리 많은 돈을 지원하긴 어렵다고 로이터 등이 전망했다. 이에 따라 그리스의 유동성 위기와 국민들의 고통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그리스 정부가 국민투표 전 장담했던 것과 달리 7일 은행 문을 다시 열 수 있을지도 불투명하다고 예상하고 있다. 마르틴 슐츠 유럽의회 의장은 “신규 자금 지원이 없으면 임금 지급, 보건 및 전력 시스템 유지, 대중교통 운행 등이 모두 중단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BBC도 그리스 기업들이 7일부터 대규모 감원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고 덧붙였다. 그리스 정부가 현금 고갈을 막기 위해 ‘은행예금 삭감(헤어컷)’이란 극단적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FT는 이미 8000유로(약 996만 원)가 넘는 예금의 30%가 삭감될 가능성을 제기했다.하정민 기자 dew@donga.com}
위구르족 무슬림에 대한 중국의 탄압에 항의하는 터키 민족주의자 시위대가 4일 이스탄불에서 한국인 관광객을 중국인으로 오인해 공격했다고 일간지 휘리예트 등 현지 언론이 이날 보도했다. 위구르족은 터키인과 같은 튀르크계 민족으로 종교(이슬람교)가 같고 언어도 비슷하다. 터키 극우단체 ‘윌퀴 오자클라르’(터키어로 회색 늑대라는 뜻)의 회원이 대부분인 시위대는 이날 이스탄불 중심지 술탄아흐메트 광장에서 톱카프 궁전을 향해 행진하던 중 돌연 궁전 바깥에 있던 한국인들을 공격했다. 톱카프 궁전은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통치자 술탄의 처소로 매일 수천 명의 관광객이 찾는다. 한국인 관광객들은 시위대 해산을 위해 주변에 있던 전투경찰에 의해 구조됐다.하정민 기자 dew@donga.com}

사우디아라비아의 최고 부자 알 왈리드 빈 탈랄 왕자(60)가 전 재산 320억 달러(약 36조 원)를 기부한다고 영국 BBC 등이 1일 보도했다. 왈리드 왕자는 이날 사우디 수도 리야드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2003년 설립한 자선단체 ‘알 왈리드 자선사업’에 전 재산 320억 달러를 내놓겠다”고 밝혔다. 이 돈은 사우디의 여성 인권 향상, 재난 구호, 질병 퇴치 등에 쓰일 예정이다. 그는 이미 이 자선단체에 35억 달러를 기부했다. 왈리드 왕자는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주의 자선활동에 영감을 받아 전 재산 기부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게이츠는 2000년 자신과 부인 이름을 따서 만든 ‘빌 앤드 멀린다 게이츠 재단’에 지난해 말까지 423억 달러(약 47조3760억 원)를 내놨다. 왈리드 왕자는 “자선은 30년 전부터 해온 개인적 의무이자 이슬람 신앙의 본질”이라며 “평화롭고 평등하며 지속가능한 세계를 만드는 일에 헌신할 수 있어 기쁘고 자랑스럽다”고 밝혔다. 게이츠 창업주는 이 소식을 듣고 “왈리드 왕자의 결정은 우리 모두에게 자극이 될 것”이라며 기뻐했다고 BBC는 전했다. 왈리드 왕자는 왕족의 특혜를 누리는 대신에 자신의 힘으로 사업을 일군 것으로 유명하다. 1955년 사우디 2대 도시 지다에서 태어난 그는 압둘아지즈 사우디 초대 국왕의 손자이자 현 살만 국왕의 조카다. 그의 아버지인 탈랄 왕자는 살만 국왕의 이복형이다. 친할머니가 아르메니아인, 어머니가 레바논인인 탓에 일찌감치 왕위 계승과 멀어진 왈리드 왕자는 사업가의 길을 택했다. 미국 유학길에 올라 먼로대(경영학 학사)와 시러큐스대(사회과학 석사)를 졸업한 그는 25세인 1980년 사우디로 돌아와 아버지에게 빌린 단돈 3만 달러로 건설회사 킹덤홀딩스를 차렸다. 이후 씨티은행, 뉴스코프, 타임워너, 애플, 아마존, 디즈니 등 세계적 기업에 투자해 큰돈을 벌었다. 현재 리야드에 살고 있는 그는 미국에서 오래 생활한 덕분에 보수적인 사우디 왕가의 일원답지 않게 진보적이고 솔직한 언행으로 유명하다. 운전 금지 등 사우디 여성이 받는 각종 차별을 철폐하라고 요구하는가 하면 석유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사우디의 허약한 경제 체제도 곧잘 질타한다. 3번 결혼했지만 모두 이혼한 사생활도 언론의 단골 소재다. 사우디 왕실 일각에서는 그를 지나친 친미(親美) 성향의 개혁주의자로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한국과의 인연도 깊다.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했고 1997년 외환위기 당시 현대자동차와 대우에 각각 1억 달러, 5000만 달러를 투자했다 2001년 투자금을 회수했다. 올해 3월에는 중동 4개국을 순방한 박근혜 대통령과 리야드에서 만나 한국 투자를 늘리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전 재산 기부 발표로 왈리드 왕자의 정확한 재산 규모에 대한 논란도 커질 것으로 보인다. 미 경제주간지 포브스가 올해 4월 발표한 세계 억만장자 순위에 따르면 그의 재산은 226억 달러로 세계 34위 부자다. 하지만 그가 기부하겠다고 밝힌 액수는 포브스 추정 재산보다 94억 달러 더 많은 320억 달러다. 왈리드 왕자는 포브스가 2년 전 그의 재산을 200억 달러(당시 세계 26위)로 추산하자 자신의 재산을 과소평가했다며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다 합의 후 취하하기도 했다. 하정민 기자 dew@donga.com}

국제통화기금(IMF)에 진 빚을 갚지 못해 디폴트(채무 불이행)를 맞은 그리스에서 유럽연합(EU)의 구제금융안에 대한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5일)를 앞두고 심한 국론 분열이 일어나고 있다. 은행 문을 닫는 자본통제 조치가 국민투표 다음 날인 6일까지 계속될 예정이어서 서민들이 돈을 찾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다. 그리스 정부가 1일 현금카드나 신용카드가 없어 현금자동입출금기(ATM)를 이용할 수 없는 연금생활자들을 대상으로 은행 문을 열자 큰 혼란이 빚어졌다. 전국 1000여 개 은행 지점이 한시적으로 문을 열었으나 많은 인파가 몰리면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새벽부터 주요 은행 앞에는 백발이 성성한 연금생활자들이 장사진을 쳤다. 일부는 돈을 찾을 수 없을 것이란 불안감에 눈물까지 흘렸다. 운 좋게 은행 안으로 들어간 사람들도 1인당 한도인 60유로(약 7만5000원)밖에 찾지 못했다. 연금생활자인 알렉산드로스 씨는 “지난달 연금도 절반만 계좌에 들어왔는데 60유로만 주면 어떻게 살라는 거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은 사람이 늘면서 이 중 일부는 쓰레기를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상태로 내몰렸다. 건설업계에서 일하다 최근 실직한 아테네 시민 니코스 폴로노스 씨(55)는 요즘 하루 8시간씩 시내 쓰레기통을 뒤진다. 1kg에 0.5유로인 구리선과 70개에 1.5유로인 알루미늄 캔을 주워 하루에 5∼10유로(약 6200∼1만2500원)를 벌어 근근이 생활하는 그는 영국 텔레그래프와의 인터뷰에서 “쓰레기통에서 상태가 좋은 음식을 발견하면 바로 먹는다”고 털어놨다. 한편 지난달 29일부터 이달 1일까지 그리스 전역에서 구제금융안을 지지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들이 세(勢) 대결을 벌였다고 뉴욕타임스(NYT) 등 주요 외신이 보도했다. 지난달 30일 아테네 신타그마 광장에는 구제금융안 지지자 2만 명이 모였다. 소나기와 번개가 몰아치는 궂은 날씨에도 집회를 강행한 이들은 EU에 남아있기를 원한다는 의미에서 이마에 유로화를 붙이고 가슴엔 그리스어로 ‘예’를 의미하는 ‘NAI’ 스티커를 붙인 채 그리스 국기와 EU기를 함께 흔들었다. 은행원 알렉스 알기로스 씨는 “국민투표 결과 그리스의 EU 탈퇴(그렉시트)가 결정된다면 그리스를 떠나겠다”고 말했다. 유로화 체제를 벗어나 드라크마화 시대로 돌아가면 그리스인의 고통이 더 커질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상당수 참가자는 그리스가 디폴트에 빠진 것이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와 야니스 바루파키스 재무장관 때문이라며 둘의 퇴진을 요구했다. 한 남성은 “치프라스 총리와 바루파키스 장관은 적절한 대책도 없이 무조건 EU 탈퇴만 외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남성도 “EU를 벗어난 그리스가 (전 세계에서 고립된) 북한처럼 보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며 “이것이야말로 재앙”이라고 말했다. 신타그마 광장에서는 3일에도 채권단 협상안에 찬성하는 집회가 열릴 예정이다. 지난달 29일에는 아테네와 테살로니키 등에서 약 1만7000명이 구제금융안 반대 집회를 벌였다. 이 집회에는 각각 그리스어, 영어, 독일어로 부정을 의미하는 ‘OXI’ ‘NO’ ‘NEIN’ 깃발이 나부꼈다. 특히 대다수 참가자는 독일어 ‘NEIN’ 깃발을 흔들었다. 긴축정책을 주도한 그리스의 최대 채권국 독일에 깊은 반감을 표시한 것으로 풀이된다. 아테네에서 생선 가게를 하는 파리스 클로니스 씨는 “아테네는 세계 최초의 민주주의 도시지만 정작 아테네 시민들은 노예처럼 살고 있다”며 그렉시트를 지지할 뜻을 밝혔다. 변호사라고 밝힌 또 다른 남성도 “EU 구제금융안에 서명하는 것은 독일의 식민지가 되겠다는 뜻 아니냐”고 불만을 드러냈다. 텔레그래프는 변호사 금융인 회계사 등 안정적 직업을 가진 중장년층 그리스인들이 구제금융안 찬성 집회에 몰린 반면에 예술가 자영업자 젊은층은 반대 집회에 몰렸다고 전했다. 이어 “5일 국민투표의 진짜 의미는 EU 탈퇴에 대한 찬반 여부가 아니라 채권단이 제시할 추가 긴축안을 받아들일 용의와 여력이 있는 부유층과 이를 견딜 수 없다는 젊은층의 대립”이라며 국민투표에서 세대, 계급 갈등이 뚜렷하게 나타날 것으로 내다봤다. 하정민 dew@donga.com·전주영 기자}

20세기 회화 거장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의 초상화가 24일 영국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2480만 파운드(약 432억 원)에 낙찰됐다고 가디언 등 주요 외신이 보도했다. ‘게르트루트 뢰베의 초상화’(사진)라는 제목이 붙은 이 그림은 클림트가 1902년 자신의 주치의 딸이었던 19세 소녀 뢰베를 그린 작품이다. 뢰베는 훗날 헝가리 재벌 엘레메르 바루흐 펠소바니와 결혼했다. 펠소바니의 후손들과 클림트 재단은 이 그림의 소유권을 두고 약 20년간 소유권 분쟁을 벌여왔으나 최근 이를 경매에 내놓기로 합의했다. 양측의 구체적 합의 내용과 매수자의 신원은 알려지지 않았다. 이번 낙찰가는 예상가격 1200만∼1800만 파운드를 훨씬 웃돌며 클림트의 초상화 중 두 번째로 비싸다. 최고가 작품은 2006년 미 화장품업체 에스티 로더의 창업자 후손인 로널드 로더가 사들인 1907년 작 ‘아델레 블로흐바워의 초상’으로 1억3500만 달러(약 1499억 원)였다. 이날 클림트의 초상화 외에도 러시아 화가 카지미르 말레비치, 프랑스 인상파 화가 에두아르 마네 등의 작품이 대거 출품됐다. 이에 이날 하루 판매금액이 런던 경매 역사상 두 번째로 높은 1억7860만 파운드(약 3059억 원)를 기록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하정민 기자 dew@donga.com}

간무왕은 중국 당나라와 맞먹는 섬세하고 세련된 문화 예술을 꽃피운 헤이안(교토의 옛 이름) 시대(794∼1185년)를 연 사람이다. 794년 수도를 나라에서 교토로 옮겨 1868년 메이지왕이 수도를 지금의 도쿄로 옮기기 전까지 1000년 이상 이어진 ‘교토 수도 시대’를 시작한 주인공이다. 현대 일본인들은 그를 ‘교토의 신(神)’이라 부른다. 일본의 대표적인 수도인 교토와 도쿄로 천도한 왕은 간무왕과 메이지왕이다. 그래서 교토 사람들은 간무왕을 신으로 모시는 헤이안 신궁을 교토에 세웠고 도쿄 사람들은 메이지왕을 신으로 모시는 메이지 신궁을 도쿄에 세웠다. ○ 효자 중의 효자 간무왕 간무왕의 아버지이자 백제 여인 고야신립(?∼790년)의 남편인 고닌왕(709∼782년)은 일본의 49대 왕으로 61세 환갑의 나이에 왕위에 등극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고닌왕은 나당연합군과 싸우는 백제군을 위해 왜병을 대거 보내 백강(지금의 금강하구) 전투를 함께 치른 38대 덴지(天智·626∼672)왕의 직계 후손이다. 덴지왕 사후 왕권은 아들 고분왕에게 넘어가지만 작은 아버지 덴무의 쿠데타로 죽임을 당한다. 한국판 단종과 세조를 연상시키는 ‘진신(壬申)의 난’으로 왕권은 덴지왕의 동생 덴무(40대)로 옮겨간다. 덴무가(家)는 이후 48대까지 총 9명의 왕을 배출한다. 이런 상황에서 고닌은 왕위 계승을 기대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는 일찌감치 체념하고 전국을 떠돌며 방랑생활을 한다. 이때 만난 여인이 바로 고야신립이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고야신립은 처음엔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정실부인 자리에 앉지 못했다. 고닌 왕자의 부인은 45대 쇼무왕의 딸로 고닌왕과는 9촌 간이다. 일종의 근친혼이다. 두 사람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부인은 친정아버지가 왕이라는 것을 내세워 몰락한 왕가 후손인 고닌을 무시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770년 48대 쇼토쿠왕이 후계자 없이 별안간 숨지면서 왕위는 고닌에게 넘어간다. 61세라는 나이에 왕위에 오른 고닌 왕은 후계 구도에 고민이 컸다. 순리대로라면 정실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맏아들에게 물려줘야 했지만 고야신립과의 사이에서 얻은 야마베(山部·이후 간무왕)를 더 마음에 두고 있었다. 결국 그는 부인과 맏아들을 왕후와 태자 자리에서 폐위시킨 뒤 10년간 차근차근 야마베에게 후계자 교육을 하고 780년 왕위를 물려준다. ○ 왕비에서부터 각료까지 계로 간무왕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어머니 고야신립의 지위를 황태부인(皇太夫人)으로 추대해 아버지의 정식 부인으로 만들었다. 790년 어머니가 사망했을 때에는 정식 황태후(皇太后)로 받들고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고 유일한 존재라는 뜻의 ‘천고지일지자희존(天高知日之子姬尊)’이란 시호도 올린다. 간무왕의 왕비들 중에도 백제계 여인이 많았다. 이노우에 미쓰오 교토산업대 고대사연구소장은 “간무왕에게는 왕비가 무려 27명이 있는데 이 중 6∼7명이 백제여인이다. 일본 왕 중 이 정도로 많은 한반도 도래인 부인을 둔 사람은 간무왕 외에는 없었다”며 “그만큼 어머니의 나라인 백제를 사랑했다는 뜻”이라고 했다. 간무왕은 조정에서도 대놓고 백제인들을 중용하고 우대했다. ‘속일본기’에는 어머니의 조카를 재상으로 발탁하는데 백제계로서는 최초였다고 한다. 간무왕은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주변의 반대가 있자 “외척(外戚)이기 때문에 발탁한다”고 공개적으로 말했다고 한다. 오로지 외척이라는 이유로 백제인 관료의 직급을 두 단계나 올려 준 경우도 있다. 이와 관련해 김현구 전 고려대 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간무왕이 백제계를 중용했던 것은 당시 핵심 인재들이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간무왕은 어렵게 왕권을 되찾았다. 그가 의지할 것은 부모 양계였고 당시 관료계의 핵심을 이루던 백제계밖에는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백제계와 관계가 깊음을 강조하고 백제계를 우대한 것이다.” ○ 간무왕의 흔적들 교토에는 간무왕의 유적이 많다. 대표적인 곳이 왕궁으로 쓰이던 교토 고쇼(御所)와 간무왕을 신으로 모시는 헤이안 신궁 두 곳이다. 교토 고쇼는 보통 일본 궁내청에 예약을 해야 방문할 수 있지만 1년에 2번, 봄과 가을에 일주일씩 일반 방문객의 입장을 허용한다. 이곳을 찾은 4월 7일은 다행히 일반 개방 마지막 날이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이 건축물에서도 한반도 도래인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건물을 지을 때 간무왕의 명으로 신라인 건축가 이나베노(猪名部) 가문의 후예들과 백제인 건축가들이 동원됐다고 전해지는 것. 고대 일본은 큰 토목 및 건축 공사를 벌일 때마다 고구려, 신라, 백제 등지에 기술자들을 요청했고 일본과 친교를 맺고 싶어했던 한반도의 국가들도 기꺼이 기술자들을 파견해 줬으니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나베노 가문은 신라에서 선진 건축술을 갖고 일본으로 온 도래인들로 왕실 및 사찰 건축에 큰 영향을 줬다. 이나베노 모모요(猪名部百世)는 8세기 말 나라 지역 사찰 도다이(東大) 사의 비로자나대불과 대불전(大佛殿) 건립을 주도해 일본의 고위 관료직에도 올랐다. 도래인의 숨결이 묻어 있어서 그런지 교토 고쇼는 근엄하고 웅장하다기보다 경주의 안압지처럼 소박하고 절제된 신라 유적지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기와를 얹어 만든 흙담은 사람 키보다 조금 높은 정도여서 위압감을 주지 않았고 왕의 집무실이나 침소는 노송의 껍데기를 짜 얹어 강원도의 너와집을 떠올리게 했다. 돌아갈 수 없는 먼 길을 건너온 신라의 건축가들은 수도 경주와 닮은 분지에 자리 잡은 교토에 또 하나의 신라를 세우려고 애썼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간무왕의 교토 천도가 도래인의 힘을 강화하기 위한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고 왕궁과 부속 건물인 교토 고쇼를 짓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1000년을 이어 간 고도(古都) 교토의 첫 출발은 백제인의 핏줄, 신라인의 기술, 고구려인의 신앙이 모두 어우러진 합작품인 셈이다. 비록 후대에 복원됐지만 당시의 건축 양식을 그대로 본뜬 헤이안 신궁에선 헤이안 시대 초기 도래인들의 열정과 고뇌, 고국을 향한 향수(鄕愁)가 함께 느껴졌다. 이들은 이런 복잡한 감정을 섬세한 건축술로 승화시켰고 지금은 양국 간 우정의 상징이 돼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붙잡고 있다. :: 헤이안쿄(平安京) ::794년 간무왕이 수도로 삼을 당시 교토의 옛 이름. 이때부터 왕 중심의 중앙집권체제가 확립되는 헤이안 시대가 시작됐다. 1868년 메이지왕이 도쿄로 수도를 옮길 때까지 약 1000년간 일본의 수도였다. 교토=하정민 dew@donga.com / 최창봉 기자}
20세기 회화 거장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의 초상화가 24일 영국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2480만 파운드(약 432억 원)에 낙찰됐다고 가디언 등 주요 외신이 보도했다. ‘게르투르드 뢰베의 초상화’라는 제목이 붙은 이 그림은 클림트가 1902년 자신의 주치의 딸이었던 19세 소녀 뢰베를 그린 작품이다. 뢰베는 훗날 헝가리 재벌 엘레메르 바루크 펠소바니와 결혼했다. 펠소바니의 후손들과 클림트 재단은 이 그림의 소유권을 두고 약 20년간 소유권 분쟁을 벌여왔으나 최근 이를 경매에 내놓기로 합의했다. 양측의 구체적 합의 내용과 매수자의 신원은 알려지지 않았다. 이번 낙찰가는 예상가격 1200만~1800만 파운드를 훨씬 웃돌며 클림트의 초상화 중 두 번째로 비싸다. 최고가 작품은 2006년 미 화장품업체 에스티 로더의 창업자 후손인 로널드 로더가 사들인 1907년 작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으로 1억3500만 달러(약 1499억 원)였다. 이날 클림트의 초상화 외에도 러시아 화가 카지미르 말레비치, 프랑스 인상파 화가 에두아르드 마네 등의 작품이 대거 출품됐다. 이에 이날 하루 판매금액이 런던 경매 역사상 두 번째로 높은 1억7860만 파운드(약 3059억 원)을 기록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하정민 기자 dew@donga.com}

한일 월드컵 공동 개최를 몇 달 앞둔 2001년 12월 23일 아키히토(明仁) 일왕은 68세 생일을 맞아 왕실에서 기자회견을 갖는 자리에서 폭탄 발언을 한다. “나 자신으로서는 간무 천황(50대 천황·737∼806·재위 781∼806년)의 생모(生母)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續日本紀)’에 기록돼 있어 한국과의 인연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의 말은 월드컵 공동 개최라는 한일 간의 대형 축제를 앞두고 한국과 일본이 더 가까워졌으면 좋겠다는 취지에서 한 것이었지만 일본 내에서 금기로 통하던 천황가(家)의 백제 유래설을 천황 스스로가 깼다는 점에서 파문을 일으켰다. 천황가가 백제 왕실과 밀접했다는 주장은 일부 한일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꾸준히 제기되어 왔지만 천황 스스로가 말한 것은 처음이었다는 점, 8세기 후반에서 9세기에 걸쳐 재위했던 간무(桓武) 천황과 어머니를 구체적으로 거론했다는 점, 간무 천황 어머니가 무령왕 자손이었다는 ‘속일본기’ 내용을 그대로 인용해 자신도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밝힌 점 등은 파격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한국이나 일본에서 천황 발언에 대한 후폭풍은 별로 없었다. 일본에서는 아사히신문만이 발언을 보도했고 나머지는 모두 잠잠했다. 천황계는 만세일계(萬世一系)로 전해져 내려와 일본에서 자생했다는 황국사관(皇國史觀)에 젖어 있던 우익들이 민감하게 반응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정치적 발언이므로 일희일비할 필요 없다”고 일축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3년 뒤인 2004년 8월 3일에는 아키히토 일왕의 5촌 당숙이자 일본 왕족인 아사카노 마사히코(朝香誠彦) 씨가 수행원과 친척 2명만 데리고 무령왕릉(충남 공주)을 찾아 참배하고 간 사실이 이튿날 공주시의 발표로 알려졌다. 이들을 안내한 이석호 전 부여문화원장은 당시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백제 무령왕의 후손인 일본 왕족들의 무령왕릉에 대한 관심이 매우 크다. 이번 참배는 일본 내 여론을 의식해 비공식적으로 이뤄졌다”고 전했다. 이렇듯 일본 천황가와 백제의 인연은 단순한 전설이나 일부의 주장이 아니라 일본 왕실 스스로가 인정하는 대목이라는 점에서 한일 교류의 역사가 그렇게 간단한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한국과 일본이 더 가까워지려면 보다 오랜 역사로부터 비롯된 깊은 인연에 주목할 이유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 간무 천황의 생모 고야신립 그렇다면 아키히토 일왕이 언급한 간무 천황의 생모는 누구일까. 또 무령왕과 어떤 관계가 있는 사람일까. ‘속일본기’(789년)는 이렇게 전한다. ‘황태후의 성은 화씨(和氏)이고 이름은 신립(新笠)이다. 황태후의 선조는 백제 무령왕의 아들인 순타 태자다. 황후는 용모가 덕스럽고 정숙하여 일찍이 명성을 드러냈다. 고닌(光仁) 천황이 아직 즉위하지 않았을 때 혼인하여 맞아들였다. … 백제의 먼 조상인 도모왕(都慕王)이라는 사람은 하백(河伯)의 딸이 태양의 정기에 감응해서 태어난 사람인데 황태후는 곧 그 후손이다.’ 여기서 언급된 고닌 천황은 간무 천황의 아버지이다. 그의 부인이자 간무 천황의 생모는 고야신립(高野新笠·다카노노 니가사)이다. 기자는 일본에 있는 그의 흔적을 찾기 위해 4월 말 교토에 있는 무덤을 찾아갔다. 능은 교토 시내 중심부에서 서쪽으로 40분가량 떨어진 오에(大枝) 마을 이세코(伊勢講) 산 중턱에 있었다. 계절상 봄이었지만 낮 기온이 30도를 오르내리는 때 이른 더위가 한창이던 4월 22일 오후 이곳으로 기자를 안내한 사람은 고대 한일 교류 연구에서 일본 내 최고 권위자로 불리는 이노우에 미쓰오(井上滿郞) 교토산업대 고대사연구소장(75)이었다. 동아일보 취재팀이 한일 고대문화 교류 흔적을 취재해 연재할 것이라는 사실에 흥미를 가진 아사히신문 오사카 지국 사회부 나카노 아키라 기자(44)도 동행했다. 산 입구에 있는 계단 몇 개를 오르자 빽빽한 대나무 숲이 일행을 에워쌌다. 그 광경이 장관이어서 굳이 대나무로 유명한 교토 근교 관광지 아라시야마를 갈 필요가 없다고 느낄 정도였다. 5분쯤 산을 더 오르자 무덤이 나타났다. 고야신립이 묻힌 능은 둥근 봉분이 밖으로 드러나 있는 한국식과는 많이 달랐다. 능 바로 앞에 일반인들의 출입을 제한한 작은 철문이 있고 능 중앙에 돌로 된 도리이(鳥居·두 개의 나무 기둥을 세우고 윗부분을 나무 가로대로 연결한 문. 흔히 일본 신사 정문에 서 있다) 형태의 구조물과 그 양측의 작은 석등 2개를 다시 한 번 철문으로 감싼 일종의 이중 잠금 구조였다. 두 철문 사이의 공간에는 오른편에 비석이, 왼편에는 제법 큰 기와지붕 아래 걸린 나무 편액이 있었다. 비석에는 ‘光仁天皇皇后高野新笠大枝陵(광인천황황후고야신립대지릉)’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광인천황’이란 남편 고닌 천황을 뜻한다. 편액에는 ‘天高知日之子姬尊(천고지일지자희존)’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었는데 이는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고 유일한 존재’라는 뜻으로 모친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던 아들 간무 천황이 어머니 사후 직접 내린 시호였다. 이노우에 소장은 “시호에 ‘태양 일(日)’자를 쓰는 것은 고구려 시조이자 태양왕 후손인 주몽의 후손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며 “간무 천황도 어머니가 백제계임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기에 이런 시호를 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본 신사 입구에서 자주 보던 도리이 형태의 문이 무덤 안에 있다는 것도 특이했다. 이에 대해 이노우에 소장은 “일본인들은 도리이를 현세와 내세를 구분 짓는 상징물로 여긴다. 즉, 도리이를 통과한다는 것은 혼탁한 현세를 건너 신성한 내세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그만큼 이 무덤에 신성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 취재를 거절한 히라노 신사 교토에는 또 고야신립의 위패를 모신 ‘히라노(平野)신사’가 있다. 나라에서 헤이안(교토의 옛 이름)으로 천도를 단행한 간무 천황이 수도를 옮기면서(794년) 어머니의 혼이 담긴 위패까지 함께 옮겨 신사를 만들었다. 이때 그는 어머니에게 태황태후(太皇太后)라는 최고의 지위를 내린다. 히라노신사는 서울 광화문에 빗댈 수 있는 교토 기차역에서 시내버스로 30분 정도 북쪽에 있었다. 교토 시내 여러 신사 중 벚꽃이 가장 아름답기로 유명해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한국인들에게도 익숙한 곳이다. 특히 65대 가잔(花山·968∼1008) 천황은 이곳에서 직접 벚꽃 식수를 하기도 했다. 3월 말∼4월 초 벚꽃 절정기에는 신사 안에 전통상품, 기념품, 각종 먹거리 등을 파는 노천 가게가 대거 들어선다. 흐드러진 벚꽃 아래 한국식 포장마차와 유사한 가게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고 이를 찾는 관광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기자가 찾은 때에는 대부분 벚꽃이 진 상태였다. 벚꽃도 관광객도 거의 없는 신사는 입구에서부터 다소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5분 정도 걸어 들어가면 신사 본관이 나타난다. 구도신(久度神), 후루아키신(古開神), 이마키신(今木神), 히메신(比賣神)을 모시는 신전이 있는데 이 중 히메신이 바로 고야신립을 모신 것이다. 기자는 3월 초부터 히라노신사 측에 백제와의 인연과 관련한 취재를 요청했으나 “우리 신사가 백제 또는 한국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점을 분명히 강조하고 싶다. 따라서 취재에 응할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한국과의 관련성을 묻지 않을 테니 그냥 신사의 유래와 현재에 대한 질문 몇 개만 받아 달라는 요청도 거부했다. 신사를 걸어 나오는 뒷맛이 썼다.:: 속일본기(續日本紀) ::697년부터 791년까지 94년간의 역사를 40권 분량으로 다룬 책. 일본서기(720년)에 이어 두 번째로 만들어졌으며 일본 고대사 연구의 필수 자료로 평가받는다. 교토=하정민 기자 dew@donga.com※9회는 ‘백제 여인과 천황의 사랑이야기’입니다.}
한일 월드컵 공동 개최를 1년 앞둔 2001년 12월 23일 아키히토(明仁) 현 일왕은 68세 생일을 맞아 왕실에서 기자회견을 갖는 자리에서 폭탄 발언을 한다. “나 자신으로서는 간무 천황(50대 천황·737~806년·재위 781~806년)의 생모(生母)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續日本紀)’에 기록돼 있어 한국과의 인연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의 말은 월드컵 공동 개최라는 한일 간의 대형 축제를 앞두고 한국과 일본이 더 가까워졌으면 좋겠다는 취지에서 한것이었지만 일본 내에서 금기로 통하던 천황가(家)의 백제 유래설을 천황 스스로가 깼다는 점에서 파문을 일으켰다. 천황가가 백제 왕실과 밀접했다는 주장은 일부 한일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꾸준히 제기되어 왔지만 천황 스스로가 말한 것은 처음이었다는 점, 8세기 후반에서 9세기에 걸쳐 재위했던 간무(桓武) 천황과 어머니를 구체적으로 거론했다는 점, 간무 천황 어머니가 무령왕 자손이었다는 ‘속일본기’ 내용을 그대로 인용해 자신도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밝힌 점 등은 파격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한국이나 일본에서 천황 발언에 대한 후폭풍은 별로 없었다. 일본에서는 아사히신문만이 발언을 보도했고 나머지는 모두 잠잠했다. 천황계는 만세일계(萬世一系)로 전해져 내려와 일본에서 자생했다는 황국사관(皇國史觀)에 젖어 있던 우익들이 민감하게 반응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정치적 발언이므로 일희일비할 필요 없다”고 일축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3년 뒤인 2004년 8월 3일에는 아키히토 일왕의 5촌 당숙이자 일본 왕족인 아사카노 마사히코(朝香誠彦) 씨가 수행원과 친척 2명만 데리고 무령왕릉(충남 공주)을 직접 찾아 참배하고 간 사실이 이튿날 공주시의 발표로 알려졌다. 이들을 안내한 이석호 전 부여문화원장은 당시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백제 무령왕의 후손인 일본 왕족들의 무령왕릉에 대한 관심이 매우 크다. 이번 참배는 일본 내 여론을 의식해 비공식적으로 이뤄졌다”고 전했다. 이렇듯 일본 천황가와 백제의 인연은 단순한 전설이나 일부의 주장이 아니라 일본 왕실 스스로가 인정하는 대목이라는 점에서 한일 교류의 역사가 그렇게 간단한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한국과 일본이 더 가까워지려면 보다 오랜 역사로부터 비롯된 깊은 인연에 주목할 이유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간무 천황의 생모 고야신립 그렇다면 아키히토 일왕이 언급한 간무 천황의 생모는 누구일까. 또 무령왕과 어떤 관계가 있는 사람일까. ‘속일본기’(789년)는 이렇게 전한다. ‘황태후의 성은 화씨(和氏)이고 이름은 신립(新笠)이다. 황태후의 선조는 백제 무령왕의 아들인 순타 태자다. 황후는 용모가 덕스럽고 정숙하여 일찍이 명성을 드러냈다. 고닌(光仁) 천황이 아직 즉위하지 않았을 때 혼인하여 맞아들였다…백제의 먼 조상인 도모왕(都慕王)이라는 사람은 하백(河伯)의 딸이 태양의 정기에 감응해서 태어난 사람인데 황태후는 곧 그 후손이다.’ 여기서 언급된 고닌 천황은 간무 천황의 아버지이다. 그의 부인이자 간무 천황의 생모는 고야신립(高野新笠·다카노노 니가사)이다. 기자는 일본에 있는 그의 흔적을 찾기 위해 지난 4월 말 교토에 있는 무덤을 찾아갔다. 능은 교토 시내 중심부에서 서쪽으로 약 40분가량 떨어진 오에(大枝) 마을 이세코(伊勢講) 산 중턱에 있었다. 계절상 봄이었지만 낮 기온이 30도를 오르내리는 때 이른 더위가 한창이던 4월 22일 오후 이곳으로 기자를 안내한 사람은 고대 한일 교류 연구에서 일본 내 최고 권위자로 불리는 이노우에 미쓰오(井上滿郞) 교토산대 고대사연구소장(75·사진)이었다. 동아일보 취재팀이 한일 고대문화 교류 흔적을 취재해 연재할 것이라는 사실에 흥미를 가진 아사히신문 오사카 지국 사회부 나카노 아키라 기자(44)도 동행했다. 산 입구에 있는 계단 몇 개를 오르자 빽빽한 대나무 숲이 일행을 에워쌌다. 그 광경이 장관이어서 굳이 대나무로 유명한 교토 근교 관광지 아라시야마를 갈 필요가 없다고 느낄 정도였다. 5분쯤 산을 더 오르자 무덤이 나타났다. 고야신립이 묻힌 능은 둥근 봉분이 밖으로 드러나 있는 한국식과는 많이 달랐다. 능 바로 앞에 일반인들의 출입을 제한한 작은 철문이 있고 능 중앙에 돌로 된 도리이(鳥居·두 개의 나무 기둥을 세우고 윗부분을 연결하는 나무 가로대로 연결한 문. 흔히 일본 신사 정문에 서 있다) 형태의 구조물과 그 양측의 작은 석등 2개를 다시 한번 철문으로 감싼 일종의 이중 잠금 구조였다. 두 철문 사이의 공간에는 오른편에 돌 비석이, 왼편에는 제법 큰 기와지붕 아래 걸린 나무 편액이 있었다. 비석에는 ‘光仁天皇皇后高野新笠大枝陵(광인천황황후고야신립대지릉)’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광인천황’이란 남편 고닌 천황을 뜻한다. 편액에는 ‘天高知日之子姬尊(천고지일지자희존)’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었는데 이는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고 유일한 존재’라는 뜻으로 모친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던 아들 간무 천황이 어머니 사후 직접 내린 시호였다. 이노우에 소장은 “시호에 ‘태양 일(日)’자를 쓰는 것은 고구려 시조이자 태양왕 후손인 주몽의 후손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며 “간무 천황도 어머니가 백제계임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기에 이런 시호를 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본 신사 입구에서 자주 보던 도리이 형태의 문이 무덤 안에 있다는 것도 특이했다. 이에 대해 이노우에 소장은 “일본인들은 도리이를 현세와 내세를 구분 짓는 상징물로 여긴다. 즉 도리이를 통과한다는 것은 혼탁한 현세를 건너 신성한 내세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그만큼 이 무덤에 대해 신성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취재를 거절한 히라노 신사 교토에는 또 고야신립의 위패를 모신 ‘히라노 신사(平野神社)’가 있다. 나라에서 헤이안(교토의 옛 이름)으로 천도를 단행한 간무 천황이 수도를 옮기면서(794년) 어머니의 혼이 담긴 위패까지 함께 옮기며 신사를 만든 것이다. 이때 그는 어머니에게 태황태후(太皇太后)라는 최고의 지위를 내린다. 히라노 신사는 서울 광화문에 빗댈 수 있는 교토 중심부의 기차역에서 시내버스로 20분 정도 북쪽에 있었다. 교토 시내 여러 신사 중 벚꽃이 가장 아름답기로 유명해 일본인들은 물론 한국인들에게 매우 익숙한 곳이다. 특히 65대 가잔(花山) 천황(968~1008)은 이곳에서 직접 벚꽃 식수를 하기도 했다. 3월 말~4월 초 벚꽃 절정기에는 신사 안에 전통상품, 기념품, 각종 먹거리 등을 파는 노천 가게가 대거 들어선다. 흐드러진 벚꽃 아래 한국식 포장마차와 유사한 가게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고 이를 찾는 관광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기자가 찾은 때에는 대부분 벚꽃이 진 상태였다. 벚꽃도 관광객도 거의 없는 신사는 입구에서부터 다소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5분 정도 걸어 들어가면 신사 본관이 나타난다. 구도신(久度神), 후루아키신(古開神), 이마키신(今木神), 히메신(比賣神) 등 4명을 모시는 신전이 있는데 이 중 히메신이 바로 고야신립을 모신 것이다. 기자는 3월 초부터 히라노 신사 측에 백제와의 인연과 관련한 취재를 요청했으나 “우리 신사가 백제 또는 한국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점을 분명히 강조하고 싶다. 따라서 취재에 응할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한국과의 관련성을 묻지 않을 테니 그냥 신사의 유래와 현재에 대한 질문 몇 개만 받아 달라는 요청도 거부했다. 신사를 걸어 나오는 뒷맛이 썼다.교토=하정민기자 dew@donga.com}

6·25전쟁 당시 부상한 동료 병사들을 헌신적으로 돌봐 ‘미스터 나이팅게일’로 불렸던 80대 미국 참전용사가 65년 만에 뒤늦게 무공훈장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잭슨빌닷컴 등 미 언론이 21일 보도했다. 데니스 로스 플로리다 주 하원의원(공화)은 최근 현재 미국 의회가 조정 중인 2016 회계연도(2015년 10월∼2016년 9월) 국방수권법안에 플로리다 주에 사는 6·25전쟁 참전용사 에드워드 핼컴 씨(84)에게 수훈십자훈장을 수여하자는 조항을 발의했다. 수훈십자훈장은 명예훈장에 이어 미국에서 두 번째로 높은 무공훈장이다. 핼컴 씨는 1947년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불과 16세의 나이로 입대했다. 그와 동료들은 1950년 7월 말 경남 함양군 안의면의 한 초등학교에서 북한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200명이 넘는 동료 중 약 11명만 생존한 이 전투에서 그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으나 북한군에게 포로로 붙잡히고 말았다. 결국 안의면에서 서울까지 약 270km의 거리를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행군해야 했다. 서울 포로수용소에 도착한 핼컴 씨는 376명의 다른 전쟁포로를 헌신적으로 보살폈다. 특히 그는 각종 감염과 전염의 위험 속에서도 한시도 병상을 떠나지 않았다. 또 같은 해 9월 미국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북한군이 서울에서 평양까지 퇴각하는 과정, 일명 ‘죽음의 행군’을 겪으면서도 부상자들을 잘 보살펴 이들 대부분이 평양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 했다. 평양 수용소에 도착한 그는 전세가 불리해진 북한군이 포로 감시에 소홀해지자 1950년 10월 동료 4명과 함께 탈출했다. 로스 의원은 “핼컴 씨는 스스로를 질병과 감염에 노출시키면서 동료 병사의 간호에 힘을 쏟았다”며 “이번 훈장 수여는 너무 늦은 감이 있다”고 말했다. 하정민 기자 dew@donga.com}
한국전 당시 부상한 동료 병사들을 헌신적으로 돌봐 ‘미스터 나이팅게일’로 불렸던 80대 미국 참전용사가 65년 만에 뒤늦게 무공훈장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잭슨빌닷컴 등 미 언론이 21일 보도했다. 데니스 로스 플로리다 주 하원의원(공화)은 최근 현재 미국 의회가 조정 중인 2016 회계연도(2015년 10월~2016년 9월) 국방수권법안에 플로리다 주에 사는 한국전 참전용사 에드워드 핼콤 씨(84·사진)씨에게 수훈십자훈장을 수여하자는 조항을 발의했다. 수훈십자훈장(Distinguished Service Cross)은 명예훈장(Medal of Honor)에 이어 미국에서 두 번째로 높은 무공훈장이다. 핼콤 씨는 1947년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불과 16세의 나이로 입대했다. 일본 오키나와 주 미군 기지에서 복무한 그는 한국전 발발 직후 미 육군 29보병연대 1대대 2중대 소속 일병으로 한국에 파병됐다. 그와 동료들은 1950년 7월 말 경남 함양군 안의면의 한 초등학교에서 북한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200명이 넘는 동료 중 약 11명만 생존한 이 전투에서 그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으나 북한군에게 포로로 붙잡히고 말았다. 결국 안의면에서 서울까지 약 270km의 거리를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행군해야 했다. 서울 포로수용소에 도착한 핼콤 씨는 376명의 다른 전쟁포로들을 헌신적으로 보살폈다. 특히 그는 각종 감염과 전염의 위험 속에서도 한시도 병상을 떠나지 않았다. 또 같은 해 9월 미국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북한군이 서울에서 평양까지 퇴각하는 과정, 일명 ‘죽음의 행군’을 겪으면서도 부상자들을 잘 보살펴 이들 대부분이 평양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 했다. 평양수용소에 도착한 그는 전세가 불리해진 북한군이 포로 감시에 소홀해지자 1950년 10월 동료 4명과 함께 탈출했다.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20년 넘게 육군에서 복무하다 퇴직해 플로리다 주 클레이 카운티에 거주하고 있다. 로스 의원은 “핼콤 씨는 스스로를 질병과 감염에 노출시키면서 동료 병사의 간호에 힘을 쏟았다”며 “이번 훈장 수여는 너무 늦은 감이 있다”고 말했다.하정민기자 dew@donga.com}
146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에서 사상 초유의 경쟁 구단 해킹 사건이 발생했다. 알렉스 로드리게스, 라이언 브런 등 MLB를 대표하는 스타 선수들의 약물 복용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해킹까지 발생함에 따라 MLB 전체에 대대적인 개혁 바람이 불 가능성이 높다고 미 언론은 분석하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가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내부 통신망 ‘그라운드 컨트롤’을 해킹한 혐의로 미 연방수사국(FBI)과 법무부의 수사를 받고 있다고 16일 보도했다. 통신망 안에는 애스트로스 선수들의 신상, 성적에 관한 각종 통계, 타 구단과의 트레이드 논의 자료, 야구단 운영 전략 등에 관한 광범위한 정보가 담겨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사건의 발단은 지난해 7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애스트로스는 6개월간 다른 22개 구단과 비밀리에 트레이드를 논의한 문건이 외부로 유출되는 바람에 큰 홍역을 치렀다. 자체 조사를 벌였지만 유출자 및 경로를 밝히지 못한 애스트로스는 FBI에 수사를 의뢰했다. 약 1년간 수사를 진행한 FBI는 카디널스의 한 직원이 살고 있는 집 컴퓨터가 이번 해킹에 이용된 것을 밝혀냈다. 미 야구계는 ‘강팀’ 카디널스가 ‘약팀’ 애스트로스를 해킹했다는 사실에도 큰 충격을 받은 분위기다. 1882년 설립된 카디널스는 월드시리즈에서 11회 우승해 30개 MLB 구단 중 뉴욕 양키스(27회)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우승컵을 안았다. 16일 기준 승률도 0.672(43승 21패)로 30개 구단 중 독보적 1위다. 반면 1962년 탄생한 애스트로스는 카디널스에 비해 구단 역사가 훨씬 짧고 월드시리즈 우승 경험은 아예 없다. 그런데도 카디널스가 애스트로스를 해킹한 건 카디널스에서 애스트로스로 이직한 제프 러노 애스트로스 단장(49) 때문이라고 NYT는 전했다. 그는 펜실베이니아대에서 경제학 학사, 노스웨스턴대에서 경영학 석사를 취득한 엘리트로 2003년부터 8년간 카디널스의 스카우트 및 육성 책임자로 일하며 탁월한 성적을 일궈냈다. 그는 ‘레드버드’라는 내부 정보망도 만들어 야구단 운영 정보를 체계적이고 빈틈없이 관리했다. 이런 러노를 눈여겨본 애스트로스 구단은 2011년 12월 그를 단장으로 스카우트했다. 문제는 이때부터 발생했다. 그는 이직 과정에서 몇몇 카디널스 구단 관계자 및 코치들을 데려갔고 ‘레드버드’와 비슷한 내부 정보망 ‘그라운드 컨트롤’까지 만들었다. 휴스턴은 2013년부터 아메리칸리그 서부지구에 속해 있으나 러노의 이적 당시에는 세인트루이스와 같은 내셔널리그 중부지구 소속팀이었다. 1년에 162경기를 하는 MLB 구단은 이 중 절반에 약간 못 미치는 76경기를 같은 지구의 다른 4개 구단과 겨루기 때문에 카디널스 내부에는 러노가 자신들의 시스템 및 핵심 인재를 도용했다며 비판하는 사람이 많았다. FBI는 이때부터 러노에게 앙심을 품은 몇몇 카디널스 직원들이 이번 해킹을 주도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현재 카디널스 구단 측은 직원 개인의 부정행위로 치부하고 있으나 단장 등 고위층의 연루 사실까지 드러나면 대대적인 형사처벌, 천문학적 손해배상금 납부가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와 관련해 MLB 운영을 관장하는 롭 만프레드 커미셔너는 “조사에 최대한 협조하고 있으며 구체적인 사실이 드러난 후 처벌 수위를 논의하겠다”고 밝혔다.하정민 기자 dew@donga.com}
146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미 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에서 사상초유의 경쟁구단 해킹 사건이 발생했다. 최근 알렉스 로드리게스, 라이언 브런 등 MLB를 대표하는 스타 선수들의 약물 복용 파문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해킹까지 발생함에 따라 MLB 전체에 대대적인 개혁 바람이 불 가능성이 높다고 미 언론은 분석하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가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내부 통신망 ‘그라운드 컨트롤’을 해킹한 혐의로 미 연방수사국(FBI)과 법무부의 수사를 받고 있다고 16일 보도했다. 통신망 안에는 애스트로스 선수들의 신상 정보, 성적에 관한 각종 통계, 타 구단과의 트레이드 논의 자료, 야구단 운영 전략 등에 관한 비밀 정보가 담겨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사건의 발단은 지난해 7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애스트로스는 6개월 간 다른 22개 구단과 비밀리에 트레이드를 논의한 문건이 외부로 유출되는 바람에 큰 홍역을 치렀다. 자체 조사를 벌였지만 유출자 및 경로를 밝히지 못한 애스트로스는 FBI에 수사를 의뢰했다. 약 1년간 수사를 진행한 FBI는 카디널스의 한 직원이 살고 있는 집 컴퓨터가 이번 해킹에 이용된 것을 밝혀냈다. 미 야구계는 ‘강팀’ 카디널스가 ‘약팀’ 애스트로스를 해킹했다는 사실에도 큰 충격을 받은 분위기다. 1882년 설립된 카디널스는 월드시리즈에서 11회 우승해 30개 MLB 구단 중 뉴욕 양키스(27회)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우승컵을 안았다. 17일 기준 승률도 0.672(42승 21패)로 30개 구단 중 독보적 1위다. 반면 1962년 탄생한 애스트로스는 카디널스에 비해 구단 역사가 훨씬 짧고 월드시리즈 우승 경험은 아예 없다. 그런데도 카디널스가 애스트로스를 해킹한 건 카디널스에서 애스트로스로 이직한 제프 루노우 애스트로스 단장(49·사진) 때문이라고 NYT는 전했다. 그는 펜실베이니아대에서 경제학 학사, 노스웨스턴대에서 경영학 석사를 취득한 엘리트로 2003년부터 8년간 카디널스의 스카우트 및 육성 책임자로 일하며 탁월한 성적을 일궈냈다. 그는 ‘레드버드’라는 내부 정보망도 만들어 야구단 운영 정보를 체계적이고 빈틈없이 관리했다. 이런 루노우를 눈여겨본 애스트로스 구단은 2011년 12월 그를 단장으로 스카우트했다. 문제는 이때부터 발생했다. 그는 이직 과정에서 몇몇 카디널스 구단 관계자 및 코치들을 데려갔고 ‘레드버드’와 비슷한 내부 정보망 ‘그라운드 컨트롤’까지 만들었다. 휴스턴은 2013년부터 아메리칸리그 서부지구에 속해 있으나 루노우의 이적 당시에는 세인트루이스와 같은 내셔널리그 중부지구 소속팀이었다. 1년에 162경기를 하는 MLB 구단은 이중 절반에 약간 못 미치는 76경기를 같은 지구 구단과 겨루기 때문에 카디널스 내부에는 루노우가 자신들의 시스템 및 핵심 인재를 무단 도용했다며 비판하는 사람이 많았다. FBI는 이때부터 루노우에 앙심을 품은 몇몇 카디널스 직원들이 이번 해킹을 주도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현재 카디널스 구단 측은 직원 개인의 부정행위로 치부하고 있으나 단장 등 고위층의 연루 사실까지 드러나면 대대적인 형사처벌, 천문학적 손해배상금 납부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이와 관련, MLB 운영을 관장하는 롭 만프레드 커미셔너는 성명을 통해 “조사에 최대한 협조하고 있으며 구체적인 사실이 드러난 후 처벌 수위를 논의하겠다”고 밝혔다.하정민 기자 dew@donga.com}
이달 6일 탈옥해 9일째 행방이 묘연한 미국 남성 탈옥수 2명이 탈옥을 도와준 교도소 여직원 조이스 미첼 씨(51·여)와 성관계를 맺었으며 탈옥 후 그의 남편을 살해할 계획까지 세웠다고 CNN 등 미 언론이 15일 보도했다. 남편과 함께 뉴욕 주 클린턴 교도소 내 양복점에서 일하는 미첼 씨는 아이 1명을 둔 평범한 백인 중년 여성이다. 그런데 미첼 씨는 이달 12일 탈옥수 리처드 맷(48)과 데이비드 스웨트(34)의 탈옥을 도운 혐의로 체포됐다. 미 언론에 따르면 미첼 씨는 2013년부터 두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고 이들이 자신의 남편을 살해해줄 것으로 믿고 탈옥을 적극 도운 것으로 알려졌다. 한 소식통은 “특히 맷이 미첼을 적극 유혹했다. 미첼 역시 자신이 그를 사랑한다고 여겼다”고 전했다. 구치소에 수감 중인 미첼 씨는 이날 수갑을 찬 채 법정에 잠시 출두했으나 쏟아지는 취재진들의 질문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유죄가 확정되면 그는 최고 8년형을 선고 받는다. 앞서 맷은 1997년 옛 직장 상사를 납치, 살해한 뒤 시신을 토막 낸 혐의로 징역 25년형을 선고받았고 스웨트는 2002년 뉴욕 주 브룸 카운티 부보안관을 살해한 혐의로 종신형에 처해졌다. 두 탈옥수는 6일 새벽 감방 뒤쪽 벽에 구멍을 뚫고 높이 9m가 넘는 벽체 내부를 기어 내려가 교도소 인근의 맨홀로 빠져나갔다. 클린턴 교도소는 미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철통 경비 체제를 갖춘 곳이어서 미 언론은 이들의 탈옥을 ‘현대판 쇼생크 탈출’로 부르고 있다. 당초 수색 인력 500명을 동원했던 미 경찰은 인력을 300명 더 늘려 교도소 주변을 샅샅이 뒤지고 있지만 탈옥수들을 찾지 못했다.하정민 기자 dew@donga.com}
이달 6일 탈옥해 9일째 행방이 묘연한 미국 남성 탈옥수 2명이 탈옥을 도와준 교도소 여직원 조이스 미첼 씨(51·여)와 성관계를 맺었으며 탈옥 후 그의 남편을 살해할 계획까지 세웠다고 CNN 등 미 언론이 15일 보도했다. 남편과 함께 뉴욕 주 클린턴 교도소 내 양복점에서 일하는 미첼 씨는 아이 1명을 둔 평범한 백인 중년 여성이다. 그런데 미첼 씨는 이달 12일 탈옥수 리처드 맷(48)과 데이비드 스웨트(34)의 탈옥을 도운 혐의로 체포됐다. 미 언론에 따르면 미첼 씨는 2013년부터 두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왔고 이들이 자신의 남편을 살해해줄 것으로 믿고 탈옥을 적극 도운 것으로 알려졌다. 한 소식통은 “특히 맷이 미첼을 적극 유혹했다. 미첼 역시 자신이 그를 사랑한다고 여겼다”고 전했다. 구치소에 수감 중인 미첼 씨는 이날 수갑을 찬 채 법정에 잠시 출두했으나 쏟아지는 취재진들의 질문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유죄가 확정되면 그는 최고 8년형을 선고 받는다. 앞서 맷은 1997년 옛 직장 상사를 납치, 살해한 뒤 시신을 토막 낸 혐의로 징역 25년형을 선고받았고 스웨트는 2002년 뉴욕 주 브룸 카운티 부보안관을 숨지게 한 혐의로 종신형에 처해졌다. 두 탈옥수는 6일 새벽 감방 뒤쪽 벽에 구멍을 뚫고 높이 9m가 넘는 벽체 내부를 기어 내려가 교도소 인근의 맨홀로 빠져나갔다. 클린턴 교도소는 미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철통 경비 체제를 갖춘 곳이어서 미 언론은 이들의 탈옥을 ‘현대판 쇼생크 탈출’로 부르고 있다. 당초 수색 인력 500명을 동원했던 미 경찰은 인력을 300명 더 늘려 교도소 주변을 샅샅이 뒤지고 있지만 탈옥수들을 찾지 못했다.하정민기자 dew@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