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정민

하정민 기자

동아일보 국제부

구독 5

추천

안녕하세요. 하정민 기자입니다.

dew@donga.com

취재분야

2024-04-16~2024-05-16
칼럼42%
국제일반23%
국제정치10%
미국/북미7%
국제경제3%
국제인물3%
문학/출판3%
중동3%
사설/칼럼3%
기타3%
  • NYT “저스틴 비버 팬보다 케이팝 팬이 더 열정적”

    “미국 최고의 아이돌 스타인 가수 저스틴 비버의 팬보다 한류 팬들이 더 열정적이다.” 미 유력 일간지 뉴욕타임스(NYT)는 8일 뉴저지 주 뉴어크의 프루덴셜센터에서 열린 한류 콘서트 ‘KCON’ 현장의 열기를 이렇게 전했다. 2012년부터 CJ그룹이 주관하는 KCON은 ‘외국 팬들이 한류 스타와 직접 만나 음악, 드라마, 음식, 미용 등 한국의 모든 것을 경험하고 느끼도록 만들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북미 최대 규모의 한류 컨벤션이다. 지난해까지는 미 서부 캘리포니아 주의 로스앤젤레스, 어바인 등에서만 열렸으나 올해부터 미 동부와 일본으로 개최 장소를 확대했다. 이날 프루덴셜센터를 가득 메운 약 1만7000명의 관객은 소녀시대, 틴탑, 빅스(VIXX), AOA 등 한국 가수들이 뿜어내는 춤과 노래의 열기에 무더위마저 잊은 듯했다고 NYT는 전했다. 뉴욕 주 롱아일랜드에서 온 21세의 백인 여성 미카엘라 맥도널드 씨는 2일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KCON에도 참석한 열렬한 한류 팬이다. 그는 다른 젊은 여성 팬들과 마찬가지로 6인조 남성 아이돌 그룹인 틴탑의 무대에 열광했다. 일부 여성 팬은 틴탑 멤버들이 ‘안녕’이라며 손을 흔들자 감격에 겨워 눈물을 펑펑 쏟았다. NYT는 “KCON 참석자의 70% 이상이 비(非)아시아계”라며 “18∼24세의 젊은 여성이 대부분으로 미국 내에서 가장 강력한 한류 팬덤을 형성하고 있는 집단”이라고 보도했다. 미국 내 한류 팬덤의 주류가 젊은 여성인 것은 한류 열기를 화장품, 의류 등 관련 사업으로 확장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된다고 NYT는 분석했다. 한류 팬들은 한국 인기 그룹의 화장이나 의상을 그대로 따라 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CJ 측은 올해 미국과 일본의 KCON 행사장을 찾은 방문객이 총 8만7000명이며 경제적 파급 효과는 5500억 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하정민 기자 dew@donga.com}

    • 2015-08-12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막말’ 대통령 당선땐 ‘기업 사냥꾼’ 재무장관?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 주자 중 지지율 1위를 달리는 도널드 트럼프가 대선에서 승리하면 월가의 유명한 ‘기업 사냥꾼’ 칼 아이컨 아이컨엔터프라이즈 회장(79·사진)이 재무장관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뉴욕타임스가 8일 보도했다. 2006년 KT&G에 투자해 한국에서도 유명한 아이컨은 7일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6일 공화당 대선 주자들의 TV토론회를 본 후 트럼프의 재무장관직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트럼프는 6월 대선 출마를 처음 선언했을 때부터 그에게 재무장관직을 맡기겠다고 공언해왔다. 아이컨은 “미국의 정치와 경제 지도자들을 뽑는 방식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두 분야에서 모두 신선한 공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며 제안을 수락하겠다고 말했다. 1960년대부터 월가에서 활동한 아이컨은 부실 기업의 경영권을 인수해 해당 기업을 분해한 뒤 비싼 가격에 되파는 ‘기업 사냥꾼’으로 이름을 떨쳤다.하정민 기자 dew@donga.com}

    • 2015-08-10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글로벌이슈]“돈에는 국적 없다”… 월가 인재들 속속 합류

    한국 대기업의 합병과 후계 분쟁으로 ‘벌처펀드(vulture fund)’에 대한 관심이 부쩍 커지고 있다. 죽은 동물을 먹이로 삼는 대머리독수리를 뜻하는 ‘벌처’라는 말에서 나온 이 펀드는 이미 삼성물산과 엘리엇매니지먼트의 주주총회 대결로 한국에서 한껏 주목받았다. 게다가 롯데그룹의 후계 분쟁으로 대기업 지배구조 문제가 또 불거지면서 한국이 벌처펀드의 먹잇감이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벌처펀드는 원래 빈곤국 국공채나 부실기업 채권 등 망하기 직전의 고위험 자산에 투자한 뒤 악착같이 자금을 회수하는 단기투자 전문 헤지펀드다. 그런데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 영국 벨기에 등 각국이 규제에 나서면서 벌처펀드도 빠르게 변신하고 있다. 최근에는 각국 대기업으로 투자처를 다변화하고 취약한 지배구조, 낮은 배당 등의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이를 통해 스스로를 ‘주주 행동주의(shareholder activism)의 전도사’로 부르며 대중을 상대로 정당성까지 얻어내려 한다. ‘피도 눈물도 없는 약탈자’란 이미지를 갖고 있는 벌처펀드의 세계를 해부해 본다.정크본드가 낳은 벌처펀드 벌처펀드는 1970년대 미국에서 생겨났다. 당시만 해도 부도 위험이 높은 투자부적격 채권(정크본드)은 월가 대형 금융사의 투자 대상이 아니었다. 이때 ‘정크본드의 창시자’로 불리는 미 억만장자 마이클 밀컨(69)이 등장했다. 1973년 드렉셀 버넘 램버트 증권에 입사한 그는 여러 개의 정크본드를 묶어 거래하면 일부가 부도나도 다른 채권에서 얻은 수익으로 손실을 메울 수 있다는 논리(유동화 전략)로 투자를 시작했다. 1986년 미 저축대부조합(S&L)의 파산으로 벌처 투자가 붐을 이뤘다. 한국의 상호신용금고와 비슷한 저축대부조합의 파산은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유사했다. 엄청난 양의 부실채권이 시장에 쏟아졌고 휴지조각으로 전락한 채권을 대량 매입한 몇몇 투자자가 위기가 끝난 후 이를 비싸게 되팔아 엄청난 돈을 벌었다. 칼 아이컨 아이컨엔터프라이즈 회장(79), 넬슨 펠츠 트라이언펀드매니지먼트 대표(73), T 분 피킨스 BP캐피털매니지먼트 대표(87) 등이 이때 출현했다. 이들은 지금도 월가를 쥐락펴락하는 유명한 기업사냥꾼이다. 1990년대 미국의 ‘신경제’ 호황으로 부실기업이 줄자 벌처펀드는 해외로 눈을 돌렸다. 중남미와 아프리카의 저개발국 채권을 헐값에 사들인 뒤 소송 등으로 해당 정부를 압박해 투자금의 수백 배까지 거둬들였다. 페루 파나마 콩고민주공화국 아르헨티나에 투자한 엘리엇매니지먼트를 비롯해 도니걸인터내셔널, FG헤미스피어, 테미스캐피털, 디모인인베스트먼트, 아우렐리우스캐피털, 다트매니지먼트 등이 대표 주자로 떠올랐다. 세계은행은 2000년대 이후 유명 벌처펀드가 빈곤국을 상대로 낸 소송 25건을 통해 최소 10억 달러(약 1조1700억 원)를 벌었다고 분석했다.소송과 로비에 능한 변호사가 설립 영국 가디언이 지목한 벌처펀드 업계의 3대 거물은 마이클 시핸 도니걸인터내셔널 이사, 피터 그로스먼 FG헤미스피어 공동 설립자, 폴 싱어 엘리엇매니지먼트 회장(71)이다. 미 탐사보도 전문기자 그레그 팰러스트 씨(63)의 각종 보도로 싱어의 개인정보가 만천하에 공개된 것과 달리 시핸과 그로스먼의 정보는 아직 베일에 가려져 있다. 팰러스트 씨의 집요한 추적으로 시핸과 그로스먼의 얼굴이 알려진 게 전부다. 60, 70대로 추정되는 이들의 정확한 나이, 현 거주지, 출신 국가, 가족관계 등이 모두 미스터리다. 지금까지 나온 이들의 일부 약력 중 공통점은 명문 로스쿨을 졸업한 변호사라는 것이다. 각국 정부를 상대로 채무지급 소송을 벌인 일개 민간펀드가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는 데는 금융공학에 정통한 상당수 헤지펀드 운영자보다 복잡한 법리와 각종 로비에 능통한 변호사가 더 유리하다는 관측이 나온다. 업계에서 ‘골드핑거’(007 영화에 나오는 백만장자 악당)로 불리는 시핸은 아프리카 최빈국 잠비아에서 재미를 봤다. 잠비아는 1979년 3000만 달러를 빌려 루마니아의 농기계 설비를 사들였다. 부패와 가뭄으로 19년이 흐른 1998년에도 단돈 1원도 갚지 못하자 루마니아는 할 수 없이 채무탕감 협상을 시작했다. 이때 시핸은 루마니아에 330만 달러를 주고 모든 권리를 승계받은 후 잠비아 자산을 동결했다. 때마침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이 잠비아 원조를 결정하자 시핸은 영국 법원에 소송을 내고 “액면가와 이자를 합해 4200만 달러를 물어 달라”고 잠비아 정부에 요구했다. 법리만 따진 영국 법원은 2007년 시핸의 손을 들어줬다. 소송만으로는 투자금의 10배 이상을 벌긴 어렵다. 시핸은 루마니아의 권리를 사면서 프레더릭 칠루바 당시 잠비아 대통령에게 뇌물을 주고 채무이행 약속을 받아냈다. 동시에 미국과 영국에서 로비를 벌여 채무 상환에 유리한 여론을 조성했다. 채권 매입부터 투자금 회수까지의 모든 과정이 치밀하게 계산된 행보였다. 아르헨티나 국채를 4800만 달러에 산 싱어는 해외에 정박 중인 아르헨티나 군함을 억류하고 아르헨티나군의 해외 창고까지 점거하며 악명을 떨쳤다. 이를 통해 투자금의 약 28배인 13억3000만 달러(약 1조5561억 원)를 챙겼다.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2013년 미국을 방문할 때 임대 비행기를 탔다. 전용기를 타고 갔다 압류당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벌처와 행동주의 투자자 사이 벌처펀드가 많은 돈을 벌수록 이들에 대한 비판과 함께 규제도 심해졌다. 경쟁자도 크게 늘었다. 이에 폴 싱어, 칼 아이컨, 넬슨 펠츠 등은 새로운 전략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바로 주주 행동주의다. 주주 행동주의란 주식 대량 매수를 통해 특정 기업의 주요 주주가 된 이후 지배구조, 사업전략, 자본구성 변화 등을 주도하며 수익을 내는 방식이다. 김예구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 연구위원은 “과거 펀드들이 기업의 회생능력 등에 대한 ‘예측’에 주력한 반면 지금 벌처펀드는 경영 개입으로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해 그 예측을 ‘실현’한다”고 설명했다. 헤지펀드는 성장률 등 거시변수를 예측하는 ‘글로벌 매크로’, 싼 주식을 사고 동시에 다른 비싼 주식을 공매도하는 ‘롱숏’, 주가에 미칠 영향이 큰 사건을 배후 조종하는 ‘이벤트 드리븐’ 전략 등을 주로 구사한다. 행동주의 투자자는 이 이벤트 드리븐 전략을 적극 활용하는 셈이다. 헤지펀드 전문가인 정삼영 서울과학종합대학원대 금융대학원장은 “엘리엇이 아르헨티나 등에서는 벌처 투자자였지만 삼성물산에서는 지배구조 개선, 소액 주주권 보호 등을 주장하는 전형적인 행동주의 투자자의 면모를 보였다”며 “‘먹튀’나 투기자본이라는 말로 몰아세울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아이컨도 마찬가지다. 과거에는 인수 기업을 낱낱이 분해한 후 되파는 것으로 악명을 떨쳤지만 금융위기 후 애플, 이베이 등 우량 대기업에 주로 투자하고 있다. 또 배당 확대, 자사주 매입, 적자사업 구조조정 등 장기 기업가치 향상을 위한 각종 전략을 제시하고 이를 소셜미디어 등으로 널리 알려 일반 주주의 호응을 얻었다. 그의 전략은 무배당 정책으로 유명한 콧대높은 애플에도 통했다. 애플은 올해 4월 “2017년 3월까지 총 2000억 달러를 주주들에게 환원하겠다”고 밝혔다. 막을 수 없는 성장세 요미우리신문 기자 출신인 일본 소설가 마야마 진(眞山仁)이 벌처펀드를 소재로 쓴 작품 ‘하게타카(ハゲタカ)’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돈에는 색깔이 없다. 중요한 건 결과를 내는 거다. 그렇게 하면 벌처의 먹잇감이 되는 대신 벌처를 이용해 승리자가 될 수 있다.” 벌처를 상대로 한 머니게임에서 승률을 높일 기업은 얼마나 될까. 전문가들은 상당 기간 벌처펀드들이 활황을 보일 것으로 예상한다. 우선 먹잇감이 넘쳐난다. 3일 부도를 선언한 미 자치령 푸에르토리코, 부도 위기에 직면한 우크라이나와 그리스 등은 벌처펀드들의 단골 투자 대상이다. 최근 뉴욕타임스(NYT)는 ‘헤지펀드의 제왕’으로 불리는 미 억만장자 존 폴슨(60)이 경영난에 처한 푸에르토리코의 고급 호텔, 카지노 등을 닥치는 대로 사들인다고 보도했다. 폴슨은 이미 지난해 푸에르토리코 정크본드 1억 달러어치를 매입했다. 벌처펀드가 금융시장의 약한 고리 곳곳을 헤집고 다니자 대형 금융사도 벌처펀드와 비슷한 전략을 활용하고 있다. 약 700억 달러의 부채가 있는 우크라이나는 벌처펀드 공격에 가장 취약한 나라로 꼽힌다. 미 자산운용사 프랭클린템플턴은 2010년부터 우크라이나 국채를 사들여 현재 89억 달러를 보유하고 있다. IMF가 이 나라에 추가 금융지원을 하면 템플턴이 엘리엇이나 도니걸과 비슷한 방식으로 투자금을 회수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월가 인재의 유입도 심상찮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의 최근 보도에 따르면 2011년부터 3년간 설립된 신규 헤지펀드 1428개 중 약 15%가 골드만 등 미 5대 투자은행에서 퇴사한 인력이 세운 것으로 드러났다. 한국은 안전할까. 이장혁 고려대 교수(경영학)는 “롯데와 삼성의 경영권 분쟁에서 보듯 순환출자와 족벌 세습 등 지배구조 관련 문제가 많은 한국 기업들은 싫든 좋든 주주 행동주의를 주창한 벌처펀드의 목표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정삼영 원장은 “냉혹한 월가 자본을 상대로 한 싸움에서 이들을 ‘악마’로 폄하하거나 국민 정서에 호소하는 식으로는 한계가 있다”며 “국가든 기업이든 살아남으려면 생존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지적했다. 애초에 벌처펀드에 공격의 빌미를 주지 않는 게 먼저라는 뜻이다. :: 벌처펀드 ::헤지펀드의 일종으로 부실증권(distress securities) 펀드로도 불린다. 헤지펀드가 주식 채권 외환 원자재 파생상품 부동산 등 서로 다른 다양한 분야에 투자해 각각의 투자위험을 ‘상쇄(hedge)’하는 것과 달리 벌처펀드는 부실증권 투자에 특화돼 있다. 하정민 기자 dew@donga.com}

    • 2015-08-08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백인이면 무조건 미국인?

    “캐나다인에게 미국인이라고 하는 건 한국인에게 일본인이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실례라고요.” 2008년부터 약 4년간 한국 대기업에서 근무한 후 현재 홍콩의 한 정보기술(IT) 기업에서 일하고 있는 캐나다 여성 A 씨(37). 그는 5일 통화에서 “한국에서 살 때 가장 불쾌했던 순간은 지레짐작으로 ‘백인은 곧 미국인’이라고 간주해 ‘당신 미국인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였다”고 말했다. “한국 택시를 타면 운전사의 첫마디가 늘 ‘어디서 왔냐. 미국인이냐’였어요. 분명한 한국어로 ‘아니요. 캐나다에서 왔어요’라고 답해도 ‘바로 옆 나라인데 그게 그거 아니냐’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죠. 그런 일이 되풀이되다 보니 한 번은 택시 운전사에게 ‘제가 아저씨한테 일본인이라고 하면 좋겠어요’라고 쏘아붙였어요. 그제야 ‘미안하다’고 하더군요.” A 씨는 “‘백인=미국인’으로 보는 시각이 기분 나쁜 것은 △강대국 출신 △백인 △남성 △영어 가능자를 우대하고 그렇지 않은 외국인을 차별하고 무시하는 분위기 때문”이라며 “한국에서는 외국인도 일종의 등급이 있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1등급은 영어를 하는 백인, 2등급은 영어를 못 하는 백인, 3등급은 영어는 하지만 백인이 아닌 외국인, 4등급은 영어도 못 하고 백인도 아닌 외국인이라는 주장이다. 홍콩에서 3년째 살고 있는 그는 “이곳에서는 영어를 쓰는 백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미국인으로 보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고 말했다. 한국에서는 백인이 아닌 미국인도 엉뚱한 대접을 받는다. 경기 수원시에서 원어민 영어교사로 일하는 카를로스 올리베라스 씨(35)는 푸에르토리코 이민 3세로 라틴계 미국인이다. 그는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고 줄곧 뉴욕에서 살았다. 하지만 히스패닉인 그의 겉모습을 보고 아랍인으로 여기는 한국인이 종종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경기 성남시 분당의 한 백화점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 중년 남성이 다가와 다짜고짜 ‘앗살람 알레이쿰’(‘신의 평화가 깃들기를’을 뜻하는 아랍어)이라고 하는 거예요. 미국인에게 아랍어 인사라니…. 최소한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물어본 후 말을 걸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얼마 전 편의점에 갔을 때 ‘카타르에서 왔냐. 그 나라는 많이 덥냐’는 사람도 있었죠.” 올해 초 한 지상파 프로그램에 출연한 서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 출신 숨 씨의 사연은 약소국 출신의 유색인종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민낯’을 보여준다. 한국 생활 11년째로 서울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일하는 그는 “지하철을 타면 좌석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냄새난다’며 코를 막고 일어난다. 또 이슬람 신자라고 밝혀도 ‘한국 생활에 적응하라’며 억지로 돼지고기가 들어간 김치찌개를 먹으라고 한다”고 말했다. 연세대 설립자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의 증손자인 피터 언더우드(한국명 원한석·60) IRC컨설팅 선임파트너는 “인종차별이 한국에만 있는 건 아니지만, 한국에서는 인종차별에 관한 표현이나 말투가 상당히 직설적이어서 많은 외국인이 난처해한다”며 “피부색이나 국적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바라보는 성숙한 시선을 기대한다”고 말했다.하정민 기자 dew@donga.com}

    • 2015-08-06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머니게임 된 美대선 巨富들이 좌지우지

    내년 미국 대선을 앞두고 슈퍼팩(Super PAC·특별정치활동위원회)을 통한 정치자금 모금이 사상 유례없이 소수 부자들에게 집중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뉴욕타임스는 “미국의 정치가 ‘도금시대(gilded age)’를 넘어 ‘플래티넘 시대(platinum age)’에 다가서고 있다”며 “2016년 대선은 유례없는 금권선거 논란에 시달릴 것으로 전망된다”고 2일 지적했다. 슈퍼팩은 특정 후보 지지자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외곽 지원 조직으로 대외적으로는 후보자나 정당과 분리돼 있다. 뉴욕타임스가 미국 연방선거관리위원회(FEC)의 자료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미국 공화당 유력 대선 예비주자인 젭 부시 전 플로리다 주지사는 올해 들어 6개월간 1억2000만 달러(약 1407억 원)의 정치자금을 모았는데, 이 중 슈퍼팩을 통한 모금액이 1억300만 달러로 86%에 달했다. 1억300만 달러 중 100만 달러 이상을 낸 고액 기부자는 24명이었다. 공화당 스콧 워커 위스콘신 주지사는 슈퍼팩을 통해 2000만 달러를 모았는데 이 중 1350만 달러는 단 4명의 억만장자와 월가 투자자가 낸 돈이었다. 다른 공화당 예비주자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마코 루비오 상원의원(플로리다)은 슈퍼팩 모금액 1600만 달러 중 1250만 달러는 4명이 모아줬고,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텍사스)은 3700만 달러의 대부분을 단 3명의 후원금으로 채웠다. 공화당 후보들이 6월 말까지 모금한 3억8800만 달러의 절반 이상은 130명의 부호와 그들의 기업이 낸 것이다. 민주당의 유력 대선주자인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은 슈퍼팩을 통해 1500만 달러를 모금했다. 이 중 절반이 넘는 900만 달러는 9명의 기부자가 100만 달러씩 낸 것으로 나타났다. 고액 기부자 순위에서 1위는 헤지펀드 르네상스 테크놀로지의 공동 최고경영자(CEO)인 로버트 머서로 공화당 대선 후보인 크루즈 상원의원, 보비 진덜 루이지애나 주지사, 칼리 피오리나 전 HP 최고경영자 등에게 1130만 달러를 후원했다. 정치인들의 슈퍼팩 의존이 커진 것은 개인이나 기관, 노조 등이 슈퍼팩을 통해 선거자금을 제한 없이 제공할 수 있다는 2010년 미국 대법원의 판결 이후다. 후보자와 독립적이어야 한다는 단서가 붙기는 했지만 이 판결은 정치인들에게 거액의 정치자금을 빠른 시간에 무제한으로 모금할 수 있는 길을 터 준 셈이다. 정치 광고비 수요가 커진 것도 원인이다. 특히 공화당은 내년 당내 경선 일정이 2, 3월에 집중되면서 초반 기세를 잡는 데 필요한 광고비가 더 많이 필요해졌다. 예년 같으면 경선이 시작되는 아이오와 주와 뉴햄프셔 주에서 쓸 광고비 정도만 모으면 됐지만 내년에는 경선 일정의 단축으로 많은 ‘실탄’이 한꺼번에 필요하다. 내년 3월 1일의 경우 텍사스를 포함한 11개 주에서 한꺼번에 공화당 경선이 치러질 정도다. 슈퍼팩은 공식 선거캠프의 핵심 역할인 유권자 조직 활동까지 벌이면서 영향력 확대를 꾀하고 있다. 클린턴 전 장관을 지원하는 슈퍼팩인 ‘코렉트 더 레코드’는 경쟁후보 진영에 대한 조사활동까지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허진석 jameshuh@donga.com·하정민 기자}

    • 2015-08-03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美 보이스카우트 105년만에 동성애 지도자 허용하기로

    미국 보이스카우트 연맹(BSA)이 105년 만에 최초로 동성애자가 성인 지도자를 맡는 것을 허용하기로 했다고 주요 언론이 27일 보도했다. BSA는 26일 조지아 주 애틀랜타에서 이사회를 열고 동성애자의 지도자 허용안을 찬성 45표, 반대 12표로 가결했다. 1910년 설립된 BSA는 현재 11∼18세의 청소년 회원 260만 명을 두고 있으며 약 100만 명의 성인 단장이 이들을 지도하고 있다. BSA는 이미 2013년 청소년 동성애자의 회원 가입을 허용했다. 그러나 동성애자 지도자를 허용하는 문제는 청소년 동성애자 허용보다 훨씬 큰 반발을 불러왔다. 현재 BSA 산하에는 약 10만5000개의 지역 지부가 있는데 이들의 70%가 보수 성향이 강한 종교단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신규 가입자 수가 정체를 보인 데다 올 6월 연방대법원이 동성결혼 합법 판결을 내리면서 BSA도 동성애자 지도자 허용을 외면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고 미 언론은 전했다. 2014년 5월 BSA 회장에 취임한 로버트 게이츠 전 국방장관(72)은 이사회 직후 “동성애자 지도자 허용 문제가 BSA를 너무 오랫동안 분열시켰다”며 “이제 모두 힘을 모아 훌륭한 청소년을 길러내는 일에 힘쓸 때”라고 강조했다.하정민 기자 dew@donga.com}

    • 2015-07-29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리비아 법원, 카다피 차남에 사형 선고

    리비아 법원이 28일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 전 국가원수의 차남 사이프 알이슬람(43·사진)에게 사형을 선고했다고 BBC 등 외신이 보도했다. 수도 트리폴리 법원은 이날 2011년 ‘아랍의 봄’ 사태로 리비아 전역에서 민중 봉기가 일어났을 때 대량 학살 등 잔혹한 전쟁 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기소된 사이프 알이슬람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알이슬람은 이날 선고 때 법정에 출석하지 않았다. 법원은 또 같은 혐의로 기소된 전 리비아 정보기관 수장 압둘라 세누시, 카다피 정권의 마지막 총리인 알바그다디 알마무디 등 다른 피고인 8명에게도 사형 판결을 내렸다. 이들은 2011년 리비아 곳곳에서 반정부 시위가 벌어지자 용병을 고용하거나 무장 민병대를 조직해 시위대를 유혈 진압한 혐의로 체포됐다. 카다피의 후계자로 유력하게 거론됐던 알이슬람은 2011년 11월 리비아 남부 사막 지대에서 반군에 붙잡혔다. 그는 교도소에 구금된 채 지난해 4월부터 국가안보 침해, 탈옥 기도, 국기 모독 등의 혐의로 재판을 받아 왔다. 국제형사재판소(ICC)는 전쟁범죄 혐의로 그에게 체포영장을 발부했고 리비아 정부에 인도를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카다피는 두 명의 부인에게서 총 7명의 아들을 얻었다. 이 중 3명은 2011년 사태 때 숨졌고 나머지는 체포됐거나 해외로 도피했다. 카다피는 2011년 도주 중 반군에 붙잡혀 살해됐다.하정민 기자 dew@donga.com}

    • 2015-07-29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FT 이어… 이코노미스트도 매각 협상

    경제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FT)를 일본 닛케이에 매각한 영국 교육미디어회사 피어슨이 유력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지분도 팔기로 했다고 25일 외신이 보도했다. 피어슨은 이날 성명을 내고 “보유한 이코노미스트 지분 50%를 전량 매각하는 방안을 이사회와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FT에 따르면 이코노미스트 지분 50% 가치는 최대 4억 파운드(약 7240억 원)에 달한다. 인수 유력 후보는 닛케이의 FT 인수에 깊숙이 관여한 유대계 영국 재벌 로스차일드 가, 이탈리아 자동차회사 피아트의 대주주인 아녤리 가, 영국 자산운용사 슈로더, 영국 제과회사 캐드버리 등이다. 1843년 창간한 이코노미스트는 미국의 비즈니스위크와 함께 세계 경제주간지 시장을 양분하며 세계 최고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연간 발행부수는 약 160만 부로 북미(54%), 유럽(19%), 영국(14%)에서 집중적으로 팔린다. 지난해 이코노미스트의 매출은 3억2800만 파운드(약 5937억 원), 영업이익은 6000만 파운드(약 1086억 원)였다. 올해 1월 사상 최초로 여성 편집국장 재니 민턴 베도스(48)를 배출해 화제를 모았다. 피어슨은 이코노미스트의 최대 주주지만 편집권 독립 보장을 위한 여러 장치들 때문에 사실상 경영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이코노미스트 이사회 멤버 13명 중 6명만 피어슨 관련 인물이며 지분 매각 시에도 이코노미스트 측의 승인을 얻어야 하는 등 지배구조가 복잡하다. 앞서 피어슨은 미국의 블룸버그와 톰슨로이터, 독일의 악셀 슈프링거 등 거대 미디어회사에 먼저 이코노미스트 인수를 제안했지만 복잡한 지배구조 때문에 실패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매각도 순탄하게 진행될지 의문을 제기하는 관측도 있다. 한편 FT를 인수한 기타 쓰네오 닛케이 회장(69)은 24일 일본 도쿄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수년간 FT에 관심을 가져왔으며 5주 전 인수 제안을 받고 수차례 영국 런던을 방문해 협상을 매듭지었다”고 밝혔다. 게이오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1971년 닛케이에 입사한 그는 2008년 회장이 됐으며 온라인 뉴스 유료화 등 닛케이의 디지털 사업을 진두지휘해 왔다. 그는 “FT의 브랜드 가치를 훼손하지 않아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을 느낀다”며 “편집권도 충분히 보장하겠다”고 말했다.하정민 기자 dew@donga.com}

    • 2015-07-27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애슐리 매디슨 회원 2명 신상 ‘본보기 공개’

    불륜을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는 세계 최대 이성교제 사이트 애슐리 매디슨이 해킹에 의한 회원정보 유출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고 미국 언론이 22일 보도했다. 21일 ‘임팩트 팀’이란 해커 집단이 애슐리 매디슨의 모기업 애비드 라이프 미디어를 해킹했다고 주장한 지 하루 만인 22일 회원 2명의 개인정보가 인터넷에 공개됐다. 미국인 1명과 캐나다인 1명인 이들의 이름, 주소, 우편번호, 이메일, 애슐리 매디슨 아이디 등이 완전히 노출됐다. 심지어 포옹, 키스, 천천히 하기, 역할극 등 이들의 성적 취향까지 담겼다. 미 언론은 해커들이 회원들의 개인정보를 실제 확보했음을 입증하고 회사 측을 협박하기 위해 ‘본보기 공개’를 감행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게시물 원본은 사라졌지만 이를 내려받은 게시물들은 전 세계 인터넷 커뮤니티에 퍼졌다. 해커들은 웹사이트 운영을 중단하지 않으면 더 많은 회원정보를 공개하겠다고 경고한 상태다. 한편 이날 캐나다 언론은 수도 오타와가 세계에서 애슐리 매디슨 가입 비율이 가장 높은 도시로 드러났다고 보도했다. 이번 해킹으로 89만 명인 오타와 시민 중 약 20%인 18만9810명이 이 사이트에 가입한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거주지 우편번호를 오타와 의회로 적은 가입자도 많아 권력과 불륜의 높은 상관관계를 입증했다고 덧붙였다. 노엘 비더먼 애비드 라이프 미디어 최고경영자(CEO)는 “오타와뿐 아니라 미국 워싱턴 등 각국 수도의 회원 가입 비율이 높다”며 “이들의 권력과 명성이 더 많은 불륜 기회를 가져온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이 사이트가 관심을 끌기 위해 가입자 통계 일부를 고의로 퍼뜨려 ‘노이즈 마케팅’을 벌인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하정민 기자 dew@donga.com}

    • 2015-07-24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애슐리 매디슨’ 회원 2명 정보 유출, 이름-주소-성적 취향까지…

    불륜을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세계 최대 이성교제 사이트인 애슐리 매디슨이 해킹에 의한 회원정보 유출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고 미 언론이 22일 보도했다. 21일 ‘임팩트 팀’이라는 해커 집단이 애슐리 매디슨의 모기업 애비드 라이프 미디어를 해킹했다고 주장한 지 하루 뒤인 22일 회원 2명의 개인정보가 인터넷에 공개됐다. 각각 미국인 1명과 캐나다인 1명인 이들의 이름, 주소, 우편번호, 이메일, 애슐리 매디슨 아이디 등이 완전히 노출됐다. 심지어 포옹, 키스, 천천히 하기, 역할극 등 이들의 성적 취향까지 담겼다. 미 언론은 해커들이 회원들의 개인 정보를 실제 확보했음을 입증하고 회사 측을 협박하기 위해 ‘본보기 공개’를 감행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게시물 원본은 곧 사라졌지만 이를 다운받은 게시물들이 전 세계 인터넷 커뮤니티에 퍼져 또 다른 문제를 낳고 있다. 한편 이날 캐나다 언론은 행정수도 오타와가 세계에서 애슐리 매디슨 가입 비율이 가장 높은 도시로 드러났다고 보도했다. 이번 해킹으로 89만 명인 오타와 시민 중 약 20%인 18만9810명이 이 사이트에 가입한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거주지 우편번호를 오타와 의회로 적은 가입자도 많아 권력과 불륜의 높은 상관관계를 입증했다고 덧붙였다. 노엘 비더만 애비드 라이프 미디어 최고경영자(CEO)는 “오타와 뿐 아니라 미국 워싱턴 등 각국 수도의 회원 가입 비율이 높다”며 “권력자들이 위험을 즐기는 속성을 지닌 데다 이들의 권력과 명성이 더 많은 불륜 기회를 가져오는 것도 사실”이라고 평가했다. 일각에서는 이 사이트가 세계의 관심을 끌기 위해 가입자 통계 일부를 퍼뜨리며 ‘노이즈 마케팅’을 벌이고 있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하정민 기자 dew@donga.com}

    • 2015-07-23
    • 좋아요
    • 코멘트
  • 한국에선 잊혀진 백제 왕족… 日서 1500년간 조상신 추모

    오사카에 있는 아스카베(飛鳥戶)신사에서는 매년 새해가 되면 막걸리 사과 대추 등을 놓고 술을 한 잔씩 따른 뒤 큰절을 올리는 한국식 제사가 치러진다. 그런데 이들이 모시는 조상신은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 백제 곤지왕이다. 한국에서 그의 무덤은 확인할 길도 없고 사당조차 없어서 이름조차 낯선 인물이지만 일본인들은 곤지왕을 모신 신사를 짓고 무려 1500여 년 동안 제사를 이어오고 있다. 이렇게 한국의 조상신을 지극정성으로 모시는 또 다른 신사가 있으니 교토 근교 시가 현 가모 군에 있는 ‘귀실(鬼室·기시쓰)신사’이다. 우리에겐 잊혀진 백제 조상들을 기리는 두 신사야말로 한일 간의 깊은 인연을 상징하는 장소라 할 수 있다.○ 아스카베신사 아스카베신사가 있는 아스카 촌은 일본에서 유명한 와인 생산지이다. ‘아스카 와인’은 일본 와인경연대회에서 여러 차례 우승할 정도로 인기가 높다. 신사는 주택가 한가운데 있었다. 지금은 웅장한 모습을 찾기 어렵지만 이 신사는 한때 일본 왕실에서 직접 제사를 지냈으며 서기 890년에는 제사 비용을 충당하라고 3000평가량의 밭을 하사했을 정도로 특별관리를 받았다. 그만큼 왜(倭) 왕실이 각별히 대우했다는 뜻이 될 것이다. 신사를 설명하는 안내판에는 신사에서 모시는 조상신이 백제 곤지왕임을 명확히 밝히고 있었다. ‘유라쿠 일왕 시대에 도래한 백제계 아스카베노미야쓰코(飛鳥戶造) 일족의 조상신인 비조대신(飛鳥大神·백제의 곤지왕)에게 제를 드리는 신사’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아스카베노미야쓰코’는 왜에 뿌리를 내린 곤지왕 후손들의 씨족 이름이다. 문자 그대로 ‘아스카의 문을 만들었다’는 뜻이니 일본 고대국가 형성기에 곤지왕과 후손들의 역할이 매우 컸음을 짐작하게 한다. 곤지왕은 왜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무슨 일을 했을까. 잠시 5세기 무렵 백제로 가보자. 5세기 중반 정변을 통해 집권한 개로왕은 귀족 세력에 대한 대규모 숙청을 단행해 왕족 중심의 친위체제를 구축한다. 여기에 고구려의 남진정책으로 안보위협까지 받고 있던 상황이었다. ‘살아있는 백제사’의 저자 이도학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는 책에서 “곤지왕은 본래 왜에 군사를 청하는 청병사 자격으로 파견됐지만 당시만 해도 이미 왜에 경제적 기반을 갖춘 백제 귀족들이 있어서 이들을 관리하는 한편 왕권 강화 차원에서 왜와의 교역 독점 창구 역할도 했을 것”이라고 적고 있다. 461년 왜로 건너간 곤지왕은 한성이 함락(475년)될 때에도 귀국하지 않고 있다가 477년에야 백제로 돌아간다. 귀국 후 왕실 출납을 담당하는 내신좌평에 임용됐으나 4개월 만에 숨을 거두고 만다. 그를 조상신으로 모신 아스카베신사가 있는 아스카 일대는 곤지왕이 왜에 있을 때 머물던 곳으로 고대 사료를 분석한 한 통계조사에 따르면 이 일대 주민의 36%가 한국계였고 그중에서도 백제계가 64%나 되었다고 한다. 이곳 주민들은 한때 없어졌던 신사를 다시 만든 주역이다. 1908년 메이지 정부는 신사 통폐합을 한다며 이 신사를 다른 신사와 합쳐 버렸다. 주민들은 전쟁이 끝나고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던 1950년대 신사부활운동을 시작한다. 마침내 1952년 신사의 문을 다시 열게 되자 정부로부터 일체의 재정적 지원을 받지 않고 주민 헌금으로만 운영하기로 결정한다. 신사 관리도 순번을 정해 돌아가며 맡고 있었다. 운영 총괄책임을 맡고 있는 6인회의 멤버 중 한 명인 나카무라 요지(仲村要司·69) 씨는 기자에게 “내 부친은 내 이름을 신사부활운동을 주도했던 사람(일본인)의 이름을 그대로 따 지을 정도로 곤지왕에게 매료되어 있었다. 나 역시 곤지왕을 생각할수록 1500여 년 세월로 맺어진 한일 인연의 신비함을 느끼게 된다”며 “매년 10월 17, 18일 이곳 신사에서는 곤지왕을 추모하는 마쓰리(축제)를 열고 있는데 소식을 듣고 찾아온 한국인들이 ‘우리도 잊고 있던 백제 왕자를 이렇게 정성스럽게 모셔주고 있다니 정말 고맙다’고 눈물을 흘리며 말할 때 큰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귀실신사 교토에 있는 귀실신사도 마찬가지였다. 신사는 시내에서 차로 1시간 반 정도 떨어진 시가 현 가모 군에 있는 작은 마을 히노(日野) 정에 있다. 단청 무늬가 있는 팔각 기와지붕의 귀실신사 입구는 한눈에도 한국 정자(亭子)와 유사했다. 일본 신사의 지붕은 보통 나무껍질로 덮여 있다. 귀실신사 앞 안내판에는 ‘백제 도래인 귀실집사(鬼室集斯)를 모시는 신사’라는 설명이 일본어와 한국어로 적혀 있었다. 귀실집사의 묘 앞에는 ‘귀실집사지묘(鬼室集斯之墓)’라는 비석까지 서 있었다. 귀실집사의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일본서기는 귀실집사가 백제가 백강전투에서 패하기 1년 전인 662년 백제유민 700명을 데리고 이곳에 정착한 뒤 26년 동안 살다가 688년 세상을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왜왕 덴지(天智·재위 661∼671년)는 그에게 소금하(小錦下)라는 벼슬을 주었고 그와 함께 온 유민들을 이곳에 살게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때 정착한 백제 망명자는 모두 1000명을 넘어선 것으로 추정된다. 신사 뒤 스즈카 산맥 류오산 아래에는 아직도 후손들이 촌락을 이루고 살면서 신사를 관리한다고 한다. 귀실집사는 학식이 뛰어나 671년에는 교육부 장관 격인 ‘학식두(學識頭)’에까지 임명된다. 그의 부친은 백제 무왕의 조카이자 의자왕의 사촌 부여복신으로 알려져 있는데 부여복신은 나당연합군과의 전투에서 세운 공이 커 귀신을 놀라게 했을 정도라고 해서 ‘귀실’이라는 성을 받았다고 한다. 귀실신사도 아스카베신사처럼 일본인들의 헌신적인 봉사로 운영되고 있었다. 아스카베신사처럼 신관을 따로 두지 않고 주민들이 직접 신앙 의례까지 주관하고 있었으며 관리비는 주민들이 매달 내는 1500엔(약 1만3500원)의 회비로 운영되고 있었다. 중앙정부나 지자체의 지원은 일절 받지 않고 있었다. 마을에서 태어나 평생 살고 있다는 사이토 기요지(齊藤淸治·74) 씨는 2013년 임기 4년의 주민 대표가 됐다. “직접적인 조상도 아닌데 기리는 이유가 무엇이냐”라고 물었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일본에는 수많은 신사들이 있다. 하지만 신사 내 묘비에 특정인의 이름, 사망 연도, 생전 직책 등이 다 표시된 곳은 거의 없다. 귀실집사가 어느 나라 사람이냐는 것과는 관계없이 그런 기록이 남아 있는 것 자체가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1316년이나 되는 긴 역사를 가진 신사가 있는 곳에서 태어나 이렇게 신사를 위해 일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로 자부심을 느낀다.” 기자를 더 놀라게 만든 것이 있었으니 주민들의 철저하고 꼼꼼한 자료 정리 및 문서 보관이었다. 사이토 씨는 1940년에 처음 만들어 지금까지 내려오는 방명록 20권을 기자에게 보여줬다. 무려 75년간 매년 신사를 찾은 7만5000여 명의 이름과 소감이 기록되어 있었다. 유명 소설가 시바 료타로의 필체도 보였다. 주민들은 귀실집사의 부친 귀실복신을 추모하는 은산별신제를 주관하고 있는 충남 부여군 은산면과도 활발한 교류를 갖고 있었다. 은산별신제의 유래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660년 백제 멸망 직후 은산 지역에 원인 모를 괴질이 퍼져 사람들이 죽어나가자 이상하게 생각한 주민들이 점을 쳐 보았더니 백제 멸망 때 죽은 병사들의 원혼이 떠돌기 때문이라는 답이 나온 것. 마을 사람들이 백제군들의 유골을 수습하고 씻김굿을 지내주자 괴질이 사라졌다고 한다. 이후 은산 주민들은 백제군의 원혼을 달래고 마을 사람들의 무병장수와 풍요를 비는 별신제(국가 중요무형문화재 9호)를 매년 2월 지내고 있다. 주민 우에다 요시카즈 씨(65)는 “귀실신사는 한일교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곳”이라며 “백제 유민들이 일본 수도와 가까운 곳에 집단 군락을 이루고 살았으며 이들의 정착을 왜왕이 직접 주선하고 고위 관직에 임명했다는 점만 봐도 당시 한국과 일본이 얼마나 가까웠는지를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곤지왕 :: 이번 시리즈 6회 ‘왜(倭)에서 태어난 무령왕’ 편에서 언급됐던 인물. 백제 개로왕의 동생으로 무령왕을 임신하고 있었던 형수와 함께 왜에 가던 중 형수가 가카라시마에서 무령왕을 낳자 모자(母子)만 돌려보낸 뒤 자신은 왜에 남는다. 아스카=권재현 confetti@donga.com / 히노 정=하정민 기자※19회 ‘백제의 테크노크라트들’로 이어집니다.}

    • 2015-07-22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휴대전화 실적부진 MS, 직원 7800명 해고

    세계 최대 소프트웨어업체 마이크로소프트(MS)가 전 직원 12만 명의 6.5%인 7800명을 해고하기로 했다고 블룸버그 등 주요 외신이 8일 보도했다. MS는 2013년 9월 노키아의 휴대전화 부문을 인수했으나 이후 적자를 면치 못하자 대규모 해고를 결정했다. MS는 이날 발표한 성명을 통해 올해 휴대전화 사업에서 76억 달러(약 8조5880억 원)의 손실이 예상된다고 밝혔다. 이번 구조조정에 필요한 비용은 7억5000만~8억5000만 달러로 추산했다. 지난해 취임한 스티아 나델라 MS 최고경영자(CEO)는 휴대전화 사업 부문을 계속 축소하고 모바일 및 소프트웨어 회사를 인수하는데 힘쓰고 있다. 그는 이날 “휴대전화 사업을 키우는 대신 윈도 생태계를 만들어 발전시키려는 전략으로 이동할 것”이라고 말했다.하정민기자 dew@donga.com}

    • 2015-07-09
    • 좋아요
    • 코멘트
  • 그리스 은행, 7일부터 현금고갈 위기

    지난달 29일부터 이달 6일까지 은행 영업중단 및 주식시장 폐쇄를 단행했던 그리스가 7일 자본통제를 풀자마자 금융권의 현금 고갈 사태를 맞이할지도 모른다고 영국 BBC 등 주요 외신이 보도했다. 블룸버그가 그리스 중앙은행 자료를 인용해 보도한 바에 따르면 올해 1월 말 1299억 유로에 달했던 그리스 은행예금은 5월 말 300억 유로로 대폭 줄었다. 6월 말 수치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으나 루카 카첼리 그리스 은행연합회장은 3일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현재 그리스 은행권의 자금 여력이 고작 10억 유로”라고 밝힌 바 있다. 이는 그리스 국민 1100만 명에게 돌아갈 현금이 1인당 약 90유로(약 11만2050원)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공은 이제 유럽중앙은행(ECB)으로 넘어갔다. ECB는 그리스 금융위기가 가시화한 후 그리스 금융권에 890억 유로의 긴급유동성 지원(ELA)을 해왔다. 기존 한도 890억 유로는 사실상 소진된 상태이며 그리스 정부는 그간 ELA 한도 증액을 요구해왔다. ECB는 6일 회의를 열고 한도 증액 여부를 논의했다. 하지만 국제 채권단과 그리스 정부 간 구제금융 협상이 재개되지 않은 상황에서 ECB가 그리스 금융권에 섣불리 많은 돈을 지원하긴 어렵다고 로이터 등이 전망했다. 이에 따라 그리스의 유동성 위기와 국민들의 고통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그리스 정부가 국민투표 전 장담했던 것과 달리 7일 은행 문을 다시 열 수 있을지도 불투명하다고 예상하고 있다. 마르틴 슐츠 유럽의회 의장은 “신규 자금 지원이 없으면 임금 지급, 보건 및 전력 시스템 유지, 대중교통 운행 등이 모두 중단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BBC도 그리스 기업들이 7일부터 대규모 감원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고 덧붙였다. 그리스 정부가 현금 고갈을 막기 위해 ‘은행예금 삭감(헤어컷)’이란 극단적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FT는 이미 8000유로(약 996만 원)가 넘는 예금의 30%가 삭감될 가능성을 제기했다.하정민 기자 dew@donga.com}

    • 2015-07-07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터키 극우단체 시위대에 한국인 관광객 공격 당해

    위구르족 무슬림에 대한 중국의 탄압에 항의하는 터키 민족주의자 시위대가 4일 이스탄불에서 한국인 관광객을 중국인으로 오인해 공격했다고 일간지 휘리예트 등 현지 언론이 이날 보도했다. 위구르족은 터키인과 같은 튀르크계 민족으로 종교(이슬람교)가 같고 언어도 비슷하다. 터키 극우단체 ‘윌퀴 오자클라르’(터키어로 회색 늑대라는 뜻)의 회원이 대부분인 시위대는 이날 이스탄불 중심지 술탄아흐메트 광장에서 톱카프 궁전을 향해 행진하던 중 돌연 궁전 바깥에 있던 한국인들을 공격했다. 톱카프 궁전은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통치자 술탄의 처소로 매일 수천 명의 관광객이 찾는다. 한국인 관광객들은 시위대 해산을 위해 주변에 있던 전투경찰에 의해 구조됐다.하정민 기자 dew@donga.com}

    • 2015-07-06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사우디 왕자, 36조원 전재산 기부… ‘아랍의 게이츠’로

    사우디아라비아의 최고 부자 알 왈리드 빈 탈랄 왕자(60)가 전 재산 320억 달러(약 36조 원)를 기부한다고 영국 BBC 등이 1일 보도했다. 왈리드 왕자는 이날 사우디 수도 리야드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2003년 설립한 자선단체 ‘알 왈리드 자선사업’에 전 재산 320억 달러를 내놓겠다”고 밝혔다. 이 돈은 사우디의 여성 인권 향상, 재난 구호, 질병 퇴치 등에 쓰일 예정이다. 그는 이미 이 자선단체에 35억 달러를 기부했다. 왈리드 왕자는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주의 자선활동에 영감을 받아 전 재산 기부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게이츠는 2000년 자신과 부인 이름을 따서 만든 ‘빌 앤드 멀린다 게이츠 재단’에 지난해 말까지 423억 달러(약 47조3760억 원)를 내놨다. 왈리드 왕자는 “자선은 30년 전부터 해온 개인적 의무이자 이슬람 신앙의 본질”이라며 “평화롭고 평등하며 지속가능한 세계를 만드는 일에 헌신할 수 있어 기쁘고 자랑스럽다”고 밝혔다. 게이츠 창업주는 이 소식을 듣고 “왈리드 왕자의 결정은 우리 모두에게 자극이 될 것”이라며 기뻐했다고 BBC는 전했다. 왈리드 왕자는 왕족의 특혜를 누리는 대신에 자신의 힘으로 사업을 일군 것으로 유명하다. 1955년 사우디 2대 도시 지다에서 태어난 그는 압둘아지즈 사우디 초대 국왕의 손자이자 현 살만 국왕의 조카다. 그의 아버지인 탈랄 왕자는 살만 국왕의 이복형이다. 친할머니가 아르메니아인, 어머니가 레바논인인 탓에 일찌감치 왕위 계승과 멀어진 왈리드 왕자는 사업가의 길을 택했다. 미국 유학길에 올라 먼로대(경영학 학사)와 시러큐스대(사회과학 석사)를 졸업한 그는 25세인 1980년 사우디로 돌아와 아버지에게 빌린 단돈 3만 달러로 건설회사 킹덤홀딩스를 차렸다. 이후 씨티은행, 뉴스코프, 타임워너, 애플, 아마존, 디즈니 등 세계적 기업에 투자해 큰돈을 벌었다. 현재 리야드에 살고 있는 그는 미국에서 오래 생활한 덕분에 보수적인 사우디 왕가의 일원답지 않게 진보적이고 솔직한 언행으로 유명하다. 운전 금지 등 사우디 여성이 받는 각종 차별을 철폐하라고 요구하는가 하면 석유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사우디의 허약한 경제 체제도 곧잘 질타한다. 3번 결혼했지만 모두 이혼한 사생활도 언론의 단골 소재다. 사우디 왕실 일각에서는 그를 지나친 친미(親美) 성향의 개혁주의자로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한국과의 인연도 깊다.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했고 1997년 외환위기 당시 현대자동차와 대우에 각각 1억 달러, 5000만 달러를 투자했다 2001년 투자금을 회수했다. 올해 3월에는 중동 4개국을 순방한 박근혜 대통령과 리야드에서 만나 한국 투자를 늘리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전 재산 기부 발표로 왈리드 왕자의 정확한 재산 규모에 대한 논란도 커질 것으로 보인다. 미 경제주간지 포브스가 올해 4월 발표한 세계 억만장자 순위에 따르면 그의 재산은 226억 달러로 세계 34위 부자다. 하지만 그가 기부하겠다고 밝힌 액수는 포브스 추정 재산보다 94억 달러 더 많은 320억 달러다. 왈리드 왕자는 포브스가 2년 전 그의 재산을 200억 달러(당시 세계 26위)로 추산하자 자신의 재산을 과소평가했다며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다 합의 후 취하하기도 했다. 하정민 기자 dew@donga.com}

    • 2015-07-03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EU 벗어나면 재앙” vs “더 나빠질 것도 없다”

    국제통화기금(IMF)에 진 빚을 갚지 못해 디폴트(채무 불이행)를 맞은 그리스에서 유럽연합(EU)의 구제금융안에 대한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5일)를 앞두고 심한 국론 분열이 일어나고 있다. 은행 문을 닫는 자본통제 조치가 국민투표 다음 날인 6일까지 계속될 예정이어서 서민들이 돈을 찾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다. 그리스 정부가 1일 현금카드나 신용카드가 없어 현금자동입출금기(ATM)를 이용할 수 없는 연금생활자들을 대상으로 은행 문을 열자 큰 혼란이 빚어졌다. 전국 1000여 개 은행 지점이 한시적으로 문을 열었으나 많은 인파가 몰리면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새벽부터 주요 은행 앞에는 백발이 성성한 연금생활자들이 장사진을 쳤다. 일부는 돈을 찾을 수 없을 것이란 불안감에 눈물까지 흘렸다. 운 좋게 은행 안으로 들어간 사람들도 1인당 한도인 60유로(약 7만5000원)밖에 찾지 못했다. 연금생활자인 알렉산드로스 씨는 “지난달 연금도 절반만 계좌에 들어왔는데 60유로만 주면 어떻게 살라는 거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은 사람이 늘면서 이 중 일부는 쓰레기를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상태로 내몰렸다. 건설업계에서 일하다 최근 실직한 아테네 시민 니코스 폴로노스 씨(55)는 요즘 하루 8시간씩 시내 쓰레기통을 뒤진다. 1kg에 0.5유로인 구리선과 70개에 1.5유로인 알루미늄 캔을 주워 하루에 5∼10유로(약 6200∼1만2500원)를 벌어 근근이 생활하는 그는 영국 텔레그래프와의 인터뷰에서 “쓰레기통에서 상태가 좋은 음식을 발견하면 바로 먹는다”고 털어놨다. 한편 지난달 29일부터 이달 1일까지 그리스 전역에서 구제금융안을 지지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들이 세(勢) 대결을 벌였다고 뉴욕타임스(NYT) 등 주요 외신이 보도했다. 지난달 30일 아테네 신타그마 광장에는 구제금융안 지지자 2만 명이 모였다. 소나기와 번개가 몰아치는 궂은 날씨에도 집회를 강행한 이들은 EU에 남아있기를 원한다는 의미에서 이마에 유로화를 붙이고 가슴엔 그리스어로 ‘예’를 의미하는 ‘NAI’ 스티커를 붙인 채 그리스 국기와 EU기를 함께 흔들었다. 은행원 알렉스 알기로스 씨는 “국민투표 결과 그리스의 EU 탈퇴(그렉시트)가 결정된다면 그리스를 떠나겠다”고 말했다. 유로화 체제를 벗어나 드라크마화 시대로 돌아가면 그리스인의 고통이 더 커질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상당수 참가자는 그리스가 디폴트에 빠진 것이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와 야니스 바루파키스 재무장관 때문이라며 둘의 퇴진을 요구했다. 한 남성은 “치프라스 총리와 바루파키스 장관은 적절한 대책도 없이 무조건 EU 탈퇴만 외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남성도 “EU를 벗어난 그리스가 (전 세계에서 고립된) 북한처럼 보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며 “이것이야말로 재앙”이라고 말했다. 신타그마 광장에서는 3일에도 채권단 협상안에 찬성하는 집회가 열릴 예정이다. 지난달 29일에는 아테네와 테살로니키 등에서 약 1만7000명이 구제금융안 반대 집회를 벌였다. 이 집회에는 각각 그리스어, 영어, 독일어로 부정을 의미하는 ‘OXI’ ‘NO’ ‘NEIN’ 깃발이 나부꼈다. 특히 대다수 참가자는 독일어 ‘NEIN’ 깃발을 흔들었다. 긴축정책을 주도한 그리스의 최대 채권국 독일에 깊은 반감을 표시한 것으로 풀이된다. 아테네에서 생선 가게를 하는 파리스 클로니스 씨는 “아테네는 세계 최초의 민주주의 도시지만 정작 아테네 시민들은 노예처럼 살고 있다”며 그렉시트를 지지할 뜻을 밝혔다. 변호사라고 밝힌 또 다른 남성도 “EU 구제금융안에 서명하는 것은 독일의 식민지가 되겠다는 뜻 아니냐”고 불만을 드러냈다. 텔레그래프는 변호사 금융인 회계사 등 안정적 직업을 가진 중장년층 그리스인들이 구제금융안 찬성 집회에 몰린 반면에 예술가 자영업자 젊은층은 반대 집회에 몰렸다고 전했다. 이어 “5일 국민투표의 진짜 의미는 EU 탈퇴에 대한 찬반 여부가 아니라 채권단이 제시할 추가 긴축안을 받아들일 용의와 여력이 있는 부유층과 이를 견딜 수 없다는 젊은층의 대립”이라며 국민투표에서 세대, 계급 갈등이 뚜렷하게 나타날 것으로 내다봤다. 하정민 dew@donga.com·전주영 기자}

    • 2015-07-02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432억원… 클림트 ‘뢰베의 초상화’ 소더비 경매 낙찰

    20세기 회화 거장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의 초상화가 24일 영국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2480만 파운드(약 432억 원)에 낙찰됐다고 가디언 등 주요 외신이 보도했다. ‘게르트루트 뢰베의 초상화’(사진)라는 제목이 붙은 이 그림은 클림트가 1902년 자신의 주치의 딸이었던 19세 소녀 뢰베를 그린 작품이다. 뢰베는 훗날 헝가리 재벌 엘레메르 바루흐 펠소바니와 결혼했다. 펠소바니의 후손들과 클림트 재단은 이 그림의 소유권을 두고 약 20년간 소유권 분쟁을 벌여왔으나 최근 이를 경매에 내놓기로 합의했다. 양측의 구체적 합의 내용과 매수자의 신원은 알려지지 않았다. 이번 낙찰가는 예상가격 1200만∼1800만 파운드를 훨씬 웃돌며 클림트의 초상화 중 두 번째로 비싸다. 최고가 작품은 2006년 미 화장품업체 에스티 로더의 창업자 후손인 로널드 로더가 사들인 1907년 작 ‘아델레 블로흐바워의 초상’으로 1억3500만 달러(약 1499억 원)였다. 이날 클림트의 초상화 외에도 러시아 화가 카지미르 말레비치, 프랑스 인상파 화가 에두아르 마네 등의 작품이 대거 출품됐다. 이에 이날 하루 판매금액이 런던 경매 역사상 두 번째로 높은 1억7860만 파운드(약 3059억 원)를 기록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하정민 기자 dew@donga.com}

    • 2015-06-26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헤이안시대’ 연 간무王, 왕비부터 재상까지 백제계로

    간무왕은 중국 당나라와 맞먹는 섬세하고 세련된 문화 예술을 꽃피운 헤이안(교토의 옛 이름) 시대(794∼1185년)를 연 사람이다. 794년 수도를 나라에서 교토로 옮겨 1868년 메이지왕이 수도를 지금의 도쿄로 옮기기 전까지 1000년 이상 이어진 ‘교토 수도 시대’를 시작한 주인공이다. 현대 일본인들은 그를 ‘교토의 신(神)’이라 부른다. 일본의 대표적인 수도인 교토와 도쿄로 천도한 왕은 간무왕과 메이지왕이다. 그래서 교토 사람들은 간무왕을 신으로 모시는 헤이안 신궁을 교토에 세웠고 도쿄 사람들은 메이지왕을 신으로 모시는 메이지 신궁을 도쿄에 세웠다. ○ 효자 중의 효자 간무왕 간무왕의 아버지이자 백제 여인 고야신립(?∼790년)의 남편인 고닌왕(709∼782년)은 일본의 49대 왕으로 61세 환갑의 나이에 왕위에 등극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고닌왕은 나당연합군과 싸우는 백제군을 위해 왜병을 대거 보내 백강(지금의 금강하구) 전투를 함께 치른 38대 덴지(天智·626∼672)왕의 직계 후손이다. 덴지왕 사후 왕권은 아들 고분왕에게 넘어가지만 작은 아버지 덴무의 쿠데타로 죽임을 당한다. 한국판 단종과 세조를 연상시키는 ‘진신(壬申)의 난’으로 왕권은 덴지왕의 동생 덴무(40대)로 옮겨간다. 덴무가(家)는 이후 48대까지 총 9명의 왕을 배출한다. 이런 상황에서 고닌은 왕위 계승을 기대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는 일찌감치 체념하고 전국을 떠돌며 방랑생활을 한다. 이때 만난 여인이 바로 고야신립이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고야신립은 처음엔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정실부인 자리에 앉지 못했다. 고닌 왕자의 부인은 45대 쇼무왕의 딸로 고닌왕과는 9촌 간이다. 일종의 근친혼이다. 두 사람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부인은 친정아버지가 왕이라는 것을 내세워 몰락한 왕가 후손인 고닌을 무시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770년 48대 쇼토쿠왕이 후계자 없이 별안간 숨지면서 왕위는 고닌에게 넘어간다. 61세라는 나이에 왕위에 오른 고닌 왕은 후계 구도에 고민이 컸다. 순리대로라면 정실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맏아들에게 물려줘야 했지만 고야신립과의 사이에서 얻은 야마베(山部·이후 간무왕)를 더 마음에 두고 있었다. 결국 그는 부인과 맏아들을 왕후와 태자 자리에서 폐위시킨 뒤 10년간 차근차근 야마베에게 후계자 교육을 하고 780년 왕위를 물려준다. ○ 왕비에서부터 각료까지 계로 간무왕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어머니 고야신립의 지위를 황태부인(皇太夫人)으로 추대해 아버지의 정식 부인으로 만들었다. 790년 어머니가 사망했을 때에는 정식 황태후(皇太后)로 받들고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고 유일한 존재라는 뜻의 ‘천고지일지자희존(天高知日之子姬尊)’이란 시호도 올린다. 간무왕의 왕비들 중에도 백제계 여인이 많았다. 이노우에 미쓰오 교토산업대 고대사연구소장은 “간무왕에게는 왕비가 무려 27명이 있는데 이 중 6∼7명이 백제여인이다. 일본 왕 중 이 정도로 많은 한반도 도래인 부인을 둔 사람은 간무왕 외에는 없었다”며 “그만큼 어머니의 나라인 백제를 사랑했다는 뜻”이라고 했다. 간무왕은 조정에서도 대놓고 백제인들을 중용하고 우대했다. ‘속일본기’에는 어머니의 조카를 재상으로 발탁하는데 백제계로서는 최초였다고 한다. 간무왕은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주변의 반대가 있자 “외척(外戚)이기 때문에 발탁한다”고 공개적으로 말했다고 한다. 오로지 외척이라는 이유로 백제인 관료의 직급을 두 단계나 올려 준 경우도 있다. 이와 관련해 김현구 전 고려대 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간무왕이 백제계를 중용했던 것은 당시 핵심 인재들이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간무왕은 어렵게 왕권을 되찾았다. 그가 의지할 것은 부모 양계였고 당시 관료계의 핵심을 이루던 백제계밖에는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백제계와 관계가 깊음을 강조하고 백제계를 우대한 것이다.” ○ 간무왕의 흔적들 교토에는 간무왕의 유적이 많다. 대표적인 곳이 왕궁으로 쓰이던 교토 고쇼(御所)와 간무왕을 신으로 모시는 헤이안 신궁 두 곳이다. 교토 고쇼는 보통 일본 궁내청에 예약을 해야 방문할 수 있지만 1년에 2번, 봄과 가을에 일주일씩 일반 방문객의 입장을 허용한다. 이곳을 찾은 4월 7일은 다행히 일반 개방 마지막 날이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이 건축물에서도 한반도 도래인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건물을 지을 때 간무왕의 명으로 신라인 건축가 이나베노(猪名部) 가문의 후예들과 백제인 건축가들이 동원됐다고 전해지는 것. 고대 일본은 큰 토목 및 건축 공사를 벌일 때마다 고구려, 신라, 백제 등지에 기술자들을 요청했고 일본과 친교를 맺고 싶어했던 한반도의 국가들도 기꺼이 기술자들을 파견해 줬으니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나베노 가문은 신라에서 선진 건축술을 갖고 일본으로 온 도래인들로 왕실 및 사찰 건축에 큰 영향을 줬다. 이나베노 모모요(猪名部百世)는 8세기 말 나라 지역 사찰 도다이(東大) 사의 비로자나대불과 대불전(大佛殿) 건립을 주도해 일본의 고위 관료직에도 올랐다. 도래인의 숨결이 묻어 있어서 그런지 교토 고쇼는 근엄하고 웅장하다기보다 경주의 안압지처럼 소박하고 절제된 신라 유적지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기와를 얹어 만든 흙담은 사람 키보다 조금 높은 정도여서 위압감을 주지 않았고 왕의 집무실이나 침소는 노송의 껍데기를 짜 얹어 강원도의 너와집을 떠올리게 했다. 돌아갈 수 없는 먼 길을 건너온 신라의 건축가들은 수도 경주와 닮은 분지에 자리 잡은 교토에 또 하나의 신라를 세우려고 애썼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간무왕의 교토 천도가 도래인의 힘을 강화하기 위한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고 왕궁과 부속 건물인 교토 고쇼를 짓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1000년을 이어 간 고도(古都) 교토의 첫 출발은 백제인의 핏줄, 신라인의 기술, 고구려인의 신앙이 모두 어우러진 합작품인 셈이다. 비록 후대에 복원됐지만 당시의 건축 양식을 그대로 본뜬 헤이안 신궁에선 헤이안 시대 초기 도래인들의 열정과 고뇌, 고국을 향한 향수(鄕愁)가 함께 느껴졌다. 이들은 이런 복잡한 감정을 섬세한 건축술로 승화시켰고 지금은 양국 간 우정의 상징이 돼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붙잡고 있다. :: 헤이안쿄(平安京) ::794년 간무왕이 수도로 삼을 당시 교토의 옛 이름. 이때부터 왕 중심의 중앙집권체제가 확립되는 헤이안 시대가 시작됐다. 1868년 메이지왕이 도쿄로 수도를 옮길 때까지 약 1000년간 일본의 수도였다. 교토=하정민 dew@donga.com / 최창봉 기자}

    • 2015-06-26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클림트의 소녀 초상화, 사상 두번째 최고가 432억원에 낙찰

    20세기 회화 거장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의 초상화가 24일 영국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2480만 파운드(약 432억 원)에 낙찰됐다고 가디언 등 주요 외신이 보도했다. ‘게르투르드 뢰베의 초상화’라는 제목이 붙은 이 그림은 클림트가 1902년 자신의 주치의 딸이었던 19세 소녀 뢰베를 그린 작품이다. 뢰베는 훗날 헝가리 재벌 엘레메르 바루크 펠소바니와 결혼했다. 펠소바니의 후손들과 클림트 재단은 이 그림의 소유권을 두고 약 20년간 소유권 분쟁을 벌여왔으나 최근 이를 경매에 내놓기로 합의했다. 양측의 구체적 합의 내용과 매수자의 신원은 알려지지 않았다. 이번 낙찰가는 예상가격 1200만~1800만 파운드를 훨씬 웃돌며 클림트의 초상화 중 두 번째로 비싸다. 최고가 작품은 2006년 미 화장품업체 에스티 로더의 창업자 후손인 로널드 로더가 사들인 1907년 작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으로 1억3500만 달러(약 1499억 원)였다. 이날 클림트의 초상화 외에도 러시아 화가 카지미르 말레비치, 프랑스 인상파 화가 에두아르드 마네 등의 작품이 대거 출품됐다. 이에 이날 하루 판매금액이 런던 경매 역사상 두 번째로 높은 1억7860만 파운드(약 3059억 원)을 기록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하정민 기자 dew@donga.com}

    • 2015-06-25
    • 좋아요
    • 코멘트
  • 日王 “간무천황 생모가 무령왕 후손”… 백제와의 인연 인정

    한일 월드컵 공동 개최를 몇 달 앞둔 2001년 12월 23일 아키히토(明仁) 일왕은 68세 생일을 맞아 왕실에서 기자회견을 갖는 자리에서 폭탄 발언을 한다. “나 자신으로서는 간무 천황(50대 천황·737∼806·재위 781∼806년)의 생모(生母)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續日本紀)’에 기록돼 있어 한국과의 인연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의 말은 월드컵 공동 개최라는 한일 간의 대형 축제를 앞두고 한국과 일본이 더 가까워졌으면 좋겠다는 취지에서 한 것이었지만 일본 내에서 금기로 통하던 천황가(家)의 백제 유래설을 천황 스스로가 깼다는 점에서 파문을 일으켰다. 천황가가 백제 왕실과 밀접했다는 주장은 일부 한일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꾸준히 제기되어 왔지만 천황 스스로가 말한 것은 처음이었다는 점, 8세기 후반에서 9세기에 걸쳐 재위했던 간무(桓武) 천황과 어머니를 구체적으로 거론했다는 점, 간무 천황 어머니가 무령왕 자손이었다는 ‘속일본기’ 내용을 그대로 인용해 자신도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밝힌 점 등은 파격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한국이나 일본에서 천황 발언에 대한 후폭풍은 별로 없었다. 일본에서는 아사히신문만이 발언을 보도했고 나머지는 모두 잠잠했다. 천황계는 만세일계(萬世一系)로 전해져 내려와 일본에서 자생했다는 황국사관(皇國史觀)에 젖어 있던 우익들이 민감하게 반응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정치적 발언이므로 일희일비할 필요 없다”고 일축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3년 뒤인 2004년 8월 3일에는 아키히토 일왕의 5촌 당숙이자 일본 왕족인 아사카노 마사히코(朝香誠彦) 씨가 수행원과 친척 2명만 데리고 무령왕릉(충남 공주)을 찾아 참배하고 간 사실이 이튿날 공주시의 발표로 알려졌다. 이들을 안내한 이석호 전 부여문화원장은 당시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백제 무령왕의 후손인 일본 왕족들의 무령왕릉에 대한 관심이 매우 크다. 이번 참배는 일본 내 여론을 의식해 비공식적으로 이뤄졌다”고 전했다. 이렇듯 일본 천황가와 백제의 인연은 단순한 전설이나 일부의 주장이 아니라 일본 왕실 스스로가 인정하는 대목이라는 점에서 한일 교류의 역사가 그렇게 간단한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한국과 일본이 더 가까워지려면 보다 오랜 역사로부터 비롯된 깊은 인연에 주목할 이유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 간무 천황의 생모 고야신립 그렇다면 아키히토 일왕이 언급한 간무 천황의 생모는 누구일까. 또 무령왕과 어떤 관계가 있는 사람일까. ‘속일본기’(789년)는 이렇게 전한다. ‘황태후의 성은 화씨(和氏)이고 이름은 신립(新笠)이다. 황태후의 선조는 백제 무령왕의 아들인 순타 태자다. 황후는 용모가 덕스럽고 정숙하여 일찍이 명성을 드러냈다. 고닌(光仁) 천황이 아직 즉위하지 않았을 때 혼인하여 맞아들였다. … 백제의 먼 조상인 도모왕(都慕王)이라는 사람은 하백(河伯)의 딸이 태양의 정기에 감응해서 태어난 사람인데 황태후는 곧 그 후손이다.’ 여기서 언급된 고닌 천황은 간무 천황의 아버지이다. 그의 부인이자 간무 천황의 생모는 고야신립(高野新笠·다카노노 니가사)이다. 기자는 일본에 있는 그의 흔적을 찾기 위해 4월 말 교토에 있는 무덤을 찾아갔다. 능은 교토 시내 중심부에서 서쪽으로 40분가량 떨어진 오에(大枝) 마을 이세코(伊勢講) 산 중턱에 있었다. 계절상 봄이었지만 낮 기온이 30도를 오르내리는 때 이른 더위가 한창이던 4월 22일 오후 이곳으로 기자를 안내한 사람은 고대 한일 교류 연구에서 일본 내 최고 권위자로 불리는 이노우에 미쓰오(井上滿郞) 교토산업대 고대사연구소장(75)이었다. 동아일보 취재팀이 한일 고대문화 교류 흔적을 취재해 연재할 것이라는 사실에 흥미를 가진 아사히신문 오사카 지국 사회부 나카노 아키라 기자(44)도 동행했다. 산 입구에 있는 계단 몇 개를 오르자 빽빽한 대나무 숲이 일행을 에워쌌다. 그 광경이 장관이어서 굳이 대나무로 유명한 교토 근교 관광지 아라시야마를 갈 필요가 없다고 느낄 정도였다. 5분쯤 산을 더 오르자 무덤이 나타났다. 고야신립이 묻힌 능은 둥근 봉분이 밖으로 드러나 있는 한국식과는 많이 달랐다. 능 바로 앞에 일반인들의 출입을 제한한 작은 철문이 있고 능 중앙에 돌로 된 도리이(鳥居·두 개의 나무 기둥을 세우고 윗부분을 나무 가로대로 연결한 문. 흔히 일본 신사 정문에 서 있다) 형태의 구조물과 그 양측의 작은 석등 2개를 다시 한 번 철문으로 감싼 일종의 이중 잠금 구조였다. 두 철문 사이의 공간에는 오른편에 비석이, 왼편에는 제법 큰 기와지붕 아래 걸린 나무 편액이 있었다. 비석에는 ‘光仁天皇皇后高野新笠大枝陵(광인천황황후고야신립대지릉)’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광인천황’이란 남편 고닌 천황을 뜻한다. 편액에는 ‘天高知日之子姬尊(천고지일지자희존)’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었는데 이는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고 유일한 존재’라는 뜻으로 모친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던 아들 간무 천황이 어머니 사후 직접 내린 시호였다. 이노우에 소장은 “시호에 ‘태양 일(日)’자를 쓰는 것은 고구려 시조이자 태양왕 후손인 주몽의 후손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며 “간무 천황도 어머니가 백제계임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기에 이런 시호를 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본 신사 입구에서 자주 보던 도리이 형태의 문이 무덤 안에 있다는 것도 특이했다. 이에 대해 이노우에 소장은 “일본인들은 도리이를 현세와 내세를 구분 짓는 상징물로 여긴다. 즉, 도리이를 통과한다는 것은 혼탁한 현세를 건너 신성한 내세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그만큼 이 무덤에 신성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 취재를 거절한 히라노 신사 교토에는 또 고야신립의 위패를 모신 ‘히라노(平野)신사’가 있다. 나라에서 헤이안(교토의 옛 이름)으로 천도를 단행한 간무 천황이 수도를 옮기면서(794년) 어머니의 혼이 담긴 위패까지 함께 옮겨 신사를 만들었다. 이때 그는 어머니에게 태황태후(太皇太后)라는 최고의 지위를 내린다. 히라노신사는 서울 광화문에 빗댈 수 있는 교토 기차역에서 시내버스로 30분 정도 북쪽에 있었다. 교토 시내 여러 신사 중 벚꽃이 가장 아름답기로 유명해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한국인들에게도 익숙한 곳이다. 특히 65대 가잔(花山·968∼1008) 천황은 이곳에서 직접 벚꽃 식수를 하기도 했다. 3월 말∼4월 초 벚꽃 절정기에는 신사 안에 전통상품, 기념품, 각종 먹거리 등을 파는 노천 가게가 대거 들어선다. 흐드러진 벚꽃 아래 한국식 포장마차와 유사한 가게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고 이를 찾는 관광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기자가 찾은 때에는 대부분 벚꽃이 진 상태였다. 벚꽃도 관광객도 거의 없는 신사는 입구에서부터 다소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5분 정도 걸어 들어가면 신사 본관이 나타난다. 구도신(久度神), 후루아키신(古開神), 이마키신(今木神), 히메신(比賣神)을 모시는 신전이 있는데 이 중 히메신이 바로 고야신립을 모신 것이다. 기자는 3월 초부터 히라노신사 측에 백제와의 인연과 관련한 취재를 요청했으나 “우리 신사가 백제 또는 한국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점을 분명히 강조하고 싶다. 따라서 취재에 응할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한국과의 관련성을 묻지 않을 테니 그냥 신사의 유래와 현재에 대한 질문 몇 개만 받아 달라는 요청도 거부했다. 신사를 걸어 나오는 뒷맛이 썼다.:: 속일본기(續日本紀) ::697년부터 791년까지 94년간의 역사를 40권 분량으로 다룬 책. 일본서기(720년)에 이어 두 번째로 만들어졌으며 일본 고대사 연구의 필수 자료로 평가받는다. 교토=하정민 기자 dew@donga.com※9회는 ‘백제 여인과 천황의 사랑이야기’입니다.}

    • 2015-06-25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